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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여름호, 신작수필20인선] 말의 덤과 덤터기 - 고춘

신아미디어 2012. 8. 7. 16:52

말이 소통을 위한 가장 빠른 수단이어서 일까요, 말로 인한 에피소드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항상 말로 인해 덤을 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의 덤과 덤터기

 

   나는 고등학교에서 국어선생 노릇과 함께 영어선생 노릇까지 했으
면서도 영어에는 서툴다는 사실을 나의 글 곳곳에서 고해성사하듯
실토한 바 있다. 말하는 입은 더듬거리면서도 열려는 있지만 듣는 귀
는 거의 귀머거리나 다름없으니, 영어방송을 들으면 마치 새가 지저
귀는 소리를 듣고 있는 형국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그런 빠른 템포의 스피치가 아니고 정확한 발음으로 오가는
일상적 대화라면 소통이 가능한데도, 애초부터 히어링에 자신이 없다
보니 영어 사용자들과 마주칠 때면 그들이 말을 걸어 올까 봐 지레 겁
부터 집어먹곤 하였다. 어쩌다 그들이 또박또박 쉬운 말로 무엇인가를
물어올 때면 내가 아는 내용일 경우 깍듯한 격식영어로 대답해 준다.
하지만 제 나라에서 저희들끼리 지껄이는 버릇으로 내 귀가 미처 소화
해내지 못할 만큼 빠른 템포로 지저귀듯 물어오면, 우선 내가 알아듣
지를 못하니“나는 영어를 아예 할 줄 모른다.”고 손사래까지 쳐가며
잡아뗀다. 그러면 상대방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렇게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영어를 모른다고 하느냐며 천천히 또박또박 묻고 싶은 내
용을 다시 묻는다. 그러면 나는 또 깍듯한 격식영어로 대답해준다.
   나는 격식영어를 구사하여 뜻밖의 보너스를 받은 경우가 여러 번 있
었지만 가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시카고 공항에서였다. 오하이오 주도인 콜럼버스로 가는 국내선 비
행기로 갈아타려는데 게이트마다 행선지 표지판이 붙어 있지 않았다.
출구번호가 적힌 티켓은 아내의 핸드백 속에 들어있고, 그녀가 면세점
에 들러오는 동안 내가 출구를 찾아놓기로 한 것인데 낭패였다. 티켓
에 찍혀 있었던 출구번호가 15번이었던 것 같아 무작정 그곳으로 가서
“여기가 콜럼버스 행 출구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데스크에 앉
아 있던 40대의 남자 직원이 벌떡 일어나서 “예스 서.”하고는 묻지도
않았는데“탑승(보딩) 시간이 20분 남았으니 저쪽에 앉아서 잠시 기다
리십시오.”하고 맞은쪽 승객 대기석까지 가리켜 주고서야 도로 자리
에 앉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공손한 그의 응대에 오히려 당황한 나는,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아서 그가 왜 그렇게 공손하고 친절했을까를 곰
곰 생각해보았다. 그의 사람됨이 본시부터 싹수가 있는 것이거나 아니
면 내가 그에게 말을 걸기 전에 먼저 깍듯이 “엑스큐즈 미.”를 붙인 것
에 그도 덩달아 예의를 갖춘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 같았다. 나는
그 해답이 두 번째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되었다. 그가 안내해준 의자에
앉아서 별 뜻 없이 그 직원과 그곳으로 찾아오는 탑승객들 간에 오가
는 수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깍듯한 제
스처를 그 다음부터는 한 번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거기
서 격식언어의 가치와 놀라운 효능을 알게 되었다. 실인즉 나는 영어
가 세련되지 못해서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영어를 문법책처럼 구
사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 직원은 격식영어를 쓴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를 교양인이라 여겨,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를 내게 베풀
어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이렇듯 영어 사용자와의 대화에서 서(Sir)로 존대받았던 경험
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나의 격식영어 구사 덕분에 받은
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반대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였다. 이 빌딩에는 86층과 102층에 전망
대가 있어서, 관광객들이 두 전망대와 지층을 오가느라 86층 전망대
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오르내리는 승객들이 항상 장사진을 이루고 있
었다. 그러니 줄의 꽁무니에 서 있는 사람은 그것이 102층 스카이라운
지로 올라가는 줄인지 지층으로 내려가는 줄인지 알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나는 관광회사가 정해준 시간에 맞추어 버스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그 때문에 마음이 바빠져서 무턱대고 아무 줄에나 대고 “이
거 올라가는 거요, 내려가는 거요?”했더니 모두들 들은 척도 하지 않
는 중에 마지못해 어떤 사람이 무뚝뚝하게 “다운!(내려가요.)”하였다.
그런데 그 말투가 꼭 “너는 눈이 없어서 그런 것도 못 보고 그렇게 예
의 없이 구느냐?”하고 힐난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무안하고 머쓱하여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 빌딩에서는 별나게도 물어볼 일이 자꾸만 생겼다. 아까의 무안함
