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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월호, 월평] 글쓰기 욕망의 존재론적 시각 - 허상문

신아미디어 2013. 2. 27. 18:37

"또 다시 시작되는 한 해를 맞으며 여태까지의 수필문학의 준거틀을 반성하고 현재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수필문학을 새롭게 정초시킬 구상을 해볼 필요성이 있을 듯하다. 필자가 ≪수필과비평≫의 새로운 월평을 시작하며 ‘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형도를 구상하며’라는 비교적 거창한 화두로 ‘서론’을 삼고자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글쓰기 욕망의  존재론적 시각  허상문

 

 

   1. 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형도를 구상하며


   그동안 수필문학만큼 수많은 모멸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해 온 문학 장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막 거쳐 온 21세기 초반의 십여 년을 되돌아볼 때, 우리 수필문학은 여전히 양적인 풍요로움에 비해 그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자의 치욕스러움으로 가득하다. 시나 소설과 같은 다른 문학 장르와 비교해서 문학사적 역사나 전통에서의 모자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필문학은 아직도 자신의 모습에 대해 스스로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그 문학적 특성마저도 비판되거나 부정되어 왔다. 이제 또 다시 시작되는 한 해를 맞으며 여태까지의 수필문학의 준거틀을 반성하고 현재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수필문학을 새롭게 정초시킬 구상을 해볼 필요성이 있을 듯하다. 필자가 ≪수필과비평≫의 새로운 월평을 시작하며 ‘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형도를 구상하며’라는 비교적 거창한 화두로 ‘서론’을 삼고자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오늘날의 문학은 분명 변하고 있다. 고도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가고 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면에 준동하고 있는 자본화는 문학시장에도 깊게 침투해서 문학상업주의 현상을 낳고 있고, 과학기술의 상징과 같은 컴퓨터로 대변되는 전자매체와 영화 등의 시각매체들이 문학을 주변화시키며 문학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외부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우려는 문학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런 조건이 문학정신을 훼손하고 그 양식 자체에까지 위협을 가하는 단계에 이르러 마침내 문학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흔히 ‘문학위기론’으로 불리어지는 이런 현상이 반드시 당대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문학은 그 태생에서부터 자본주의와 뗄 수 없는 함수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특히 소설이나 수필과 같은 산문문학은 산업화 이후의 근대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발생하고 발전해 왔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아니 오히려 서구사회에서 산업혁명이 완결되고 기술문명이 본격화되면서 산문문학은 경쟁적 동반 관계를 이루면서 근대의 산물이라는 새로운 문학양식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왔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과학기술 시대의 문학의 운명을 운위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며 문학 장르에만 한정되는 고유한 문제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에 관하여 더욱 상세하게 논의할 여지는 없지만, 문제는 사회 전반에 작용하고 있는 거대 자본의 시장 메커니즘과 그에 편승한 대중매체들이 현대예술 전반을 휩쓸고 있고, 이 같은 현상이 문학의 위기를 넘어 문학 허무주의를 고취시키며 우리들에게 심각한 불안감으로 엄습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라는 요령부득의 대중음악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 같은 현상이 결국 대중영상매체의 극치일 뿐이라고 폄하하면서도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런 대중음악에 열광하면서도 문학의 존재는 부인하는 것일까. 우리 주변에서 영상을 매개로 한 행사는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서는 인쇄매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학전성시대는 올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제 우리들에게 예술이 종교적 제의와 같은 품위를 지니던 시절은 사라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예술작품과 인간 사이의 몰입을 통해 신비한 신적 체험을 맛보는 아우라는 상실되어 버리고 말았다.(Walter Benjamin, Illuminations, New York: Schoken Books, 1969, 224쪽)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눈앞에 보이는 현실뿐이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 돈, 명예, 권력…. 가시적인 현실보다는 상상적이고 환상적인 정신의 산물인 문학과 예술세계에 더 커다란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는 것이며, 깊은 상상력과 정서를 통한 현실 세계의 재현은 불가능한 것인가. 