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에 물들이지 않는 세계, 색욕에 빠지지 않는 세계, 먹을 것을 탐하지 않고 기쁨으로 가득 찬 세계, 인간들의 이상향인 청정한 도솔천을 그리는 것이다"
산사의 아침
아침을 맞이하는 모습은 시공에 따라 따르다. 특히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도시와 고즈넉하고 담담한 산사의 아침 풍경은 동動과 정靜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지금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에 살면서 때로 장엄하면서도 고즈넉한 천년고찰의 풍광을 떠올리며 옛일을 되새겨 보곤 한다. 그것은 나의 20대에 각인되어 있는 산사의 한 시공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의 풍광이 도시에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장엄한 종소리로 아련히 들려오는 것이다.
대학 시절 한때 어떤 고찰에 머문 적이 있었다. 한 지역교구의 본산으로 신라 시대 창건된 가람이니 아마도 천 년은 훨씬 넘은, 흔히 말하는 천년고찰이라 할 수 있겠다. 고찰의 내력과 체통에 맞게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은 사부대중이 모여 철야정진을 하였는데 좌선을 하다 보면 여름밤은 이내 어둠이 엷어진다.
산사의 새벽은 성스럽다, 아니 장엄하다. 아직까지 미물들이 잠이 깨지 않는 새벽 3시가 되면“똑 또르르. 똑 또르르.”목탁이 새벽을 깨운다. 도량석이다. 조용한 산사의 하루가 시작되는 신호이다. 큰법당 섬돌에서 시작하여 목탁 치는 소리는 마당을 가로질러 종루 밑을 지난다. 종루 밑으로는 밤새도록 계곡을 부수며 흐르는 물소리가 있었는데 그 종루 위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노라면 밤새도록 물소리만 졸음 속에서도 화두로 남는다.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는 사천왕문을 돌고 계단을 올라와 명부전과 관음전을 돌아 온 경내를 치며 돈다. 철야 정진하던 사부대중들도 도량석을 따라 밤새 내린 미진을 털어내듯 돌고 돈다. 그리고 나면 작은 종이 제 몸을 때리며 울린다. “원성불도중생願成佛道衆生”원하옵나니 부처가 되어 뭇 중생을 건지 오리다. 낭랑한 염불 소리가 새벽 어둠을 건너 종소리와 함께 귓전을 파고든다. 이 종 두드림은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울린다고 한다. 즉 지옥, 아귀, 축생, 인간, 하늘, 수라에 이르고 곤충이나 새들에게까지 자비의 법문을 들려주기 위하여 울린다고 한다. 새벽에 낭랑한 게송과 함께 들리는 종성은 맑고 총명함 그 자체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청정한 소리가 있으리오. 마음속에 묵어 있던 근심, 걱정들이 모두 훌훌 날아가는 느낌이다. 부챗살처럼 둘러친 여름산의 검은 자태는 어둠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가벼워지고, 새벽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윽고 큰 동종銅鐘이 장엄하게 울린다. 하늘의 서른세 번째 천상인 도솔천을 상징하여 서른세 번 친다 한다. 통나무가 제 몸을 밀어 큰 범종의 몸체를 미끄러지듯 부딪치면 장엄한 소리는 온 세상 맑은 새벽 산골을 은은하게 흔들며 산골 아래 동네까지 물과 함께 흘러 내려간다. 이것은 장엄한 하늘의 소리이다. 욕심에 물들이지 않는 세계, 색욕에 빠지지 않는 세계, 먹을 것을 탐하지 않고 기쁨으로 가득 찬 세계, 인간들의 이상향인 청정한 도솔천을 그리는 것이다. 이 범종소리만큼 엄숙하고 청정한 소리가 있을까. 세속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천상의 소리인 것이다.
범종의 울음이 끝나면 법고 소리가 둥당거리며 달려온다. 법고는 장정의 키보다 더 큰 북인데, 축생고苦를 받는 생명들에게 감로의 법을 들려주기 위하여 두드린다고 한다. 큰 북이 내면에 잠자고 있던 깊고 엄숙한 소리로 새벽 산골을 느리게 또 빠르게, 크고 작게 춤추듯 다가온다. 뚝딱거리다가 강하게 약하게 둥둥 딱딱 두드리면 새벽 산골 작은 나무들까지 밤새 받은 제 잎사귀의 이슬을 털며 잠을 깨는 시간이다. 눈앞에 소리와 장삼의 움직임이 함께 어우러진 흔들림의 예술이다. 어울리는 북소리도 절묘한 소리일 뿐더러 까까머리 단정한 스님이 흐느끼듯 어깨 흔들며 두드리는 사위야말로 사람과 북과 소리와 산사가 어우러져 숨조차도 눌러 쉬는 가슴 두근거리는 예술이다. 어디에 이보다 절묘하고 성스러운 흔들림이 있을까. 북소리는 멀어지다가도 말발굽소리처럼 가까이 달려오고 크게 소리치며 다가오다가도 조잘조잘 물 흐르는 소리로 잦아지다가 아련하게 멀어지는 입체적 환상이다. 이 북 울음 떨림에 세속에 온갖 풍상들이 떨어져 나가고 새벽이 밝아오는 것이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누각에는 나무로 깎아 배가 비어있는 큰 물고기 형상이 달려 있다. 목어이다. 목어는 물에 사는 물고기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울리는 것인데 이것 또한 똑딱거리는 소리의 화음은 또 다른 음향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구리로 된 쇠판을 달아 놓았는데 이것을 운판이라 한다. 운판은 날짐승을 구제하기 위하여 울린다고 한다. 이들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사찰에서는 사물이라고 하는데 규모가 큰 사찰에는 반드시 갖추고 있는 법물法物이라 한다. 사물과 어우러진 산사의 아침은 인간세계와 불계를 연결하는 시공에 잠깐 머무는 것 같았다.
산사의 새벽 맑은 공기를 깨고 울리는 사물의 소리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잊히지 않고 아직까지도 울림으로 남아있다. 도심에서도 간혹 법고 소리나 범종 치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 젊은시절 산사의 새벽에 울리는 묘한 음률과 시공은 세월이 오래 지난 요사이도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간헐적으로 올라오는 뭉클함이 있다. 그래서 간혹 오래된 큰 고찰이나 유서 깊은 사찰에 가면 그때의 그 소리의 느낌과 감동을 조금이나마 되새겨 보기 위하여 범종루나 법고가 매달린 누각을 힐끗힐끗 보며 마음속으로 그 소리를 들어 보기도 한다.
특히 도시 생활이 혼잡해지고 세상이 시끄러워 혼탁할 때면 훌쩍 산사로 발걸음이 향하는 것은 젊은 시절에 보고 들은 그 풍광의 잔영, 그 소리의 여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산사에서 맞았던 그 아침이 그리워진다.
강희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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