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하나같이 하얗게 덮어주는 평등의 사도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백색의 천국으로 변한 모습을 보면 누구나 신비감에 젖어든다. 익숙했던 일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낯선 신비의 세계가 꿈처럼 펼쳐진다."
하얀 이데올로기 - 신재기
올해는 눈이 자주 왔다. 대구 지역에 눈이 올해같이 오는 일은 드물다. 그것도 산과 들판뿐만 아니라, 도시의 구석구석에 한 달 지나도록 눈이 녹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은 정말 몇 십 년 만에 처음이다. 마치 집에 돌아갈 눈치가 전혀 없는, 사랑방에 한 달째 묵고 있는 손님 같았다. 운전할 때나 보행할 때 얼어붙은 눈은 심신을 긴장시키고 불편하게 했다. 지금이 일월 중순이니 앞으로 눈이 올 수 있는 날도 숱하게 남았다. 음지 담벼락 밑에 남은 눈덩이를 보노라면 봄은 아직 저 멀리 산 너머에 있는 것 같다.
눈은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하나같이 하얗게 덮어주는 평등의 사도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백색의 천국으로 변한 모습을 보면 누구나 신비감에 젖어든다. 익숙했던 일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낯선 신비의 세계가 꿈처럼 펼쳐진다. 신이 내린 선물 앞에서 죽음과 삶은 경계조차 사라지고 만다. 김진섭은 <백설부>에서 이를 두고 “말할 수 없는 환희 속에 우리가 느끼는 감상은 이 아름다운 밤을 헛되어 자버렸다는 것에 대한 후회의 정”이라고 하면서, 눈을 “겨울의 서정시”라 했다.
생활에서 한발 물러나 바라보면, 눈은 찬미와 동경의 대상이다. ‘첫눈’은 젊은 연인이 만들어 가는 사랑의 꽃이고, 상서로운 미래의 희망이기도 하다. 눈이 많이 내리면 그해는 풍년이 든다는 옛말도 있다. 눈은 우리에게 언제나 아름답고 행복한 꿈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그런데 눈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눈이 고된 노동의 아이콘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내 군대생활의 팔 할은 제설 작업이었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눈 내린 세상은 하얀 지옥이다. 단절과 침몰의 절망이고 노동의 과부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들은 올겨울 내내 제설작업을 했다. 노면에 얼어붙어 돌덩이처럼 단단한 눈덩이를 깨느라고 잠시 쉴 틈도 없었다. 어느 정도 정상을 회복했는가 싶으면 또 눈이 내렸다. 악순환이었다. 음지에 눈이 잘 녹지 않듯이 서민이 사는 동네일수록 구석구석에 눈이 오래 남는 법이다. 눈을 즐기는 사람과 눈을 치우는 사람의 차이는 극명하다. 눈 자체는 아름다운 자연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현실 생활 안에서 눈은 노동이고 고통일 수 있다. 한쪽을 보고 그것만을 믿는 것은 허위다.
백설, 너는 하얀 이데올로기다.
신재기 ---------------------------------
평론집: ≪비평의 자의식≫, ≪여백과 겸손≫, ≪수필과 사이버리즘≫, ≪수필과 시의 언어≫. 산문집: ≪언어의 무늬와 빛깔≫,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계획한다, 분서를≫, ≪경산신아리랑≫, ≪프라이버시의 종말≫, ≪앉은 자리가 꽃자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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