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그 다음부터는 말을 묻기 전에 파어든
(Pardon=실례지만~)이라고 예의를 갖추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그
예의 서(Sir)라는 보너스가 돌아왔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
이 실감으로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소리라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고 그 소리가 어
떤 특정한 생각과 얽혀 만들어내는 얼개다. 때문에 교양인의 말이 되
기 위해서는 그 목소리와 제스처에 사람의 진정성과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예의규범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나의 이
중인격이 부끄러워진다. 차마 고개를 들기 어려울 만큼. 그러니 참담
한 심정으로 또 하나의 고해성사를 해야겠다.
   영어는 서툴다 보니 스스로 주눅이 들어 어쩔 수 없이 격식영어를
사용하게 되므로 대개는 원만하게 대화가 종결된다. 그런데 우리말의
경우는 딴에 국어선생이었답시고 국어의 핵심에 통달했다고 자부하
는 것인지 타인과의 대화 중에 중간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기면
확실하게 기고 아니면 확실하게 아니라는 배중논법이 언제부턴가 내
대화의 습성이 되어버렸다. 도무지 타인과의 타협이라는 것을 모르는
오만방자한 행태인 것이다. 그러니 대개의 경우 내국인과의 대화는 대
립과 갈등을 빚게 마련이고, 그 결과 대인관계는 껄끄러운 뒷맛을 남
기기 일쑤다.
   외부 일정이 잡혀 있지 않은 날이면 나는 집에서 점심을 먹고 거의
예외 없이 양재천변이나 탄천변으로 산책을 나선다. 점심 직후에 산책
을 하는 것은 점심때 먹은 반주로 머릿속이 몽롱하여, 독서나 글쓰기
같은 정신노동은 하기 어려운데다 어차피 날마다 일정량의 운동은 꼭
필요한 것이니, 그것은 술도 깨고 건강도 돌보는 일석이조의 기막힌
발상인 것이다.
   그날도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식후에 트레이닝복 차림에 가벼
운 운동화를 신고 맨손바람으로 구름처럼 홀가분히 산책로를 걷고 있
었다. 그런데 누구네 애완견 한 마리가 내 발뒤꿈치에 엉겨붙고 있었
다. 고개를 돌려 아래를 굽어보니 개는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였으
며 10여m 저쪽 벤치에 서너 명의 부녀자들이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개들 좀 묶으세요!”나는 그들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 개 우리 거 아닌데요.”하고 여인들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등 뒤에서
   “그 개가 뭐 당신에게 해코지한 게 있어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
아다보니 내 또래거나 나보다 오히려 몇 살 위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개 두 마리를 끈으로 묶지도 않고 몰고 가던 중에 그 중 한 마리가 내
발뒤꿈치에 엉겨붙으려 했던 것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려면 끈으로 묶게 돼 있지 않나요?”내가 일단 점
잖게 말했는데도
   “그러니까 그 개가 당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 게 있느냔 말이요!”
하며 오히려 따지듯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이쯤 되면 또 나의 배중논
법이 등장할 차례다.
   “개를 두세 마리씩 끌고 다니는 걸 보아하니 틀림없이 개장수 같은
데, 시골 5일장에 가서 개를 팔아야지 여긴 왜 왔어?”
   “…….”
   “…….”
   한동안 두 사람이 험하게 노려보다가 궐자는 제가 불리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나 보다. 손을 부들부들 떨며 들고 있던 끈으로 개들을
묶어가지고는, 무어라고 분을 못 삭이는 소리를 내뱉으면서 제 거처로
보이는 아파트 담장의 협문 안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만약 그 영감
이 아까 거기서 한 마디만 더 뭐라고 뇌까렸더라면 내 입에서는 즉각
“이 개새끼야!”소리가 터져나왔을 터인데 궐자가 먼저 꼬리를 사리고
물러가니, 다행스러운 일방 그 꼴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인들 편할 리가
없었다.
   ‘아, 도루아미타불이로구나!’
   나는 매양 이렇듯 저질러놓고 후회한다. 사실 지금껏 내가 잘못해서
벌어지는 승강이질은 별반 없었다. 나도 명색 먹물 든 위인이 객관적
판별력이 없겠는가! 누가 보아도 상대방의 잘못으로 사단이 벌어지곤
하는데, 문제는 그럴 때마다 내가 처음엔 잘 나가다가 종국엔 격식언
어를 버리고 비속한 욕질을 해대고 만다는 것이다.
   “이 개새끼야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이 깡패새끼야, 우리나라가 무법천지냐?”하며 앞뒤를 재보지도 않
고 무작정 욕설을 내뱉는다. 그래놓고는 상대방이 왜 욕을 하느냐며
덤벼드는 서슬에 애시발단은 어디로 가버리고 욕을 했다는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 나는 도리어 궁지에 몰려서 내가 잘못한 것이라는 덤터기
를 쓰기 일쑤였다. 그런 손해 보는 장사를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하면서도 누군가의 몰상식한 행태에 직면하
면 그 다짐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또다시 비루한 욕질을 해댔다가
결국 판정패하고 마는 나는 아무래도 경계선 인격 장애자가 아닐까?

 


고 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