반복되는 인간과 삶의 일상과 역사와 대한 새로운 글쓰기와 글읽기, 그를 통한 ‘작가의 탄생’과 ‘독자의 탄생’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이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자본과 대중문화, 그리고 미디어와 기계에 독자들을 모두 빼앗겨버렸다는 데서 문학 위기의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문학을 외면하는 이유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자기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문학의 위기라는 현실에 맞서 오히려 가장 문학다운 본령을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 문학은 탈현대를 넘어 문학의 본질을 담아내는 새로운 좌표와 실천적 방향에 대해 보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자리에 서 있다.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도 특히 소설이나 수필은 영화, 인터넷 등의 대중매체와 더불어 끊임없이 교접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담론구조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서사문학은 종이에서 뛰어나와 온갖 장르 속에서 몸을 비틀고 다시 그 변화의 양상을 자신의 몸에 담고 스스로를 진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삶의 부면 곳곳에 침투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과 더불어 서사문학은 이제 형태는 물론 세계관에서조차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세상과 어우러진 삶과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수필문학의 본령이라고 할 때, 멀리서 가까이서 혹은 안과 밖에서 삶과 존재의 모습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수필문학의 운명이다. 산문문학이 탈현대의 시대를 맞아 새로운 방향으로 몸 바꾸기를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오늘의 수필문학도 고도자본주의와 과학기술시대의 문학담론이 만들어내는 스펙트럼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수필문학은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정초시켜야 할 것인가.
   수필문학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구상하는 이 자리가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수필문학에 대한 몇 가지의 고정된 사유방식에 대한 수술, 즉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아직도 많은 수필가나 비평가들은 수필문학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붓 가는 대로 쓰기’, ‘자기 고백의 문학’, 혹은 ‘일상성의 문학’이라는 명제에 얽매여 있다. 그리하여 수필은 가뜩이나 소통 불가능한 시대에 외로운 독백에 그치는 문학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심지어 수필문학이 저급한 대중문화와 손잡고 있는 키치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제 우리 시대 수필문학에 대한 평가절하의 알리바이로 사용되는 이 같은 관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필문학은 무엇보다 ‘일상성’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다른 문학 장르와 마찬가지로, 아니 특히 수필문학은 일상적 생활체험이 창작의 원천이 된다. 여기서 일상적 생활체험이 강조되는 것은 단순히 실제 생활에서 획득된 체험에 바탕을 둔 작품이라는 의미는 물론이고 작가의 일상체험을 통해서만 객관적 현실을 반영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체험은 작가가 만나는 현실과 창작 주체인 작가의 접촉이 이루어지는 장소로서의 일종의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체험이 곧바로 문학의 진실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체험에만 의지해서는 다양한 양상의 사회적 삶의 전체성을 파악하기 어렵다. 일상생활에서의 체험은 작가의 ‘문학적 진실’을 창조하는 과정에서의 기초자료일 뿐이다. 여기서의 문학적 진실이라는 말은 작가의 주관이 개입된 진실이다. 복잡다단한 일상생활의 양상들을 통하여 본질적이고 합법칙적인 내용을 구축해냄으로써 하나의 문학적 형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작가는 일상적 삶의 체험을 진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형상화를 통하여 자신의 인식이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상생활이라는 객관적 요소를 작가의 주관적 인식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모습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문학적 진실이 담기게 되고 문학적 형상화가 이루어진 진정한 작품이 나타나게 된다.
   앞으로 수필문학이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상성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보다 넓은 전망을 지닌 문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하자면 실체론적 전제를 바탕으로 일상에서 역사로, 개인에서 집단으로, 대중문화적 관점에서 고급문화적 관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같은 대립항들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혼효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역할에 달려 있다. 작품 창작에 있어서 작가의 관점은 전적으로 작가 개인의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더 주동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수필문학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면서 더 큰 전망으로 인간과 삶을 이해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작품이 이야기하는 주체의 내면만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주체의 경계를 넘어서서 타자와 세상을 지향하느냐 하는 문제가 작품의 예술성과 문학성을 따지는 주요한 지표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수필문학에서 금기시 되어온 전형성이나 총체성의 개념들도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작품에서 작가의 세계관이 어느 정도 주도적으로 담겨 있느냐에 따라서 그 작품은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열린 전망을 가진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세계관은 작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프리즘으로 비유된다. 