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비평의 신인상수상작을 소개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일인지가 생각납니다.
김경자님의 수필을 통해 모두가 성장하기를 희망합니다.
솔방울꽃
초겨울답지 않은 온기가 온몸을 감싸 안는다. 정오의 햇살이 숲 속
깊게 들어온 산속에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산들머리를 따라 서 있는 소나무 위에는 파란 하늘이 시원스레 얹혀
있고 가지마다 솔방울이 제각각 모양새로 옹기종기 붙어 있다. 학교의
뒷산에 나지막하게 서 있던 소나무들은 어느덧 건물을 에워싸듯 솟대처
럼 자랐다. 군데군데 들어선 새 건물에 낯설었던 나는 예전 그대로의
풍경을 만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한다는 세월이 지났다. 휴
일을 맞이하여 오랫동안 벼르기만 했던 모교를 찾았다. 건물 따라 운동
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돈 다음 샛길을 따라 뒷산인 오봉산에 올랐다. 산으
로 올라갈수록 알 수 없는 먹먹한 그늘이 가슴에 깔리기 시작했다. 어쩌
면 교실과 운동장보다 오봉산이 있어 초등학교의 추억이 살아있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시골에서는 교실과 학교에서 필요
한 대부분을 자급자족했다. 신학기에는 청소도구를 가져왔고 학기 중에
는 학습란에 붙일 사진과 자료를 신문에서 오려 가져오기도 했다. 찬바
람이 불어오면 학급마다 집집에서 김장을 하는 것처럼 교실 난로에 필
요한 땔감을 준비했다. 쇠난로에 들어가는 불감은 솔방울이었다. 솔방
울은 불이 잘 붙고 화력이 세고 산마다 지천으로 깔려 있어 시골학교에
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면 담임선생님의 뒤를 따라 포대를 들고 산길을 줄
지어 올랐다. 산길은 가팔랐지만 소나무 밑동마다 솔갈비가 두텁게 깔
려 있고 솔방울은 숱하게 떨어져 줍기에 힘들지 않았다. 선생님의 지시
에 맞추어 우리들은 조막손이 시려오도록 마대 자루가 터질 만큼 솔방
울을 주워 담았다. 산길에 어스름이 깊어질 무렵이면 마대 포대를 어깨
에 둘러메고 <반달>과 <오빠 생각>을 합창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한 해
겨울이 지나면 다음해 봄이 왔다. 다시 겨울이 오면 마대를 들고 학교
뒷산으로 올랐고 더욱 묵직해진 포대를 짊어지고 산길을 내려왔다. 솔
방울을 함께 주운 담임선생님은 해가 바뀌면 전근을 가거나 다른 학년
의 담임을 맡았다. 그래도 솔방울을 수확하는 겨울철 행사는 달라지지
않았다.
솔방울을 생산하던 오봉산이 그동안 달라졌다. 등산로 입구는 정원석
과 꽃으로 정비되어 있고 여름방학 때 목을 축이던 옹달샘은 그럴싸한
약수터로 변해 있었다. 산 중턱을 넘어가니 그나마 제 모습 그대로였다.
나무 그늘은 더욱 넓어지고 나무껍질이 거북등처럼 거칠었지만 곤줄박
이 한 마리는 예전처럼 머리 위에서 맴을 돌고 있었다. 솔방울도 지천으
로 널려 있었다. 마대 포대에 쏙쏙 들어가던 천연땔감 솔방울들이 꺼멓
게 썩어 있었다. 그러나 솔방울을 서로 주우려던 동무들은 어디에도 없
다. 옆 짝 영희는 서울로 가버렸고 담임선생님들은 소식이 없다. 귀하면
대접을 받지만 쓸모가 없으면 버려지는가. 지천으로 널린 솔방울만으로
도 이기적인 시류를 보는 것 같아 서글픔을 느낀다.
찬바람이 유난히 매섭게 불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전교생이 운동장
에 모여 국민보건체조를 하고 있을 때 밥 타는 냄새가 전교생의 코를
자극했다. 우리 반 아이들이 양은 도시락통을 난로 위에 벽돌처럼 얹어
두었는데 반장이 선생님 몰래 솔방울을 더 넣어 화기 센 난롯불에 도시
락밥이 타버렸다. 운동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냄새의 진원지는 누
가 보아도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우리 반 교실이었다. 마흔이 갓 넘은
패기 넘치는 선생님의 스포츠형 머리카락이 번쩍 서는 듯했다. 선생님
의 큰 눈이 우리 반 아이들을 쭈욱 훑어 내렸다.
