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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가을호, 신작수필18인선] 누명 - 김두환

신아미디어 2012. 11. 30. 19:19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데, 누명을 쓰고 있을망정 발은 저리지 않아 다행이다."

 

 

 

 

 누명


   한 해의 농사는 얼었던 땅이 녹자마자 퇴비를 넣고 갈아놓는 것부터 시작된다. 사월 초인데도 아직 갈아놓지 못한 공장 텃밭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주말 아침, 공장 텃밭을 둘러보고 있는데 길 건너 삼나무 숲 울타리 안에 퇴비를 백여 포 넘게 쌓아놓은 것이 보였다. 인적이 드문 숲에 퇴비가 쌓여 있어 얼핏 몇 포대 갖다 써도 되겠다는 장난기어린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농협으로 달려가 퇴비를 사다 봄 농사를 시작했다.
   점심식사 후 공장에서 키우는 어린 진돗개 샐리와 주변을 산책했다. 아직 농사를 시작하지 않은 논과 밭에서 마음껏 뛰놀게 하고 싶어서였다. 산책에서 돌아오며 삼나무 숲 옆길을 걸어오는데 밭주인 아줌마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자 맹수가 자기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경계하듯 쳐다보며 “아자씨, 이쪽으로 다니지 마세요. 밭에 발자국이 있더니 아자씨 발자국하고 똑같네!” 하는 것이었다. 내 발자국을 언제 맞춰봤다고……. 그리고 농사를 아직 시작하지 않은 밭에 설령 들어갔다고 해도 그렇지, 눈을 부릅뜨고 따지듯 하나, 생각하니 괘씸했지만 대꾸를 더 했다가는 싸움이라도 날 것 같아 “내 발자국은 아닐 거요. 나는 처음이거든요.” 하고 지나쳐 왔다.
   이튿날 삼나무 숲 울타리에 경고문 하나가 붙어 있었다.
   ‘경고문 : 누구인지 심증이 감. 땡칠이도 같이 고소하겠음. 한 번만 더 분실할 경우 형사고발조치 하겠음. 잃어버린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것임. 모든 물건은 카메라에 저장되어 있음. 주인백’
   누가 보든지 불특정 도둑에 대한 경고가 분명했으나 내 눈에는 나에게 하는 경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그 아줌마의 억지주장으로 보나 ‘땡칠이도 같이’ 라는 글귀를 봐도 분명히 나에게 하는 경고였다.
   텃밭에 가서 보니 공교롭게도 숲에 쌓인 퇴비 봉투와 내가 버린 봉투가 똑같았다. 봉투만 봐서는 오해받을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우리 밭 퇴비는 내가 사다 썼소!’라고 밭둑에 보란 듯이 표지판이라도 세워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탓인지 더 이상 시비는 없었다. 혼자 별별 상상을 다 하다가 만약을 대비해 카드영수증을 찾아 놓고 기회만 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그집 논에 복토를 하느라 연일 덤프트럭에 불도저까지 동원해 공사를 했다. 조용했던 공장이 요란한 소음에다 좁은 도로까지 점령당하고 흙먼지로 범벅되었다. 보다 못해 공사 중인 논으로 주인을 찾아갔다. 그동안 좋지 않은 감정도 쌓인 터라 분풀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보이지 않고 간이 정자에 두 남자가 오전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주인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내가 이 공사를 맡은 사장인데 할 말이 있으면 저하고 이야기합시다.” 하며 명함부터 꺼냈다. 이미 내가 주인에게 할 말을 다 안다는 눈치였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 공사는 구청에 신고했고 내일부터는 물차가 수시로 다니며 도로에 물을 뿌려 먼지가 안나도록 조치하겠다.’ 며 올라와 술 한잔하자고 했다. 붙임성이 좋아 보이는 사장은 땅주인의 동생이 심마니인데 산삼 씨앗을 따다 이곳 숲에 뿌려 키운다는 것이었다. 그 중 몇 뿌리 캔 장뇌삼으로 담근 술이니 꼭 마시고 가라며 붙잡았다. 아무리 산삼주라 한들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삼나무 숲에 장뇌삼을 기른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돌아오며 눈길을 돌려보니 공사하느라 뜯긴 울타리 안에는 군사작전용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숲에 장뇌삼이 심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경고문에는 퇴비도둑이라는 말이 없었다. 앞으로는 숲에 장뇌삼이 심어졌다고 하니 근처는 얼씬도 못하겠다.
   퇴비도둑이 아니라는 증거를 챙겨 놓고 시시비비를 가릴 참이었는데 잘못 건드렸다가는 바늘 도둑이 소 도둑으로 누명을 덮어쓸 판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데, 누명을 쓰고 있을망정 발은 저리지 않아 다행이다.

 

 


김두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