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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사색의 창] 사랑니 - 김광영

신아미디어 2013. 3. 6. 13:31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사랑니의 얄미운 처세를 차곡차곡 모아둔 딸들이 보복의 언도를 휘둘렀다. 사춘기에 접어든 배다른 남동생에게 “너는 첩이라는 말을 알고 있나?”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자 대뜸 송곳으로 찌르듯이 쏘아붙였다. “야, 너희 엄마가 바로 첩이다.” "

 

 

 

 

  사랑니 김광영


   쓸모없는 사랑니 때문에 애꿎은 어금니가 썩는다. 그러나 사랑니도 세상에 나왔으니 흔적은 남기고 갈 터이다.
   예식장에 왔다가 황급히 빠져나가는 그녀의 등이 한결 여유로워 보인다. 세파를 겪은 어깨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남의 자식을 거두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의 몸에서 태어났건 인간은 모두 귀하다고 여기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이다. 정작 아이 엄마는 골프장에 갔다는데 그녀가 시앗의 자식 생일을 챙기려고 자리를 뜨자 친구 몇 명이 속없는 짓을 한다고 쑤군댔다. 가던 그녀가 걸음을 돌이켜서 “아이가 무슨 죄가 있나. 그 아이도 불쌍하다.”라고 역성을 들며 다시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가정은 건물 임대료를 받으면서 사단이 일어났다. 장바닥에서 시작한 어묵장사 몇 년에 살림이 불같이 일자 그녀의 남편에게 숨어 있던 욕망 하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남부럽잖게 부도 이루었겠다, 대를 이을 아들만이 간절한 소망이던 그녀의 남편은 2층 커피숍에 집세를 받으러 다니다가 향수 냄새 솔솔 풍기는 얼굴마담과 눈이 맞아버렸다. 그 사실을 주변사람들은 알지만 남편을 태산같이 믿는 그녀에겐 차마 알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그런 꿍꿍이속도 모르고 사업에만 심혈을 기울이다 둘의 사이가 도저히 뗄 수 없을 즈음에야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한 마음에 사랑니 같은 여자를 뽑아내려고 수차례 쥐어뜯고 싸웠지만 시앗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만 낳아버렸다. 대를 이을 자식을 얻은 남편은 딸만 낳은 본처에게서 더더욱 멀어져갔다. 최후의 보루이던 어른들까지도 손자 낳은 작은며느리에게 정이 쏠려 그녀의 무너진 속을 더욱 허물어지게 했다. 총애를 받는 사랑니의 유세와 횡포는 가관도 아니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남편의 팔짱을 끼고 손님을 배웅하러 나가질 않나, 젯밥을 담으려고 주걱을 적시면 아들 낳은 여자가 담아야 한다고 팔꿈치로 밀쳐내질 않나. 억장이 무너지고 살이 떨려도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힘없는 어린 두 딸만이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를 쳐다볼 뿐이었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사랑니의 얄미운 처세를 차곡차곡 모아둔 딸들이 보복의 언도를 휘둘렀다. 사춘기에 접어든 배다른 남동생에게 “너는 첩이라는 말을 알고 있나?”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자 대뜸 송곳으로 찌르듯이 쏘아붙였다. “야, 너희 엄마가 바로 첩이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씌우듯 한 누나의 말에 아이가 방에 들어가서 펑펑 울면서 나도 큰엄마의 자식이었으면 좋겠다고 넋두리를 하자, 보고 있던 그녀가 아이를 부둥켜안고 달랬다. “이것아, 울지 마라. 호적상은 내가 너의 엄마다.” 사랑니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도 마음에 화상을 크게 입었고 그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을 터이다.
   사랑니를 증오하지 말자고 뼈를 깎듯 닦달한 탓이었을까, 그녀에게 병마가 찾아들었다. 당뇨와 고혈압, 골다공증까지 먹는 약만 몇 가지다. 젊은 날 시장바닥에서 고무 함지박에 아기를 담아두고 어묵장사를 해서 큰 기업체를 만든 그녀의 육신이 반기를 든 것이다. 그러기까지는 엄청나게 고생도 많이 했다. 싱싱한 생선을 사기 위해 새벽 네 시부터 자갈치시장으로 달려갔고 진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어묵을 팔았다. 팔다 남은 어묵을 동네마다 이고 다니다 개에게 쫓겨 혼비백산한 일들도 지병의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 고저리가 생긴 건 남편을 빼앗은 사랑니 때문일 터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녀의 남편에게 사랑니가 자꾸 돋아나는 것이다. 하루는 마음을 가라앉힐 겸 산사로 향하다가 길섶에서 그녀의 남편 차를 발견했다. 살금살금 곁으로 가서 차창을 들여다봤더니 또 다른 여자가 타고 있었다. 이웃에 사는 여자였다. 이미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그녀의 속에선 헛웃음만 나왔다. 그 이후부터는 본처는 뒷전이고 사랑니 1호와 2호의 살벌한 격투전이 벌어졌다.

   사랑니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사람 이력 옳게 하는 본처만 하겠는가. 그녀는 격랑의 물굽이를 타면서도 자리만은 굳게 지키고 있었다. 갈등이 죽 끓듯이 북적거려도 참고 지냈더니 드디어 힘이 몽땅 소진된 로맨스그레이가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본처가 불보살처럼 자비롭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그녀는 오늘도 모임을 마치고 서둘러 집에 들어갔다. 지금쯤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보내려고 반찬을 만들고 있을 터이다. 아침바람에 시장에서 만났더니 찬거리를 잔뜩 사들고 “우리 아들에게 반찬해서 보낸다.”라고 말했었다. 여자의 본능으로 시기질투는 했지만, 시앗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는 후덕한 그녀에게 나는 군자란이란 별호를 붙여주었다.
   사랑니가 한때 쓸모 있다면, 어금니는 평생토록 쓸모 있는 터줏대감이다.

 

 

김광영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