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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사색의 창] 눈 내리는 날 추사를 만나다 - 양미경

신아미디어 2013. 3. 8. 10:05

"오래전 그 그림을 볼 때는 그냥 지나쳤지만 상황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적막강산에 고립되고 보니 추사의 외로움을 이해할 것 같았다. 뼛속 깊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유배와 일시적인 고립은 시간 차이만 빼면 동전의 앞뒤에 불과한 것임을."

 

 

 

 

   눈 내리는 날 추사를 만나다 양미경


   눈이 내린다. 싸락눈이 흩날리더니 이내 눈은 굵어진다. 지인에게서 전화가 온다. 인근 지역에 설국이 펼쳐졌다는 소식이다.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그쪽으로 향한다. 사람의 단순함이라니!
   고성 IC로 들어서자마자 싸락눈은 함박눈으로 변했고, 차들이 주춤주춤한다. 산과 들엔 제법 눈이 쌓이고 나뭇가지마다 얹힌 눈들이 두터워져가기 시작한다. 나는,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설경을 맘껏 감상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린다.
   차들이 서행하기 시작하자 이때다 싶어 창문을 내리고 휴대폰으로 풍광을 찍는다. 즐거워하는 내 모습도 담는다. 그게 세상과 고립되는 전조라는 걸 그때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통영은 일 년에 눈 한 번 구경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타 지역보다 훨씬 따뜻해서 눈으로 문제가 일어나는 상황은 보기 어려웠고, 눈이 와도 즐겁기만 하지 불편함을 줄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한다.
   차들은 점차 시속이 느려지다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고속도로 위에 멈춰서고 말았다.
   눈은 폭설로 변했다. 기상청 예보를 믿은 게 잘못이었다. 이십 분이면 IC를 통과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달려 온 제설차마저도 작동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가 버렸네.’
   등 뒤에서 차 한 대가 계속 경적을 울리며 비상등까지 반짝반짝한다. 추월차선에 차를 세우고 서 있었는데 그쪽을 비켜달라는 것인가 보다. 내 죽을 짓을 어찌 하겠는가. 나는 꼼짝도 안 한다. 그 운전자는 결국 주행선을 바꾸더니 삿대질을 해대다가 눈길에 미끄러진다. 후유-.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면서 불안해진다. 이제 눈이 문제가 아니다. 배둔으로 나가는 오른쪽 IC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경사길인데다가 눈이 얼어 이동을 못하는 것이다. 왼쪽 길은 차들이 그나마 조금씩 움직인다. 나는 고속도를 포기하고 국도로 나가기 위해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는데 어럽쇼, 길 안내자마저 불통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왼쪽 차선을 택하는 쪽으로 모험을 하기로 한다. 멈춰 서 있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다.
   겨우 살얼음판을 뚫고 국도로 나왔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방향감각도 상실했고 세상은 온통 눈이다. 하얀 천지간에 내 차 한 대만 덩그마니 서 있을 뿐이다.

 

   하필이면 그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떠올랐을까? 세상과 권력에서 떨어져 유배된 추사가 한없는 고립감으로 그렸던 그림. 눈이 왔는지 안 왔는지는 모르지만 하얗게 얼어붙은 세상에 잣나무 세 그루와 송백 한 그루 그리고 허름한 집 한 채만 있는 그림 속 세상은 외로움과 무기력 그 자체였었다.
   나와 그의 처지를 비교할 바는 아니다. 세상이 버린 선비를 옛 제자가 잊지 않고 책을 보내고 소식을 전하기에 그 청정한 기품을 송백에 담은 것이라고 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날씨가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는 구절에서 따 온 것이라니 나의 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래전 그 그림을 볼 때는 그냥 지나쳤지만 상황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적막강산에 고립되고 보니 추사의 외로움을 이해할 것 같았다. 뼛속 깊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유배와 일시적인 고립은 시간 차이만 빼면 동전의 앞뒤에 불과한 것임을.
   추사에 비하면 나는 아주 잠시 유배되었을 뿐이다. 얼마 전의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두려움에 불과했다. 피곤한 일상에서 홀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고, 나는 지금 여유롭고 호사스러운 유배를 즐기고 있다.
   한두 시간 후면 다시 부쩍대는 사람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의 일상세계와 가족과도 만날 것이고, 피곤한 세상을 이어가야 한다. 이 자리는 잠깐이지만 요긴한 휴식이다. 외로움을 다독일 수 있고,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잊힌 도시의 귀퉁이에서 고립된 채로 나는 아예 시트를 뒤로 젖히고 누워버렸다. 쌓인 눈이 차창마저 하얗게 덮고 있다. 인생은 하늘이 내린 이승으로의 유배일까. 차창 너머로 송백을 보았던가? 그 사이로 노인 한 분이 어깨의 눈을 털며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내 눈길도 그 뒤를 하염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양미경  --------------------------------------
   1994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외딴 곳 그 작은 집≫, ≪고양이는 썰매를 끌지 않는다≫, ≪생각을 겨냥한 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