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3년 1월호, 월평] 인간의 코드와 수필-유머와 위트의 문학 - 유한근

신아미디어 2013. 2. 26. 19:54

"유머는 성격적이고 기질적이다. 위트는 유머에 지적이다. 유머는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등에 광범하게 나타나지만 위트는 언어적 표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트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압축하고 정리된 말로 표현하는 지적 능력이다. 유머와 위트는 각각 감성과 지성의 소산이다. 그러나 수필의 특성인 유머와 위트는 지성을 통한 감성의 표현구조를 변환되어 나타나야 한다. 그 코드가 문학의 감동 코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코드와 수필 -유머와 위트의 문학  -  유한근

 

   문학은 인간의 가치를 창출하는 데 바쳐진다. 문학은 인간의 감정을 재현하고, 인간의 인식 그 과정을 표출해 낸다. 문학은 삶을 의혹하는 인간, 원초적으로 실존적 불안감을 지니고 사는 인간의 비유와 상징체계를 언어로 구원해준다. 그것이 문학이 다다라야 할 그곳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충돌과 화해 코드의 연속이다. 그것은 잘못된 인간 이해의 문제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 간의 갈등 구조는 인류의 정신적 힐링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갈등은 이해와 포용을 바탕으로 한 유머와 위트라는 소통의 코드로 다소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소통의 코드를 문학에 찾는다면 그것은 해학문학이 될 것이고, 수필문학의 특성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코드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유머와 위트의 방식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르가 수필이다. 수필의 문학적 특성으로 우리는 ‘유머와 위트’로 내세운다.
   유머는 성격적이고 기질적이다. 위트는 유머에 지적이다. 유머는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등에 광범하게 나타나지만 위트는 언어적 표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트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압축하고 정리된 말로 표현하는 지적 능력이다. 유머와 위트는 각각 감성과 지성의 소산이다. 그러나 수필의 특성인 유머와 위트는 지성을 통한 감성의 표현구조를 변환되어 나타나야 한다. 그 코드가 문학의 감동 코드이기 때문이다. 유머는 자기를 반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에 대한 자기 인식을 철저해야 하며 자기 통찰을 필수적인 코드로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회 비판이나 인간 이해에 대한 포용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유머의 기질은 예리한 지성과 온후한 덕성이 결핍되어서는 안 된다. 유머는 웃음을 생산하나 그 웃음은 조롱의 것이 아니고 즐거움이다. 조롱도 하나의 웃음이기는 하지만, 악의적인 웃음이다. 유머의 웃음 속에서는 사랑을 베풀려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유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색한 긴장을 풀어 주는 해독제인 것처럼 수필에서는 감성적 윤기를 더해주는 윤활유이다. 유머가 우리의 메마른 생활에 윤기를 주는 악의 없는 웃음인 것처럼.
   이번 달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발표된 수필들을 일별하였다.

 

   하루살이는 입이 없다고 한다. 수중에서의 입을 지상에서까지 가지고 오지 않은 자별한 이유라도 있을까. 음식물을 섭취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입, 하지만 우리는 하루 동안 얼마나 필요 이상의 음식물을 먹어대고 또 쏟아내는 말 중에 정작 쓸 만한 말은 또 얼마나일까. 하루살이는 그런 탐욕과 배설이 부질없음을 몸짓을 통해 일깨우는 것은 아닐까.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물리적 시간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스물다섯 번의 변태가 아닌 우리 같은 고등동물은 매일 변태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부러워하는 날개, 날개는 천 일 동안의 수중 생활에 대한 보상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을 화려하게 비상하라는 말도 아닐 것이다. 천 일간의 계획을 하루 동안 실천하기 위해서는 날개는 물론이려니와 도깨비방망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황혼녘 하루살이의 비상은 예사로운 생명현상이 아니다.
   -박용수의 <하루> 중에서

 

