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입니다. 차가운 커피와 김예경님의 수필과 함께 여유를..
사순절의 커피
어른이 되기 전에 커피를 마시면 얼굴이 까매진다. 그 말을 믿었던
순진한 시절에는 빨리 대학생이 되어 멋지게 커피를 마셔보고 싶었
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는 되어야 어른이라는 말도 이의 없이
믿었기에, 처음 커피를 마신 것은 당연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였
다. 아는 오빠가 성인식이라도 해 주는 양 나를 다방에서 만나자고
했고, 그날 처음으로 다방에도 들어가고 커피도 마셔보았다. 원래부
터 쌉쌀하게 쓴맛을 좋아하는 내게 커피는 처음부터 매력 있는 맛이
요 마력 있는 향기였다.
근년에 위궤양이 또 도져서 꽤 오래 병원에 다녔다. 커피는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하루에 딱 한 잔만 마시겠다고 고집을 부렸
다. 의사는 하는 수 없는지 그러면 꼭 한 잔만 식사 후에 바로 마시라
고 허락해 주었다. 친정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데에다 걸핏하
면 위궤양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내가 그 의사의 눈에는 꽤나 한심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좋아하는 커피가 사실은 내 체질에는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 내가 하루에 마실 수 있는 커피는 기껏해야 두세 잔이다. 그
이상 마시면 가슴이 뛰며 특히 오후 네댓 시 이후에 커피를 마신 날은
영락없이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된다. 아마도 커피를 아예 끊는 것이
내 건강을 위해서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깟 한두 잔이 해로우
면 얼마나 해로우랴 유익한 점도 많다는데 라는 생각으로 제 논에 물
대기격 자위를 하면서 커피의 유혹을 뿌리칠 마음은 먹지 않고 산다.
금주나 금연처럼 나도 금禁커피를 해본 적이 있기는 하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부활절을 앞둔 시기에, 사순절四旬節이라고 부르는 기간
인 40일 동안을 좀 특별하게 지내는 관습이 있다. 사순절 동안 어떤
물질이나 노력을 희생해서 그 결과를 현금으로 환산해 형편이 어려
운 곳에 보내주는 일이다. 사람마다 선택하는 희생의 종류는 다 다르
지만 쉬운 예를 들자면, 애연가인 사람이 금연하거나 애주가가 금주
하고 그 담뱃값이나 술값을 모아 헌금하는 식이다.
어느 해 사순절에 나는 커피를 희생 대상으로 정했다. 내게는 다른 무
엇보다도 극기하기 힘든 과제일 것 같아서였다. 첫해에는 무척 힘들었
지만 수년을 거듭하면서 점차 수월해지더니 나중에는 끝날 무렵이면
커피 생각을 거의 잊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다지 힘들지 않은 일을 희생
이나 극기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이후로는 커피 희생을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사순절이면 택시 타지 않기, 꼭 사고 싶은 물건 한 가지쯤
포기하기 등 이런저런 희생을 전전하면서 헌금을 마련하곤 했다. 그
사이에 그만 나는 다시 커피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있었다. 다시 한
번 커피를 희생 제물로 삼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쉽지가 않았
다. 그전처럼 끝날 무렵이면 커피 생각을 잊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사
순절마다 40일이 차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데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여전히 쉬워지지를 않았다. 그러고 나면 드디어 돌아온
부활절 기쁨의 이유가 예수부활인지 커피부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
다. 쉬운 것 못지않게 너무 어려운 것도 순수한 기쁨의 의미를 흐리
게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슬며시 커피 희생을 접고 말았다.
평소에 나는 아침 식후의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전까지는 다음 일과
를 시작하지 않는다. 시작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머
릿속이 안개가 낀 듯 몽롱한 것이 떠오르는 생각도 별로 없고 마치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상태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첫 커피 한 잔을 마
시고 나면 그때부터 정신도 깨어나고 생각도 시동이 걸린다. 그것이
카페인 중독의 증거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커피의 각성 효과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횟수나 양을
늘리는 것도 아니고 또 꼭 마음만 먹는다면 끊지 못할 바도 없는 그
저 습관성 정도라고 믿는다.
나는 비교적 결단성이 있는 편이어서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는 평
판을 들어왔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는 어쩐지 그런 성격이 많이
느슨해진 것 같고 신경도 훨씬 둔해진 듯하다. 물건 하나 사는 하찮
은 일에 마음을 얼른 정하지 못해 짜증스러워지는 일 따위는 전에는
없었던 현상이다. 그전 같으면 끝을 야무지게 매듭지으려고 애면글
면 애를 태웠을 일도 이젠 쉽게 포기하고 손을 놓고 만다. 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커피 희생 역시 그렇다. 첫 번째에 비해, 십여 년 후에 재도전
했을 때는 이미 내 의지가 많이 약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신경
이 무디어지는 것이야 별 나쁠 것 없지만 결단성이 없어진다는 데에
는 좀 긴장감이 생긴다. 원래 나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사
람을 제일 싫어하는 성미가 아니던가.
사순절이 다가오는 2월이다. 적어도 일 년에 40일 정도는 끊을 수
있는 커피라야 중독이 아니고 습관성이라는 내 말이 증명된다. 희생
하면서 애국도 하고, 극기하면서 결단력도 점검하고, 무엇보다도 부
활절의 기쁨이 배가 되고 덩달아 커피 부활의 기쁨도 배가 된다. 그
뿐인가? 위장에도 득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을 터. 일석 몇 조
인지 얼른 계산이 되지 않는다. 이번 사순절 희생으로는 다시 한 번
커피를 생각해 봐야겠다.
김예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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