그야말로 세계관은 “모든 개인의 심오한 개인적 경험이며,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보편적인 문제를 상징적인 방법으로 반영하는 이념의 총체”(게오르그 루카치, <등장인물의 지적 인상>, ≪예술의 새로운 시각≫, 지양사, 1985, 49쪽)이다. 흔히 시와 소설에 비해 수필문학이 남루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문학주의라는 이름으로 대사회적 삶과 인간에 대한 관계맺음의 외연 확대에 소홀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수필문학은 텍스트주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원대한 전망의 세상읽기와 글쓰기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필가들뿐만 아니라 비평가들도 일정 부분 책임을 면키 어렵다. 그동안 우리 수필비평은 초보자를 위한 수준의 문체, 구성 등등에 대한 형식적 논의에 머물러 수필문학의 담론 자체를 답보 상태로 머물러 있게 한 감이 없지 않다. 이런 형식적 논의는 물론 그 자체로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수필론을 다룬 허다한 저술이나 수필 강습에서 충분히 다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비평적 방식이 여러 형태로 반복되며 수필비평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문학연구방법론으로서도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형식이나 구조만을 중점적으로 따지는 형식주의비평이나 신비평과 같은 식의 비평태도는 이제 구시대의 방식이 되었다. 비평의 본질적인 임무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관습적이고 통상적인 사유구조의 각질을 파괴하는 데 있다. 시와 소설 비평에서와 같이 수필문학 비평에서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작품에 담긴 작가의 상상력과 정서를 밝혀내고 이를 고무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에 힘입은 작가들도 새로운 차원에서의 학습과 창작을 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수필문학은 일상적 글쓰기와 형식적 비평이 반복, 답습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익을 남기기 위한 자본이 시장에서 승리를 위한 이벤트에 들러리서듯이 주례사비평과 들러리비평이 난무하고 있다. 보다 깊고 폭넓은 인식으로 수필비평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 올려야 수필문학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의 기능은 “개인이 배운 바를 남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이미 알려진 현실과 연관시키며, 말과 글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한 어느 서구 비평가의 이야기는(Raymond Williams, The Long Revolution, Harmonsworth: Penguin Books, 1984, 315쪽) 이 경우에도 유효하다. 이 같은 노력은  작가의 몫이면서 동시에 비평가의 몫이다.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의 차원에서도 본격적인 메타비평과 논쟁적 대화가 수필문학을 더 높은 차원으로 향상시킬 수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또 한 가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우리 수필문학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이다. 먼저 오늘날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식으로 생산되고 있는 문학 매체들과 거기서 양산되는 수필가들이 수필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많은 수필가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문학의 대중성 확보라는 순기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같은 대중추수주의가 문학의 고급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 수필문학은 양적 풍요와 질적 저하라는 대중성과 고급성 사이의 갈림길에 서서 그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형국에 놓여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수필문학에 애정을 가지고 그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은 우리 수필문학계에 만연해 있는 상업주의와 제 식구 감싸기식의 분파주의를 심각한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사회 전반이 그렇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과 절제의 미덕이 아닌가 한다. 우리의 선배들이 안팎으로 견지했던 겸손과 절제의 문학적 태도와 미덕이 훌륭한 수필문학을 꽃피울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지금 수필문학은 우리문학계의 재앙인가 축복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여태 수필문단의 우울한 현실을 이야기한 것은 수필문학이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제언적 성격의 논의에 불과한 것이지만, 앞으로 이런 논의는 보다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며 그에 대한 방책이 구상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우리 수필문학에 대한 자학과 좌절은 그만두자.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지금 우리가 다시 일어나 기약할 수 없는 항해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수필문학이 그동안의 수난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희망의 문학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대장장이의 시뻘건 풀무질과 같은 가열된 단련이다.