   위의 인용문처럼 박용수의 <하루>는 ‘하루살이’라는 미물을 통해도 작가 자신의 삶과 나아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위한 해명 코드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3년 동안 스물다섯 번의 변태를 통해 성충이 되는 하루살이. 이 하루살이를  통해서 “자멸을 통해 얻는 자득의 자유, 자기를 죽이고 또 죽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인식하는 작가의 작은 깨달음을 쓴 수필이다.
   이 수필은 웃음을 주기 위해 쓴 수필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하루살이의 입’과 인간의 입과의 비교, 그리고 하루살이의 변태와 고등동물의 변태에 따른 시간 개념에 대한 인식 등이 유머스럽고 위트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 자신과 인간에 대한 반성에 어떤 계기가 되는가를 살필 수 있다. “하루살이의 비상을 따라 몸을 날려본다. 불룩한 배와 실팍한 팔다리, 어찌 감히 1초라도 공중부양한단 말인가.”라는 자조적인 톤이 그러하고, “두꺼운 비계에다 잴 수 없는 욕망은 또 어떻고, 게다가 두 개의 귀로도 듣지 못하고, 두 눈으로 보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인간의 아집에 대한 깨달음을 하루살이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독거노인은 늘어나고 젊은 사람들도 핵가족에 익숙해져 있다. 효 사상은 상실된 지 이미 오래전이다. 뉴스에서 독거노인이 사망한 지 며칠만에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노년의 외로움과 가난, 고독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쓸쓸해진다.
   누군가 늙어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는 돈, 건강, 친구라 했던가. 한 가지 더 꼽으라면 내 영혼을 의지할 종교생활이 아닐는지.
   오래전, 예기치 않게 저지른 실수가 잊히지 않는다. 그 실수는 내 노년을 생각해 보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산다는 건 어쩌면 시행착오의 연속선상인 것 같다. 그 실수를 경험 삼아 더 조심하게 되고 지혜를 짜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느 땐 노인들의 깊게 팬 주름이 세파를 헤쳐 온 훈장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때론 애처롭게 때론 아름답게 나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얼까? 그 모습에서 나는, 나의 모습을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덥던 저 여름을 보낸 후 맞이한 또 한 번의 가을. 색색의 단풍이 유난히 곱게 느껴진다.
   -최성옥의 <어느 여름날에 한 실수> 결말부분

 

   최성옥의 <어느 여름날에 한 실수>는 이 수필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 작가의 실수담이다. 여름날 초상집에 조의금을 잘못 전달한 내용을 가벼운 마음으로 써내려 한 체험담이다. 그래서 정겹다. 그러나 이 수필이 정작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노인문제이다. 독거노인의 늘어가고 있는 우리 현실 속에서 노년에 당면하게 되는 제 문제를 환기하는 동시에 작가 자신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쓴 수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수담은 본 메시지를 무리 없이 전언하기 위한 구성미학적 장치로 보아야 한다. 상갓집에서의 잘못된 조문과 조의금 반환 해프닝은 우리를 웃게 하지만 이 실수담만 가지고는 이 수필을 해학 수필 혹은 위트와 유머의 수필이라고는 부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수필에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돌아가신 할머니’와 친구의 이야기이다. 이 두 친구는 종교가 다른 친구들인데, 죽음에 임박해 이 분들이 벌이는 종교적 해프닝이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친구들 간의 종교적 이질성과 죽음을 맞는 노인들의 마음에 대한 환기가 우리를 가볍게 웃게 하지만, 이를 확대해석할 때 이는 우리 사회의 큰 갈등임을 환기하게 된다.

 

   분명 새끼새 소리였다. 짧았지만 높고 가녀린 것으로 보아 새끼새가 틀림없었다.
   그날 나는 화실에서 그림을 수정하고 있었다. 예전에 그렸던 작품인데 막상 출품하려 하니 눈 가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음과 손이 바빴던 덕에 자칫하면 그 소리를 놓칠 뻔했다. 스치듯 지나간 작은 소리의 여운이 내 머릿속을 날카롭게 건드렸나 보다.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 옛날 풍경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어릴 적 고향집 처마 밑에는 언제나 제비집이 있었다. 봄이 무르익어 갈 때쯤이면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이 어미새가 물고 온 먹이를 서로 받아먹으려 노란 부리를 한껏 벌리고 제제거렸다. 그때 그 새끼새들의 울음소리는 이른 아침부터 아무리 울어대도 조금도 성가시지 않았었다.
   기억 속 예쁘고 작던 노란색 부리가 떠오른 순간, 본능적으로 지금들은 그 소리도 새끼새의 울음소리임을 직감했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어미새도 아니고 새끼새라니, 내가 잘못 들었을 것이다. 다 쫓아냈을 터인데. 숨도 멈춘 채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복도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박정옥의 <그날 나는> 서두부분

