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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가을호, 신인상수상작] 제3막 - 홍정숙

신아미디어 2012. 10. 6. 07:49

좋은수필 신인상수상작인 홍정숙님의 제3막을 소개합니다. 수필을 쓰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근접해있다는 심사평을 받은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느껴보시면 어떠실지요.

 

 

 

 

 제3막


   화사한 봄꽃이 지고 연초록 잎들이 물결을 이루었다. 때 이른 넝쿨
장미까지 다투어 피어나 담장을 타고 어깨동무하듯 어우러졌다. 지
저귀는 새소리까지 어울려 온 천지가 봄의 향연을 구가하고 있건만
나는 까닭 없이 외롭다.
   내게도 가슴 설레는 봄이 있었다. 갈래머리 여고 시절 붕긋해진 가
슴을 보물처럼 감추며 얼굴 붉히던 어느 봄날, 내 인생의 꽃이 피었
다. 느닷없이 찾아든 낯선 손님. 두려움에 떨며 누가 알까 봐 부끄러
웠다. 뒤미처 그것이 나를 여인으로 만드는 신비의 꽃이라는 것을 알
았을 때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나는 홀연히 공주가 되어 백마 탄 왕자를 기다렸다. 내
인생의 화려한 2막을 그리며 밤마다 꿈을 키웠다. 꿈이 무르익을수
록 가슴은 부풀고 내 몸에서 피어나는 꽃도 선홍으로 붉었다.
   20대 후반 가슴 벅찬 사랑에 빠져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황홀
한 신혼에 내 삶의 소중한 꽃망울을 터뜨려 사랑하는 아들을 품에 안
았다.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어미라는 자리가 고단해도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따뜻하고 행복했다. 아이의 웃음 속에 내 모든 기쁨이 충만
했고, 인생의 더 고운 꽃을 피우고 싶은 열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은 잔인했다. 아무리 짧은 인생길이라지만 입지立志도
불혹不惑도 바람처럼 스쳐가고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의 길목에 접어들
었다. 인생의 기대감도 없어지고, 자신감마저 위축되어 마음 둘 바를
모르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내 몸은 신열에 시달리느라 하루
에도 몇 번씩 땀방울이 비 오듯 등줄기를 적신다. 잠들지 못하는 밤
이 계속되거나, 설핏 잠이 들었다가도 한밤중에 가위눌리듯 소스라
쳐 깨어나곤 한다. 세상만사 다 저희끼리 잘 돌아가고 있는데, 나만
따돌림 당한 것 같아 섭섭해 하면, 가족들은 누구나 지나가는 갱년기
증상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 만다. 이제 여자의 신비스러
운 꽃망울도 덧없이 스러지면서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잊어버릴
만하면 시든 꽃송이처럼 검붉게 피는가 싶다가 사그라지곤 한다. 그
나마 영영 사라져버리고 나면 내 인생도 막을 내려야 하는가 싶어 초
조해진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호수공원 둘레 길을 걸었다. 형
형색색의 꽃들이 자태를 뽐내며 발길을 붙잡지만, 나는 길모퉁이에
고개 숙여 무리지어 피어 있는 조팝꽃에 왠지 마음이 더 끌린다. 흰
싸라기를 뿌려놓은 듯한 순백의 꽃들이 해맑은 웃음을 실바람에 실
어 더운 가슴을 식혀주었다.
   조팝꽃처럼 맑고 순진했던 소녀들의 가냘픈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의 모습 속에 지나온 세월이 보인다. 토끼풀 꽃
이 무더기로 핀 잔디밭에 둘러앉아 꽃반지를 만들어 가며 저마다 살
아가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한 친구가 풀죽은 소리로,
   “나는 다달이 피는 꽃이 진작 사라졌어. 속이 불난 것처럼 열이 올
라 병원 약 먹고 있어.”
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친구가 한결 생기 있는 소리로,
   “난 아직이다.”
하며 으스댔다.
   “좋겠다.”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하자 ‘아직’ 이라던 친구도 얼마나 더 버틸
지 모르겠다며 이내 풀이 죽었다. 성격이 괄괄한 친구가 꽃 지고 나
면 마누라가 집을 나가도 남편이 찾지도 않는다더라고 해서 함께 웃
었다.
   만나면 늘어놓던 남편 이야기, 자식 이야기도 시들하더니 요즘은
아직 보지도 못한 손자 손녀 이야기로 분위기를 잡는다.
   “우리 이제 무슨 낙으로 살겠니, 손자들 재롱이나 보고 살아야지.”
   “그래, 친구들이랑 여행도 좀 다니고…….”
   저마다 처방을 내놓으면서도 공허한 표정만은 감추지 못했다.
   노을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며 돌아오는 길목에 좋아하던 장미들
이 눈길을 끌지만 지나간 날이 애달파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아
무리 아쉬운들 지는 꽃을 어찌 다시 피우며, 자연의 섭리를 누가 막
을 수 있으랴! 애써 내 안의 반란을 다독인다.
   생각해보면, 순리 따라 꽃이 지기로서니 그다지 서러워할 일만도
아니다.
   인생은 한마당 봄꿈이다. 단 한 번밖에 연출할 수 없는 연극이다.
연극 속에도 사계가 있어 꽃이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지지고 볶
으며 살아오는 동안 어느덧 꽃이 지는 것으로 내 인생의 제2막도 끝
나가고 있다. 그동안 관객에게 내 역할을 얼마나 제대로 감당했을
까? 내 연극의 관중들은 3막, 4막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내게도 주어진 역할이 있으니 스스로를 사랑하고 껴안아야겠다.
   지는 꽃의 아쉬움을 버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행복은 느끼
는 자의 몫이라고 했다.
   이제 곧 징소리가 울리면 막이 오르고 내 인생 극의 제3막이 시작
될 것이다.

 

 


홍정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