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3년 1월호, 지상에서 길 찾기] 출세의 필수 코스, 영어를 추억하면서 - 김삼길

신아미디어 2013. 2. 7. 18:31

"1970년대 중반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불어 닥친 IT시설의 확충은 날이 갈수록 국민들의 정보통신 서비스 욕구를 채우기에 부족했다. 정부는 구시대 통신시설의 대명사처럼 여기던 ‘깡통장비’라고 불리던 아날로그 장비들을 디지털로 대체하는 전자화 작업에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덩달아 통신시장의 대변혁을 예고하는 사회 조직체계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는 앞다투어 선진 외국 통신회사와 손을 잡고 사업 다각화를 모색하는 데 재빠르게 힘을 모으고 있었다."

 

 

 

 

  출세의 필수 코스, 영어를 추억하면서  김삼길

 

   산업현장에서 재직하던 시절, 동료 사원들이 영어권 나라에 연수를 갔다. 어느 날 외국 회사의 간부가 연수생인 우리 일행들에게 제의를 해 왔다. 내일 저녁에 시간이 허락되면 저녁 파티를 주선하겠다는 것이다. 서투른 어학실력 때문에 연수생들은 이야기의 확실한 주제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대뜸 ‘YES’라고 대답을 해 버렸다. 다음날 외국 회사의 간부는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연수생들은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태를 파악해본 외국회사 간부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것이 당시 해외파견 연수생들 영어실력의 현주소였다. 대부분 일정한 성적 이상의 선발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 차출되기는 하였지만, 완벽한 언어 구사능력에 한계가 있었고, 해당국의 언어에 아예 무지한 사람들이 끼여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것은 도입된 장비의 계약조건에 따라서 파견 인원수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회사는 그 조건에 무작정 따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의외의 인원이 연수단에 포함되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였으니 이런 사례가 없었다고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불어 닥친 IT시설의 확충은 날이 갈수록 국민들의 정보통신 서비스 욕구를 채우기에 부족했다. 정부는 구시대 통신시설의 대명사처럼 여기던 ‘깡통장비’라고 불리던 아날로그 장비들을 디지털로 대체하는 전자화 작업에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덩달아 통신시장의 대변혁을 예고하는 사회 조직체계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는 앞다투어 선진 외국 통신회사와 손을 잡고 사업 다각화를 모색하는 데 재빠르게 힘을 모으고 있었다. 예산과 운용 면에서 효율적이었던 선진 통신장비의 도입은 시대적인 흐름이었고, 그런 시대적 열망을 타고 영어에 대한 학습 열기는 붐을 탔고, 설상가상으로 영어실력이 사원 평가의 대세가 되어 버렸다.
   입사에서부터 승진, 고가 평정, 해외 연수 등 여러 분야에서, 한마디로 영어로 인한 특혜의 위력은 대단했다. 속된 말로 영어를 못하면 ‘병신 취급’을 받을 정도로 냉대를 받았던 것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직무 수행능력은 ‘꽝’이라도 영어만 잘하면 수년간 해외 연수만 다니다가 고급간부까지 올라간 사원이 나왔을 정도로 관리자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모든 사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실무경험이 부족한 그들에게, 영어 하나 때문에 ‘과잉대접’에 가까울 정도로 대우하는 회사의 처신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산업현장에서는 사원 직무 평가의 ‘부가 수단’으로 영어의 위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영어가 글로벌 언어로서 공용어가 되어버린 마당에 굳이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특정 언어가 업무상 필요성이 아닌 사원들을 평가하는 ‘줄 세우기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글로벌화는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그러나 글로벌화의 시작과 끝이 마치 영어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 영어는 우리보다 먼저 선진국이었던 나라의 언어일 뿐, 서서히 그 시대적 변화의 흐름은 바뀌어 가고 있다. 물론 그것을 과소평가하자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단지 고과평정의 제도화된 규정을 따로 두고 ‘영어만 잘하면’이라는 편향된 통념에 치우쳐, 사원 개개인의 자질과 업적이 사실상 무시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사원 개개인의 업적을 평가하는 수단은, 종사원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공정한 방법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대목에서 당시 말단 사원들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CEO들에게 그때 분위기를 귀엣말로 전해주고 싶다. 당시 영어를 멋지게 구사할 줄 알면서도 현업의 실무 현장에서는 사실상 소외를 당했거나 사내 승진시험에서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소위 영어 엘리트층, 반대로 외국어 능력은 다소 부족해도 현장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알짜’ 실무사원들의 공과를 세세하게 배려하지 못했던 아쉬운 이야기들……, 다시 말해서 영어실력과 현장능력은 별개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객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불철주야 상품판매를 위해 뛰고 있는 유능한 영업사원들, 기계설비를 다루며 비지땀을 흘렸던 우수한 엔지니어 사원들, 그동안 일정수준의 가벼운 외국어 실력만으로도 충분히 업무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난 시절 수많은 외국산 장비를 유지관리했던 대다수의 엔지니어 출신 선배들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히 판명이 났던 사실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영어권 나라에서 배출된 박사가 넘쳐난다. 또한 외국에서 오래 살았거나 조기유학을 다녀온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현지인 못지않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흔하게 만날 수도 있다. 유학파 우수인력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오죽하면 그들은 변변한 직장도 구하지 못하는 처지로 추락해 버렸다. 영어가 지극히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는 그런 인력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영어가 출세의 ‘대세’가 아닌 현대인들이 갖추어야 할 평범한 소양일 뿐이다. 다만 우리 선진 통신기술의 세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특기자를 러시아어, 중국어, 서반아어, 프랑스어 등 세계 인종들이 많이 쓰는 언어로 다변화할 필요성은 있다고 본다.
   우리 수출산업을 주도하는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내수시장의 뒷받침 없이는 세계시장의 석권이 어렵다고 한다. 내수시장의 우수성이 글로벌 시장의 성공으로 가는 비결이라는 말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공감을 얻고 있는 시대다. 우리 고유의 특성을 가진 것이 외국인들의 감동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비추어 보면, 오히려 우리말의 확실한 구사능력이 더 절실한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첨단산업의 수출과 더불어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를 주목시키고 있다. 미국의 유명한 여류작가 ‘펄벅’은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고 훌륭한 문자라고 극찬했다. 몇 년 전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언어 학술대회에서는 한글을 세계 공용어로 하자는 열띤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우리나라, 지난 시절 대다수 유능한 사원들의 사기를 꺾어 버렸던 영어, 아직도 구시대적 사고의 틀에 갇혀, 전체 사원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도구로서 우월적 위치에서 버티고 있다면 서글픈 일이다. 지금은 우수한 영어실력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개화기시절(유학파)처럼 신분을 상징하거나, 달랑 영어 하나로 성공을 보장해 주던 그런 시대가 아니다. 지구촌은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 한글 가사내용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소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터넷의 대중화로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자산, 한글의 훼손현상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어느새 젊은이들의 일상 속에는 비속어가 뼛속 깊이 점령해 버렸다. 우리말의 미래가 어둡고 불안하다. 먼저 외래어로 뒤범벅이 된 교육현장에서부터 차근차근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가 되었다.

 


김삼길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산 넘어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