 

   박정옥의 <그날 나는>은 화실 건물에 둥지를 튼 비둘기와의 싸움을 제재로 하여 쓴 수필이다. 위의 인용문은 ‘새끼새’ 울음소리부터 유년의 고향집 처마 밑 제비집을 떠올리게 되고, 그 울음소리의 정체를 찾기 위해 의혹을 가진 작가의 조심스런 눈초리까지 그리고 있다. 독자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서두이다. 그런 뒤 이 수필은 “비둘기 떼들이 이곳에 집을 지어 알을 낳게 되면 옥상과 외벽을 순식간에 점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겁을 낸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막대기를 들고 비둘기와의 전쟁을 디테일하게 그린다. 이 부분이 이 수필을 재미있게 읽히게 한다.
   특히, 이 수필의 후반부의 “거울 속에서 쥐눈이콩 같은 새끼새의 까만 눈과 그만 딱, 마주치고 말았다. 거울에 비친 나를 먼저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흠칫 놀란 나는 거울을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그리고 소리 없이 내려와 의자를 조용히 치우고 복도 문은 닫지도 못한 채 까치발로 걸어 나왔다”는 표현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그리고 결말부분의 “이 어린것들이 그동안 한 번도 어미를 찾는 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살아내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나 보다.”를 읽을 때는 이 수필이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했는가를 이해하게 되고, ‘마지막 문장’ “그날 나는 소리 없이 짐을 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화실에 나가지 않았다.”을 읽었을 때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코드를 읽을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모성에 관한 은유 및 상징적 표현이 감동으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마당 귀퉁이에 선운사 꽃무릇이 붉은 무리를 지어 피어났다. 선운사와 도솔암 사이의 오솔길에 핀 꽃무릇의 장관이 나를 부르며 밝게 웃는다. 꽃무릇이 피면 가슴 저리게 생각나는 꽃이 상사화다.
   눈과 서리가 내리는 겨울이 채 가시지 않는 초봄에 양지 쪽 화단에 제일 먼저 수선화와 상사화가 잎을 뾰족이 내밀면, 이제는 겨울도 세월의 무상無常에는 어쩔 수 없이 봄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다른 풀들은 나올 엄두도 못내는 냉랭한 추위에도 둘이는 서로 시샘하듯 자라나 수선화는 우아한 자태의 잔받침에 잔을 받쳐들고 봄을 맛보라고 내어민다. 그 꽃을 보노라면 청주淸酒 한 잔, 맑은 차 한 잔 간절하여 꽃과 함께 봄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상사화는 잎만 한껏 튼실하게 자라다가 시들시들 누렇게 말라 없어진다. 사랑하는 임이 돌아가고 없으면 서서히 잊혀 가듯 그는 그렇게 기억에서 아련히 사라져 간다.
   -이원찬의 <상사화相思花> 서두부분


   ‘상사화’는 잎과 꽃이 피는 시간이 달라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꽃이다. 이원찬의 <상사화>는 위의 인용문처럼 초반부에는 초봄에 피는 상사화의 속성과 그에 대한 정서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고마움과 사랑을 모르지만, 돌아가시면 “잎이 없어져도 잊지 않고 피어나는 상사화처럼 그리움을 삭인다.”라는 메시지로 확대시킨다.
   그리고 급기야는 상사화와는 관계없는 정치 국면으로 나아간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가장 당황스럽고 실망하게 만드는 나무는 정치의 나무일 것이다. 수많은 국민의 절실한 바람과 그지없는 사랑으로 피운 꽃이 도둑의 꽃, 거짓의 꽃, 독단의 꽃, 그리고 반목과 싸움의 꽃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다.”가 그것이다. 대단한 비약이다. 그것이 유머의 즐거움과 위트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상사화와 정치와의 그 연결은 기존의 문학을 전복시켜도 좋을 상상력을 가진 작가들이 아니라면 누구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작가는 이 수필 마지막 단락에서 “모든 일이 상상화처럼 최선을 다하고 오래 잊혀도 아름답게 피어나면 얼마나 좋으랴!”라는 한 문장으로 상사화의 정서와 정치적 메시지를 정서적으로 지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인간 탐색 코드를 정치 코드로 확대시킨다.

