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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여름호, 신작수필20인선] 말짱 도루묵은 없다 - 손진숙

신아미디어 2012. 9. 25. 18:04

"말짱 도루묵은 없습니다. 굳이 도루묵이 있다면 사람들이 붙인 새로운 이름일 뿐입니다. 순하디 순한 물고기의 이름일 뿐이랍니다."

 

 

 

 

 말짱 도루묵은 없다

 

   지난번 ‘여름문학캠프’ 에 참가했을 때였습니다. 배가 고파서만은
아닌 것 같은데 유독 내 입맛을 끄는 반찬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도루묵조림이었습니다. 손가락 두어 개 정도의 크기라 한두 입에 쏙
들어가고, 부드러운 살이라 씹어 삼키기 좋으며, 삼삼한 간에 구수한
맛이 감돌았으니까요.
   캠프에서 돌아온 이튿날이었습니다.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서 생선가게 앞을 지나는데 불현듯 도루묵 맛이 고개를 들었습니
다. 그 맛을 내 손으로 살려내고 싶어 도루묵 한 무더기를 샀습니다.
   냄비에 담은 도루묵에다 갖은 양념을 넣고 약간 잠길락 말락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고는 국물이 졸아들게 하느라고 가스 불을 조금 강
하게 피워 놓았어요. 짬을 이용해 방에 들어가 펼쳐진 신문을 보았어
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릅니다. 방문을 열고 거실에 나오려
는 순간 탄내가 훅 코에 끼쳐왔습니다. 재빨리 가 냄비 뚜껑을 열어
보니 도루묵이 새까만 먹물 옷으로 갈아입었지 뭡니까.
   가스 불을 급히 끄고 막 뒤처리를 하려는 참인데 퇴근한 남편이 들
어왔습니다. 들어오자마자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젖히고 코를 막
은 채,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았기에 이 냄새가 나도록 음식을 태
우나’며 핀잔을 하였습니다. 핀잔은 좀체 그치지 않았습니다. 콩이야
팥이야 잔소리를 늘어놓았어요. ‘그만 좀 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
에까지 치밀었지만 백 번 내가 잘못한 일이니 참을 수밖에 도리가 없
었어요.
   근사한 맛을 흉내내 가족의 입맛을 돋우려던 내 계획은 말짱 도루
묵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래 도루묵은 우리나라 근해에 살고 있는 물고기입니다. 임진왜
란 때 몽진蒙塵길에서 무척 시장하던 임금님이 한 어부가 바친 ‘묵’
을 먹어보고 너무 맛이 좋아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답니다.
그런데 난이 끝나 궁궐로 돌아온 임금님이 문득 그 은어銀魚가 생각
나서 가져오라 하여 먹어 보니 몽진 길에서 먹은 그 감칠맛이 없더랍
니다. 그래서 “도로 묵이라 불러라.” 명했답니다. 한껏 올랐던 묵의
처지가 도루묵으로 순식간 곤두박질쳐버린 겁니다.
   오기가 뻗친 나는 이튿날 다시 도루묵을 샀습니다. 전날의 실패에
대한 설욕전을 펼 요량으로 양을 배로 늘렸습니다. ‘망할, 물이 적어
서 그랬던 거야!’ 도루묵이 잠기도록 물을 부었습니다. 불도 중불로
낮췄어요.
   도루묵이 익을 동안 딴짓을 하지 않으려고 냄비 앞을 얼쩡거리는
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문학에 풍부한 지식을 갖춘 지인이었습니
다. 한동안 전화 두절이더니 한가한 모양인지 문학 이야기를 시작하
는 거예요. 처음에는 도루묵조림에 신경이 쓰여 건성으로 장단 맞추
던 것이 다양한 문학 소식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지인의 입담에 흠뻑
빠지고 말았답니다. 경청하면서 맞장구도 치고, 질문도 하고, 웃기도
하고, 감탄도 하며 문학 저변에 대한 잡담에 정신을 팔다가 깜짝 놀
라 냄비를 돌아보니 제법 센 김이 뿜어지고 있었습니다.
   황급히 전화를 끊고 냄비에게 달려갔지요. 얼른 뚜껑을 열고 보니
이게 또 뭔 변고랍니까. 자작하니 익어 있어야 할 도루묵이 푹 삶아
져 흥건한 국물 속에 잠겨 있으니 말입니다.
   전날은 물이 모자라 말썽이던 것이 다음날은 넘쳐서 그르치고 말
았습니다. 모자라거나 넘치면 말짱 헛일이 된다는 걸 도루묵이 몸소
확인해 보인 거지요.
   ‘묵’ 이었다가 ‘은어’가 되고 도로 ‘묵’이 된 것은 결코 물고기의 탓
이 아닙니다. 도루묵은 수심 100~400미터의 바다에서 자유로운 영
혼을 꿈꾸는 선량한 물고기일 따름입니다. 말짱 도루묵은 없습니다.
굳이 도루묵이 있다면 사람들이 붙인 새로운 이름일 뿐입니다. 순하
디 순한 물고기의 이름일 뿐이랍니다.

 

 

손진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