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승무는 사람의 혼을 앗아갈 정도로 번뇌를 몸으로 표현하는 깊은 멋이 담긴 춤이다. 기생 황진이의 승무는 지족선사를 파계의 지경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르고, 파계한 스님이 번뇌를 풀어내려는 춤이 승무가 되었다는 설도 믿음이 간다."
승 무 - 박귀덕
똑똑똑 또르르, 똑똑똑 또르르.
목탁 소리가 멎은 후, 법고 앞에 학 한 마리가 절규하듯 엎드려 있다. 하얀 비단으로 지은 장삼을 무대에 깔아 놓고, 삼현육각에 맞춰 천년의 세월을 지나온 듯한 두 활개를 활짝 펼친 날갯짓, 발사위가 관중의 시선을 제압한다. 모든 동작이 정지된 듯 숨소리도 멎었다. 호흡을 고르고 쪼르르 내딛는 무희의 발돋움새에 객석에서 몰아쉬는 숨소리가 쫀득하다.
한 해가 또 저물어 가고 있다. 아쉬운 마음 자락을 아직 갈무리하지 못하고 늦가을의 문턱에서 서성이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파도에 밀려나듯 가는 세월을 잡지 못해 망연하고, 바쁘게 살았어도 알곡을 추수하지 못해 허기가 진다. 허한 마음을 꽉 채워 줄 그 무엇이 필요할 즈음에 ‘승무’를 만났다.
전라북도도립국악원에서는 연례행사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교수음악회’를 열고 도민들을 초청한다.
시월상달에 추수가 끝난 마을 사람들이 무당을 불러 동네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푸살’을 시작으로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태평무. 가락의 짜임새와 구성미가 돋보이는 가야금산조를 감상하고,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이 춘향 모와 상봉하는 장면을 판소리로 들으며, 인간의 번뇌와 고행을 춤사위에 담아 학이 춤을 추듯이 몽롱한 환각 속에서 천상세계를 연상케 했던 승무. 서민의 한을 흥으로 풀어내려는 듯 화려한 발림으로 흥타령과 육자배기를 흥겹게 노래하고, 마지막엔 특별출연으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불리는 나금추 선생의 쇠가락과 부포놀이인 ‘상쇠춤’으로 흥을 돋우었다. 수준 높은 국악인들의 명작을 한마당에 풀어 놓아 다채롭고 멋진 공연을 한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승무가 전해준 진한 감동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오늘 밤 승무와의 만남은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단비였다. 이 비는 감성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는 감동의 선물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삶을 여유롭게 즐기며, 전통문화에 푹 잠기어 행복을 만들어 가라는 신의 음성 같은 매력이 있었다.
이 기분 좋은 흥분을 구태여 진정시킬 필요는 없었다. 이 밤 이대로 잠을 설친다 해도 후회하지는 않으리라. 눈을 감아도 아른거리는 긴 장삼 자락, 힘차게 허공에 뿌리쳐졌다가 어느 순간 제치며, 앞가슴에 다소곳이 얹는 춤사위가 눈앞에서 출렁거리며 파도가 되어 넘실거린다.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치면 천지를 연결 짓는 몸짓이 되고, 드높게 뿌려진 장삼의 고운 선이 하얀 고깔에서 무희의 허리선을 타고 다리를 지나 버선코에서 춤사위로 살아난다. 자유롭게 휘둘리는 장삼자락이 바람에 날려 갈 듯 가냘픈 여인으로 연상되어 애처롭다. 코발트색 치마 밑으로 보일 듯 말듯한 버선코가 하늘을 향해 내딛는 발사위에서 전통예술의 혼으로 살아나 향기를 뿜는다.
삼현육각의 감미로운 음악에 맞춰 장삼자락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사뿐사뿐 연풍대를 돌던 고운 여인의 모습이 디딤과 돋움으로 숨고르기를 한다. 정중동을 살려내는 춤사위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난타. 양손에 북채를 들고 법고를 어우르며 자진모리장단에 휘모리로 몰아쳐 숨 돌릴 틈도 주지 않는다. 난타로 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몰아지경으로 이끌어 가는 카리스마. 짜릿한 감동이 환희로 다가온다. 관중들은 무희와 한 덩어리가 되어 소통할 때 무희는 어떤 감정을 느끼며 춤을 출까? 고깔 밑으로 빛난 눈동자를 본다.
공연이 끝나고 무희를 만나 감동을 전했다. 국악원 무용교수로 오기 전엔 도립예술단원 생활을 하며 여러 나라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승무와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었다. 호주 시드니 한인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해야 하는데 공연장 건물에 목사님이 거주하고 있고, 교민들이 그곳에 모여 예배드리기 때문에 조심스러워 목사님의 의견을 들어야 했다. 목사님은 승무나 살풀이춤을 전통예술로 인정해서 그곳에서 춤을 추도록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그때 의상은 미색 저고리에 코발트 빛깔의 치마를 입고, 장삼에 고깔을 쓰고, 붉은 가사를 어깨에 메고 춤을 추었다. 그 춤을 감상하던 교민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갈채를 보내주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한다.
‘살풀이춤’을 추기 전 의상을 갈아입는 동안 관객들에게 흰 수건을 내어 주며 “이 수건에 여러분들의 염원을 담아 사인을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 수건은 살풀이춤을 출 때 무희가 손에 들고 추어야 하는 필수품이었다.
“여러분들이 이 수건에 담아준 염원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춤을 추겠습니다.”
그날의 승무와 살풀이춤이 오래도록 무희의 마음에 감동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관객들에게 눈물 어린 감동을 선물해준 결과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승무에서는 보살의 몸짓에 기원을 담고, 살풀이춤에서는 수건에 관객들의 염원을 담아 무희의 혼을 실어 춤으로 표현했기에 관중들에게 감동이 전이됐을 것이다. 아마도 그 춤은 관객들의 영혼을 한데 모아 신에게 기원하는 신성한 성녀의 몸짓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승무와 살풀이춤에 대한 진한 애착을 가지고 춤을 추고 있는 무희의 마음을 새삼 느끼게 됐다.
그렇게 승무는 사람의 혼을 앗아갈 정도로 번뇌를 몸으로 표현하는 깊은 멋이 담긴 춤이다. 기생 황진이의 승무는 지족선사를 파계의 지경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르고, 파계한 스님이 번뇌를 풀어내려는 춤이 승무가 되었다는 설도 믿음이 간다. 육관대사의 제자 성진스님이 계곡에서 8선녀를 만나 미색에 현혹되었다가 진리를 깨달고 해탈하는 과정을 춤으로 표현했다는 설도 있는 것을 보면, 승무는 신의 선택에 의해 춤추어지는 신비로운 감성을 담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한 편의 무용 감상으로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어 기쁘고,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어 행복하다. 나에게 승무를 출 수 있는 기량이 허락된다면 새해를 맞이하는 모든 이들의 건강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춤을 추고 싶다.
무희 : 이화진 전북도립국악원 한국무용 교수.
박귀덕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삶의 빛 사랑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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