 

   탱고는 파트너 간의 밀착과 끊어지지 않는 터치가 중요하며, 원래 라틴어의 탕게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 온 이민자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애환을 달래기 위해 추었던 춤이 탱고의 모태이다.
   중년의 여인과 젊은 남자의 커플댄서가 보여주는 탱고 춤은 경륜만큼이나 능숙하고 호흡이 잘 맞는다. 맞잡은 손을 풀더니 잠시 공격적으로 끌어당김이 반복되면서 애초의 궁금했던 점은 해소되어 버리는 듯했다.
   그래서 <댄스레슨> 의문의 수수께끼가 쉽게 풀려버렸다. 댄스는 욕망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경쾌한 음악에 서로 엇갈리는 율동에 호흡을 맞추다 보니 어느새 나도 탱고 분위기에 도취하여 버린다.
   연극은 미완성의 인간생활에서 본능적인 욕망을 찾아 행복과 감동을 만들어가면서 새로운 완성을 위하여 노력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제, 나는 공정하게 판정을 내린다. <댄스레슨> 중년의 여인과 젊은 댄스강사 둘은 무승부라고…….
   -임영근의 <댄스레슨> 결말부분

 

   임영근의 <댄스레슨>은 연극 ‘댄스레슨’을 보고 느낀 춤의 문화예술적 인식과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 관련 코드를 생각해본 수필이다. 특히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탱고에 대한 감성적 인식이 돋보인다. 댄스에 대한 기존 인식의 전환이 그것이다. 탱고 춤에서 “맞잡은 손을 풀더니 잠시 공격적으로 끌어당김이 반복되면서 애초에 궁금했던 점은 해소되어 버린 듯”하다는 인식과 “인간의 몸만큼 정직한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면서 얽히고설킨 타래의 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이라는 인간에 대한 지혜의 코드를 이 수필은 해명해주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과 애환의 코드를 춤을 통해 풀어보려는 작가의 의도가 그것이다. 전자의 의혹 ‘애초에 궁금했던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과 행복과 감동 코드를 춤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보며 시청자들은 웃는다. 서민들의 억눌린 욕망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탈선적이면서  탈속적이기도 하다. 상류문화를 은근히 조롱하고 비튼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다. 예술은 때로는 고상한 숭고미보다 우스꽝스러운 해학미를 가져야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얼마 전의 일이다. 내가 속한 문학단체에서 가까운 도자기공원으로 가을 기행을 갔다. 공원 잔디밭에 야외무대가 마련되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햇살이 따가웠다. 볕이 눈부셨던 회원들은 하나둘씩 기념품으로 받은 검정 우산을 펼쳐 들고 앉았다. 뒤쪽에서 행사 사진을 찍던 나는 그 박쥐우산 때문에 사람들의 표정을 제대로 담을 수 없어 불만이었다.
   그때였다. 악단의 음악이 울리자 평소 조신해 보이던 한 여류 시인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말춤을 추기 시작했다. 젊지도 늙지도 않는 그녀는 싸이처럼 파워풀한 섹시 댄스를 선보이지 않았지만 가락에 맞추어 제법 정확한 동작을 이어나갔다. 중년 여성의 코믹한 몸짓에 회원들의 착석 자세는 점점 부드러워져 갔다. 몸이 조금씩 좌우로 흔들렸다. 아마 그동안 TV를 보며 한 동작쯤은 배워뒀던 게 틀림 없었다.
   -김정화의 <싸이와 사이>에서

 