 

   2. 고통의 해석학 혹은 고통의 글쓰기


   T. 아도르노의 어법을 빌면, 문학이 우리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아도르노에게 철학이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구체적인 고통을 읽어내는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듯,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철학이나 문학이란 고통의 진리성에 대한 의미 찾기, 즉 ‘고통의 해석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종하, ≪아도르노 고통의 해석학≫, 살림출판사,  2007, 13쪽) 그렇다면 다시 우리가 문학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는 문학이 세상에 대한 고통과 좌절의 체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이때의 문학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위안 대신에 현재의 삶에 대한 깊은 좌절과 절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작가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어두운 절망의 창을 통하여 세상과 대면해야 하고, 그 모습을 그려내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고통의 기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작가는 그 고통을 바라보고 견뎌 내어야 하며 그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야만 작가는 문학을 통하여 우리가 삶의 조건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인식할 수 있으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 말하자면 작가란 절망과 고통의 물음을 통하여 희망과 신념을 찾아내야 하는 존재들이다. 앞서도 비추었듯이, 문학의 사회적인 존재 조건 자체가 문제시되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많은 작가들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문학의 존재이유가 무엇인가.’를 되묻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작가들이 선택한 문학적 주제에는 이미 필연적으로 작가의 내적인 욕망이 다양한 형태로 투사되어 있다. 특히 작가들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와 제재는 일정한 지향성을 지닌 채 존재론적 욕망의 근원을 이룬다. 우리 시대의 많은 작가들은 개인적·사회적 삶의 고통에 대해 담지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중요한 담론 영역으로 발전시켜 나아가고자 한다. 예컨대 박용수의 <하루>, 정윤택의 <세월의 빈 모퉁이>, 심종은의 <갯벌>과 같은 작품을 살펴보자.

 

   i) 하루살이에 비하면 나는 또한 얼마나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던가. 게으름과 안일, 무능력과 이기심. 고달프다, 배고프다, 아프다, 싱겁다, 짜다, 덥다, 춥다, 무료하다. 헤아릴 수 없는 불평과 불만은 또 어떤가. 혹시 더 단단한 성을 쌓고 변신을 두려워하며 지키기에 급급한 삶은 아니었던가.
-박용수, <하루>에서

 

   ii) 때로는 지난날 살얼음을 걷던 가긍可矜스러운 일들이 분홍빛으로 찾아들 때도 있다. 아마도 기억과 망각 사이를 오가는 상념의 뿌리에는 모든 것을 어우르는 그리움이 돋아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쓰디쓴 눈물방울도 달콤함을 간직하고, 날 세운 시선도 세월의 가슴을 비비고 나면 내 안에 달무리를 짓는다.
-정윤택, <세월의 빈 모퉁이>에서

 

   iii) 갈매기와 노랑부리백로, 그리고 저어새와 도요새, 물떼새 등이 터를 잡았던 보금자리. 그 터전에 자리 잡힌 동심을 아예 잃어버릴까 벌써부터 가슴이 아려온다. 먼 훗날 우리들 가슴에 꽃피울 한 토막 추억거리를 잃는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 아닌가.
-심종은, <갯벌>에서