아이들이 우루루 달려와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밥 타는 냄새가 더 코를
찔렀다. 맨 아래에 깔린 밥은 새까맣게 탔고 서너 개의 도시락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당연히 단체벌이 이어졌다. 걸상을 들고 책상 위에 꿇어
앉았다. 3~4분이 지났을까. 걸상을 들고 있는 팔이 반쯤 내려 왔다. 눈이
마주친 친구들은 킥킥 웃음을 참느라고 용을 쓰고 있었다. 선생님은 처
음부터 우리들을 못 본 척하셨다. 그리고 슬며시 교실 뒤로 가서 구석에
세워진 마대 속의 솔방울을 가져와 난로에 듬뿍 넣었다. 난로는 신이
난 듯 솔방울 불꽃을 피우면서 교실을 훈훈하게 데워 주었다.
얇고 작은 씨앗 하나가 솔방울을 단 소나무가 된다. 우리는 소나무에
서 소나무로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을 거의 모르고 지낸다. 소나무 기둥
을 올린 집에서 태어나고 솔가지를 매단 금줄로 액운을 막고 소나무 장
작으로 지은 밥을 먹으며 온돌방에서 잠을 잔다. 평생을 버리는 모습을
지켜내는 소나무처럼 나의 삶도 침묵의 희생을 배워 가면 남을 위한 온
기를 줄 수 있을까. 상생과 베풂을 깨닫는 소나무를 마음에 담을 수 없다
면 유년의 추억도 없을 것이다.
올려다본 소나무 가지마다 솔방울이 수북하게 달려 있다. 그것들이
예년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푸른 종으로 보인다. 솔방울이 바람에 나직
하게 흔들린다. 저 솔방울에도 내가 살아온 흔적을 말하는 건 아닐까.
열 살 나이에 보았던 작은 솔방울종이 유년의 꿈을 키워 주었다면 지금
보이는 솔방울은 더도 덜도 아닌 알맞게 늙은 내 모습이면 싶다. 후일
언젠가 오봉산에 오르면 그때의 솔방울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종이 될
지도 모른다.
허리를 굽혀 잿빛 솔방울을 줍는다. 점퍼의 양쪽 주머니가 이내 가득
차올라 손가방에도 솔방울을 몇 개 더 넣었다. 집으로 가져가 소쿠리에
담아 둘 참이다. 어린 시절에서 지금까지의 삶을 이루도록 해 준 곳이
오봉산과 학교라는 생각이 든다. 지천명이 되어버린 친구들도 어디선가
솔방울 불빛을 생각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난롯불을 지피기 위해 흘렸던
매운 눈물이 없었다면 어찌 지금의 내가 있을 건가. 타다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솔방울꽃이 그립기만 하다.
김경자 ----------------------------------------------------------------------
경남 양산 출생. 부경수필아카데미수료.
수상소감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는 날, 맞이한 소식은 가슴을 뛰게 합니
다. 제 인생의 한 부분에 작은 흔적을 남길 수 있어 행복합니다. 막연하
지만 긍정의 힘을 믿었고 나 자신을 조금은 완성하고픈 희망을 가졌습
니다. 일과. 배움, 봉사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어 부족하지만
열심히 뛰었습니다. 무모한 도전인줄 알았지만 용기 하나로 시작한 글
공부는 잊고 있었던 나를 찾는 길을 걷는 자양분이었습니다.
지각할까봐 옆에서 매번 한마디씩 던지는 남편의 격려가 고맙고 지쳐
있는 엄마에게 파이팅 해주는 아들과 딸이 후원자이기에 더욱 힘이 납
니다. 지인의 격려 한마디에 용기를 얻습니다. 매 수업마다 맑은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수준 높은 강의를 해 주신 지도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같은 꿈을 갖고 문학 시간을 함께 하는 문우선생님께 감사합니다. 꽉
채워지지 않은 저의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 더욱 감사를 드립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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