   위의 인용문 김정화의 <싸이와 사이>에서 ‘그’는 요즘의 대세 가수 싸이를 말한다. 우리 시대의 브랜드인 ‘강남스타일’과 말춤을 모티프로 한 이 수필은 맨 끝 문장 “틈을 사이로 바꾸는 춤이 진정한 싸이의 율동이다.”를 환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가수 싸이의 춤을 비유로 하여, 사람과 사람들의 벌어진 틈을 메우는 춤의 진정한 의미가 ‘더불어 함께’라는, 혹는 ‘같이’라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해 쓴 수필로 보인다.
   김정화의 이 수필은 잘 읽힌다. 즐거움을 준다. 싸이와 말춤이라는 모티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수필의 유머와 위트 때문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객관적인 유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날카롭고 비판적인 위트 때문에 쾌감을 주고 교시적 기능까지도 주고 있다. 이 시대의 키워드이기도 한 한국의 국가 브랜드를 모티프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한 국면으로는, 인간 해명의 하나의 코드로 유머와 위트라는 양식이 소통 코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수필이다.
   유머와 위트는 고도로 세련되고 품격이 있어야 한다. 유머와 위트는 단순한 웃음이나 기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비평정신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와는 관련이 없지만, 이 세상에는 없는 작고 시인을 비판한 내용을 소재로 해서 쓴 수필이 주목되었다. 그것은 안홍엽의 <미당의 국화꽃이 짓밟히던 날>이다.

 

   그랬던 미당이 그 깊은 내면에서도 친일을 했을까? <국화 옆에서>는 오히려 내면의 아픔을 절절히 뿜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전후가 맞다. 소쩍새, 천둥, 젊음의 뒤안길, 무서리 등을 빌려 지난날의 한을 삭히고 있다고 배웠다. 그리고 자아성찰의 도구인 거울을 통하여 인고와 방황을 되돌아보고 있다. 또 누님을 통하여 오히려 지난날의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영탄하고 있다.
   김우종 선생과 같은 사람이 열 명, 백 명 또 있더라도 우리는 미당을 친일 문인으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학생들의 국어 교과서에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국화 옆에서>지만 질마재 언저리의 국화와 함께 우리의 서정성을 영원히 지켜 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일천여 명의 전북의 문인들은 미당의 국화가 무참히 짓밟히던 날을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안홍엽의 <미당의 국화꽃이 짓밟히던 날> 결말부분

 

   위의 인용문은 안홍엽의 <미당의 국화꽃이 짓밟히던 날>의 끝 부분이다. 이 수필은 “전북문인 대동제 강사로 초빙된 김우종 선생은 ‘한국수필 이렇게 갈라져야’ 말하다가 갑자기 톤을 높여 미당의 친일 성토 강연”을 듣고 쓴 작가의 울분의 수필이다.
   이 수필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친일했다는 미당과 미당 친일을 성토하는 비평가나, 이 수필을 쓴 작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한동안은 말을 잃게 된다.
   나는 스승인 미당 서정주 선생님으로부터 친일하게 된 회고담과 그 후의 후회담을 들을 기회를 가진 바 있다. 그 행위가 친일문학 담론에서는 비판되어야 하겠지만, 미당 서정주가 쌓아놓은 거대한 문학세계를 폄하하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나는 평소에도 가지고 있다. 도전적이고 돌발적이며 충동적인 학생들 앞에서 나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시인적 면모와 함께 인간적인 면모를 이야기하면서, 미당의 말목을 잡고 있는 친일과 정치와의 친화를 유머를 섞어 말해주곤 한다. 미당 서정주는 시인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위기의식과 불안감, 그리고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또한 미당의 친일을 비판한 비평가의 경우도 비평가이기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객관적이지 않은 막말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 코드를 갖지 못한 인간은 진정성이 있는 문인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유머는 유희 본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유머는 독자의 습관적인 기대 혹은 예상한 기대를 여지없이 유희적으로 깨뜨릴 때 성립된다. 유희적으로 깨뜨리는 것으로도 끝내지 않고 새로운 기대를 확장 충족되어야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유머는 익살이나 우스꽝스러운 펀(fun)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한 위트가 필요한 것이다. 이 점을 갖추지 못할 때 어느 누구도 작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인간적이어야 한다. 인간 냄새가 나야 한다. 인간을 해명하는 코드가 되어야 한다. 이 점은 자명하다.

 

유한근  ------------------------------------------

   중앙일보 신춘 동시, 동아일보 신춘 평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외,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 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여산문학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교무처장, 학생처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