   i)의 작품에서 작가는 하루살이와 인간의 대조를 통하여 현대적 인간과 삶의 허무한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기 위해 “새살이 돋도록 단단한 껍질을 벗어내는 고통을 스물다섯 번이나” 하면서 거듭나기를 한다. 그야말로 하루살이는 “자멸을 통해 얻은 자득의 자유. 자기를 죽이고 또 죽이는 일”을 통하여 진정한 삶의 모습을 이루어 낸다. 그에 반하여 현실에 안주해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루하루 변화 없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고통이다. i)에서 화자가 자책하듯이, 우리는 “게으름과 안일, 무능력과 이기심”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불평과 불만”을 거듭하며 살아간다. 카프카의≪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그랬듯이, <하루>에서 작가의 물음은 다분히 실존적이다. 그야말로 현대인간의 하루하루는 늘 피곤하고 불안에 쫓기는 것이어서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지독한 무력함과 다른 한편 억압된 삶 속에서 자유와 변신을 얻고 싶어 한다. 여기서 화자가 하루살이로 변신하고자 하는 욕망은 바로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무력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면 나는 정말 오늘, 하루살이같이 생의 끝자락 불꽃 속으로 나를 던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다시 당면하게 된다. 개인적 삶의 고통과 사회적 불화를 겪으면서도 그곳에서 한걸음도 벗어날 수 없고, 조금도 변신할 수 없는 것이 현대 인간의 비극적 운명임을 <하루>의 작가는 보여준다.
   ii)의 <세월의 빈 모퉁이>, iii)의 <갯벌>에서 작가들의 삶에 대한 고통은 더욱 커다란 영역으로 나아간다. <세월의 빈 모퉁이>는 우리 현대사의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역사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역사는 4·3 사건을 덮으려 하고 있지만 그 역사에 대한 가슴앓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화자가 4·3에서 겪은 혼돈과 미망未忘의 체험 속에서 자각하게 되는 것은 “잊어버려야 할 과거, 잊지 못하는 과거, 피아가 따로 없는 상처투성이” 뿐이다. 제주의 4·3에서 맞부딪혔던 비합리적인 과거를 통해 현실의 낯선 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것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아있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상흔傷痕이었다.” 역사로 남아있는 기록은 미망迷妄 속 고통스런 현실로 다가온다. 무장대가 집에 불을 지르고 가족들은 뒷마당으로 피신하고, 뒤쫓아 온 무장대 칼끝이 아버지를 내리치는 순간을 화자는 “기억과 망각 사이를 오가는 상념의 뿌리”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머물렀던 제주라는 공간은 역사적 실체와 기록, 혹은 사실과 허구 사이에 놓여있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화자의 일상을 지배하는 합리의 세계로부터 일탈된 비합리의 세계이며, 언어라는 기록으로 표현될 수 없는 공간이다. 자신을 지탱해 온 합리적인 언어소통의 기반이 허물어지는 곳이다.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낳은 폭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의 삶 속에 은밀하고도 집요한 내면적 파괴력으로 남아 있게 된다.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개인에게 잘못된 역사란 하나의 억압이며 폭력일 뿐이라는 절망감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세월의 빈 모퉁이>에서 작가의 다음과 발언은 아픈 여운으로 남는다. “내 삶에 새겨진 존재의 의미가 때로는 기차의 선로 위를 스쳐가는 바람이 된다. 그래도 각인된 아픈 상처는 쓰나미의 뒷모습으로 남는다. 상처는 아물지만 흉터는 남아있는 것처럼…….”
   인용 iii)이 보여주듯이, <갯벌>의 기본적 에피소드는 가족들과의 인천앞바다 야유회에서 바라보는 오염된 바다와 물질적 삶의 현실로부터 이루어진다. 작가는 <갯벌>에서 이 시대의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와 현란한 욕망과 소비의 현상을 바라본다. “갯벌이 놓였던 자리에 조개와 게를 잡으며 낚시질을 즐기던 추억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이제 “가까운 세월 안에 꿈도 희망마저도 모두 삼켜버리고 말 것”임을 예고하며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우리시대의 자본주의적 삶의 상황 속에서는 오직 개인들이 삶의 현재를 탐닉하면서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의 혜택만 누리고자 할 뿐이다. 매립한 갯벌에는 공항 청사를 비롯한 건물들만 들어섰을 뿐, 황량한 벌판으로 남게 되었다. “시대적 변천과정이라고 짚고 넘어가기엔 그저 아쉬움만 가득 고여 올 뿐이다” 는 화자의 진술에는 눈에 띄는 생태계의 파괴뿐만 아니라, 이 같은 문제를 불러일으킨 물질문명과 인간중심주의, 걷잡을 수 없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성찰까지 담겨 있다. <갯벌>에서 작가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성의 상실은 오늘날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고통의 다른 표현이며, 이를 ‘갯벌’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3. 어머니·채송화·다락방의 기억, 그리움의 서정


   최근 들어 장르를 막론하고 많은 문학작품들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우연의 일치로만 돌릴 수 없는 이 같은 현상은 고통스런 삶의 현실로부터 상실된 아득한 곳 혹은 머나먼 과거의 시간으로 떠나고자 하는 소망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그리움의 서정’이라 명명할 수 있다면, 여기에는 작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삶의 현실이 고통과 절망의 그것이라는 함축이 담겨있다. 그리움의 서정이라는 말이 주는 울림처럼. 시대와 사회와의 여러 불화로 인해 무력한 길을 걷고 있는 작가들이 보이고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나 대상에 대한 정서적인 친화는 우리에게 지금 현재의 삶의 모습을 우울하게 반추하게 한다.
   루이스 보르헤스가 이야기 했듯이, 현재의 암울하고 곤궁한 삶의 현실 속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과거의 기록으로 소장되어 있는 환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바로 세월이 문학을 깎아 내릴 때가 아니라 풍부하게 만드는 때이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2008, 29쪽) 보르헤스에 기대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실재와 현실인식이 기실은 모두 환상에 근거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빠져드는 환상이나 상상 속에 진짜 이 세상과 우주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작가는 환상 속의 신선하고 낯선 어휘로 이 세상과 삶을 그려내야 한다는 은밀한 의무감에 사로잡히며, 저 피안의 시간 속에 담긴 ‘어머니’, ‘채송화’, ‘다락방’을 기억하며 그리워한다.

