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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2월호, 권두수필] 수필을 위한 아날로지 - 유병근

신아미디어 2013. 2. 28. 13:42

"수필은 무와 유를 뭉뚱그린 진술로 이루어지는 결과물입니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과 속살을 함께 직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인 언어/문장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포장물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수필가는 고뇌합니다. 그때 무는 또 다른 유라는 사물이 되어 나타납니다."

 

 

 

 

 

 

   수필을 위한 아날로지  -  유병근 


   보이지 아니하고 들리지 않는 사물의 내면 탐색이 수필의 본질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습니다. 하기에 수필가는 암흑과 같은 지하세계를 찾아 이를 드러내는 탐구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물을 겉보기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수필의 본질과는 먼 이야기입니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모든 사물은 이런저런 사물의 내면을 갖습니다. 가령 여기 있는 책상과 전화기와 책 그리고 연필꽂이 등은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가시적인 사물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책상이며 전화기라는 허울만 둘러쓰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기에 수필가는 허울 너머의 책상, 전화기 그리고 기타 등등의 내면을 천착하여 책상과 전화기 속의 세계를 구체적인 감각언어로 표현하고자 노력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을 찾아내어 새롭게 드러낼 때 세상의 눈은 어리둥절합니다. 하기에 낯설다는 말을 듣습니다. 처음 가는 길은 낯섭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섭니다. 수필가는 눈에 익은 것만을 음미하려는 탐미주의자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낯선 것과 낯을 익혀 낯설지 않은 친근한 대목에 이르고자 합니다. 하지만 다시 낯선 것을 찾아가는 험준한 길에 선 자가 말할 나위도 없이 수필가입니다. 하기에 수필가는 세계를 앞서가는 고행주의자입니다. 이를 마다하고 편안한 길만을 찾을 경우 수필의 몰골은 지나간 이야기나 즐기는 새로움이 없는 글쓰기, 상식적인 글쓰기로 전락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낯선 것일까요. 이에 답을 구하기 위하여 무無를 끌어오고자 합니다. 무는 보이지 않는 것의 보임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입니다. 다른 이름이기에 낯선 무는 말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할 수 있게 구조조정을 시도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無는 그 상대인 유有를 드러냅니다. 이로써 보면 무와 유는 손의 바닥과 등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무와 유는 서로 껴안으면서 각각이 아닌 한몸으로 존재합니다. 무는 유의 소프트웨어이며 유는 무를 감싼 하드웨어라고 하겠습니다. 하므로 사물이라고 일컬을 때 무+유를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기에 수필은 무와 유를 뭉뚱그린 진술로 이루어지는 결과물입니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과 속살을 함께 직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인 언어/문장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포장물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수필가는 고뇌합니다. 그때 무는 또 다른 유라는 사물이 되어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소리는 몸이 없습니다. 공기 또한 몸이 없습니다. 몸 없는 관념을 구체어로 변환시킬 경우 수필은 당연히 낯설어집니다. 음색, 음향에 곁들여 음형音形을 놓칠 수 없습니다. 가령 부드러운 목소리는 둥근 모양, 성깔난 목소리는 세모꼴, 정직/정확한 말은 네모꼴이라는 등 소리를 형태로 만져볼 수 있습니다.

 