 

   i) 특히 잘 익은 김치를 넣어 조린 돼지등뼈 깊은 맛은 환상적이고 감각적이다. 배추김치 서너 쪽에 돼지등뼈, 마늘생강, 매실청, 들기름 듬뿍 넣어 압력솥에 찜을 할 때 뿜어져 나오는 냄새는 나를 수천 킬로 떨어져 나온 곳으로 데려다 준다. 넓은 들판 옹달샘이 있는 고향으로,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던 복사꽃 꽃비 내리던 과수원으로…….
-김윤재, <겨울은 익어간다>에서

 

   ii) 기다림을 주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주는 것은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명약이다. 행복한 마음을 갖기 위해 난 봄부터 부지런해야 했다. 화분에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리고 새순이 올라오면 열심히 물을 준다. 키워낸 채송화와 봉선화가 아침 햇살을 받고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꽃송이를 세는 즐거움으로 긴 여름이 지루하지 않다. 또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면서 가는 세월의 야속함을 잊는다.
-최행자, <가을 속 내 공간>에서

 

   iii) 어쩌면 나는 다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끊어진 젖줄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 불가능한데도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은 거다.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하다. 개미꿀단지들을 바라보며 내 기억의 다락방에서는 그동안 시간과 함께 단맛을 갈무리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도록 저장해온 우리들의 추억들이 그 속에 녹아 있다.
-송복련, <달콤한 위로-꿀단지>에서

 

   위에서 예시한 <겨울은 익어간다>, <가을 속 내 공간>, <달콤한 위로-꿀단지>는 모두 그리움과 기다림의 정서로 가득하다. <겨울은 익어간다>에서 작가는 김장을 매개로하여 우리들 삶의 근원이며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그려낸다. i)의 인용에서처럼, 화자는 어머니와 함께 담그던 김장김치를 기억하며 “넓은 들판 옹달샘이 있는 고향으로,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던 복사꽃 꽃비 내리던 과수원으로” 달려간다. 김치로부터 화자가 얻는 지혜는 어머니에 대한 연상으로 환치된다. 속이 꽉 찬 배추는 어머니와 같이 속이 꽉 찬 사람의 모습과 같다. “결 속에 웬만한 일은 넣어두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아파도 신음하지 않고 기뻐도 겅중거리지 않는다. 서러워도 대거리하지 않고 억울해도 변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김치가 짠지가 되고 그릇이 그륵이 되는 과정을 겪으며 터득한 사랑인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어머니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 시킨다는 점에서 모든 사물의 시원을 상징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자녀들을 위해 자신이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언제나 헌신하고 자애를 베푸는 인자함을 상징한다. 어머니의 이 같은 모습은 속이 꽉 찬 배추와 같다. 이 시대에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은 그런 헌신, 사랑, 너그러움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래서 겨울이 익어가는 속에서 이 같은 ‘아름다운 정서’는 어머니에 대한 모정慕情과 함께 사각대며 피어오른다.
   <가을 속 내 공간>에서 작가는 베란다의 화분에서 자란 꽃들을 통해서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간을 추적한다. 화자는 말한다. “채송화, 봉선화 그리고 국화가 마음껏 꽃을 피워내 어린 시절의 꽃밭으로 나를 끌고 간다.” 채송화, 봉선화, 국화는 제 각각 다른 모습으로 시간과 인생의 의미를 제시한다.
   채송화를 바라보면서 화자는 “진액이 다 빠져 버린 듯한 늙은 살가죽 같은 채송화의 모습, 그 생애를 지켜본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보면 초라하다고 서둘러 걷어내기를 바랄까?” 하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고자 하는 생명체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난날의 아름다움을 잃고 싶어 하진 않는다. 봉선화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봉선화가 한창 꽃 피울 때 손톱에 곱게 물들이고 싶은 동심과 연심戀心이 아직도 살아나는 것을 차마 어찌하지 못한다. “첫사랑 그리며 손톱에 물든 꽃물 지워질까 애태웠다던 옛 여인들의 애절함이 생각나 그 설움 내 설움처럼 한번 울어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봉선화를 통하여 작가가 그려내는 흘러간 시간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애절하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또한 국화는 “강추위 속 찬바람 맞을 땐 얼지 않았을까 걱정하면서도 봄이면 보란 듯이 새순 키우는 강인함”으로 기다림과 인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바라보는 채송화, 봉선화, 국화의 모습은 각기 다른 ‘나’의 모습이다. 화자는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인생에서 그리움과 기다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작가의 “기다림을 주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주는 것은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명약이다.” 라는 발언은 독자들에게 따뜻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달콤한 위로-꿀단지>는 어린 시절 다락방에 숨겨진 꿀단지를 몰래 훔쳐 먹던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의 삶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걸상을 딛고 철봉 하듯이 다락 위로 올라가서 먹는 꿀맛은, 몰래 먹기 때문에 더 달콤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인생에 있어서 그 꿀맛에 대한 추억은 언제나 달콤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삶의 연륜을 더해 갈수록 그러한 위로가 사라져 가고 있다. 화자는 어느새 아이들과 남편이 자신을 위로의 대상으로 삼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위로는 그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함으로써 또 다른 슬픔에 빠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화자는 자신이 이미 중년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제는 거꾸로 “내가 꿀단지가 된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바로 자신을 중년으로 만들어버린 세월의 무정함, 그리고 함께 살아온 가족에 대한 아쉬움과 원망의 감정이기도 하다.
   <달콤한 위로-꿀단지>의 말미에서 작가는 북극에서 빙하가 녹아들어감으로써 북극곰들이 새끼를 더 이상 거느릴 수 없는 현실을 자신의 삶의 모습에 견주어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묘사가 다분히 생태적 관심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실제 근래의 많은 작품들이 크고 작은 생명의 소중함, 생명현상에 대한 관심을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다각도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만, 과학기술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삭막한 삶의 현실로부터 위기에 처한 생명의 소중함과 그에 대한 인식과 관심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화실 앞 비둘기 새끼들을 통하여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있는<그날 나는>(박정옥), 나무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생명력과 생존력을 묘사한 <나무들의 반성문>(허석) 등은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4. 나가며


   수필문학을 위하여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게 하는 것, 또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신화에 대한 계몽이 또 다른 신화를 낳는 것처럼, 미래로의 진보와 발전에 관한 약속은 반복되는 과거와 현재의 오류를 극복할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수필이 우리시대 문학의 안티테제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존재증명을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수필은 더욱 깊은 감수성과 미학을 통하여 새로운 자의식과 세계인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과학기술과 고도 자본 속에서 질주해 가야 하는 우리들이 글쓰기를 통해 존재론적 근거를 확보하려는 욕망은 자기 정체성의 언표화이기도 하지만, 삶의 현실과 세계에 대하여 문학이 찾아내야 할 사회적 몫에 대한 절박한 확인이기도 하다. 새로운 삶과 시대적 상황은 새로운 문학적 대응을 요구한다. 이제 우리 수필은 고정된 내용과 형식을 지양하여 일상성·대중성·서사성에 고착된 문학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서 열린 출구를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앞으로 수필문학의 판을 꽃이 피고 잎새 푸른 생명의 잔칫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길고 힘든 한겨울의 추위와 삭풍을 지혜롭게 이겨내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진정한 문학이란 무수한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황홀한 광휘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허상문  ------------------------------------------

   문학평론가.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문학평론집: ≪문학과 변증법적 상상력≫, ≪현대문학비평론≫, 영화평론집: ≪우리 시대 최고의 영화≫, 산문집: ≪시베리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실크로드의 지평에 서서≫ 등 다수의 저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