   대중문화를 으뜸으로 삼는 시대에 수필은 자칫 장식품 혹은 걸림돌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떨려나기 쉽습니다. 즉흥 흥행시대의 재미와 오락에 입맛을 다신 대중은 심층적인 것보다는 표피적인 감각에 보다 더 흥미를 갖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것보다는 쉽게 보고 재미를 느끼고자 하는 것이 디지털시대의 특징이라고 보아 결코 무리는 아닙니다.
   애써 머리에 입력하지 않아도 기계가 알아서 척척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복잡함은 간편함으로 느림은 빠름으로 현대인의 삶의 구조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수필을 논하고 쓴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그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경제지상주의는 재력의 축적으로 인간의 모든 것이 평가되고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수필은 재력축적과는 전혀 방향이 다른 비경제적인 결과물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수필은 수필가들만의 싱거운 축제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필가는 경제지상주의적인, 세속적인 면에 눈을 돌리지 아니합니다. 인간정신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은 삶의 가치척도를 어떻게 재느냐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낯설게 하기는 수필가의 경우 줄창 이어나가야 하는 수필정신입니다. 굳이 그렇게 하면서 수필에 골몰합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를 새롭게 찾아내고 새롭게 갈고 닦는 거기에 수필을 하는 보람, 우리말을 더욱 깊이 있고 참신하게 갈고 닦는 길을 알기 때문입니다. 수필가는 그 하나만으로도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한 발언을 하는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생활의 가장 기본인 언어를 보다 가치 있고 생기 차게 가꾸는 수필가의 공적으로 보아 수필은 언어사회를 풍요롭게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셈입니다.
   낯선 수필은 대체로 어리둥절하고 까다롭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언어를 보다 구체적이고 깊고 참신하게 가꾸려는 노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구조를 낯설게 함으로써 새로운 언어감각에의 기틀을 쌓는 셈이 됩니다. 하기에 수필가는 있는 그대로의 서술구조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서술구조로 변화 시도함으로써 세계의 참신한 면을 끌어내려고 합니다. 언어세공가인 수필가는 금속세공가처럼 기존의 언어체계에 새 언어체계를 세우고자 수필적 상상을 갈고 닦는 노력을 아끼지 아니합니다.
   어쩌다 매수가 짧은 수필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입니다. 수필은 문단가름으로 의미의 건너뜀과 긴장감과 참신함을 꾀하려 하는데 짧은 수필형태는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운이 부족하고 의미구축에도 얕은 감이 드러나는 느낌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칫 시적이라는 오해마저 불러오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짧은 수필 형태에 새로운 관심을 두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한 시도 또한 수필의 격을 참신하게 직조하려는 노력의 일단이라고 보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안이한 지성과 감성으로 수필에 머리를 내미는 일은 수필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결핍된 정신이라고 보겠습니다. 긴장미로 재무장하기 위해서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지혜도 있어야겠습니다. 수필은 담담하고 고즈넉한 문학에서 보다 더 과감한 터치로 그리는 야수파정신 또한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널리 알고 있듯 시는 무용, 산문은 도보라고 말한 폴 발레리의 말을 빌린다면 짧은 수필은 무용도 도보도 아닌 어정쩡한 꼴이나 다름없겠습니다. 그렇다면 짧은 수필은 매수가 옹찬 수필에 손가락질당하고 시에 손가락질당하는 엉거주춤한 어설픈 처신이 됩니다. 어설프지 않으려고 짧은 수필에 끼우는 긴밀하고 다양한 언어의 압축처방을 생각하는 경우 또한 있습니다. 기쁨은 기쁨, 슬픔은 슬픔이라는 장르 아닌가 하고.
   하지만 짧은 수필에도 당연히 수필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줍니다. 수필은 고정된 그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수가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필의 값을 조금이나마 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숙제처럼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짧은 수필이든 긴 수필이든 문학을 지향하는 수필은 베틀의 날실, 씨실과 같은 서로의 빠듯한 유대관계로 보다 튼실한 손을 잡습니다. 그 손에 지성과 감성이라는 땀이 배입니다. 유에서 무를, 무에서 유를 찾아 가는 수필가는 신발 끈을 매는 손에도 단단한 땀이 배입니다. 그 땀에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가 만져집니다.
   수필가에 의하여 세계는, 언어는 참신한 얼굴로 다시 태어납니다.

 

유병근  -----------------------------------------
   1970년 ≪월간문학≫ 등단, 수필담론집: ≪수필의 맥을 찾아≫ 외, 시집: ≪까치똥≫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