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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7월호, 촌감단상] 반전 - 이은희

신아미디어 2012. 7. 18. 17:48

이은희님의 수필을 읽을 때마다 미소가.. 웃음이.. 즐겁습니다.

 

 

 

 반전


   동생이랑 통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환호성에 둘의 목소리는 감쪽같
이 사라졌다. 내 모습은 소리가 없는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배우의 연출
같았다. 좋아하는 팀이 득점 없이 회만 거듭하다 고대하던 만루 홈런이
터진 것이다. 홈런 공의 동선을 따라가고 싶었는데, 공의 흔적은 어디론
가 사라지고 관객의 환호만 난무했다. 주위를 돌아보니 나 혼자만 앉아
있었다. 나도 일어서서 기뻐하지 않는다면, 야구에 대한 기본 예의를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 될 상황이었다.
   내 곁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과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사람, 짐승처럼
포효하는 듯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 남편의 몸짓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십 년 넘도록 함께 살며 끼가 다분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야구를 좋아하고 분위기에 휩싸여 좋아하는 사람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내로라 하는 박찬호가 등판하여 5회 초까지 애를 썼는데도 7:0으로
지고 있던 팀이었다. 그런데 5회 말에서 만루 홈런을 쳐 그 기세를 몰아
역전을 한 것이다. 나는 팀의 역전도 놀라웠지만, 남편의 또 다른 반전이
놀라웠다. 그래서 야구의 승패는 9회 말까지 가봐야 알고, 사람은 살면
서 겪어봐야 한다고 했던가. 함께 간 딸도 마냥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런 딸의 얼굴을 보니 웃지 못할 기억이 떠오른다.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남편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결혼하여 처음 맞는 내
생일에 만삭인 아내를 혼자 둔 채 새벽부터 지방 야구장으로 떠난 것이
다. 그것도 직장에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비밀이
영원하던가. 우연히 남편 직장 동료와 대화를 나누다가 거짓말이 들통
난 것이다. 그날 밤 거짓말로 말싸움을 크게 한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음
이 터진다.
   이십대 철없던 시절, 남편이 야구장을 가자고 할 때 그의 마음을 진즉
알아차렸어야 옳다. 돌아보면 내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인지라 임신부가 갈 자리는 아니라고 냉정히 거절한 것이
거짓말을 부른 격이다. 지금 생각하면, 야구장에 갈 수도 있는 일인데,
굳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살아오면서 야구 이야
기만 나오면 남편을 골려 먹었는데, 지금의 남편 모습을 보니 그 이야기
가 이젠 쏙 들어갈 것 같다. 삶에도 반전은 있는가 보다.
   남편은 지금 목이 쉬도록 응원을 하고 있다. 저리 응원하니 어찌 좋아
하는 팀이 역전이 되지 않으랴. 참으로 열정이 넘치는 사람임에 틀림없
다. 저 열정을 숨기고 살았으니 가슴이 얼마나 답답했으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데, 응원석 저쪽에서 인간 파도가 빠르게 밀려온다. 성
나게 밀려오는 파도에 순순히 나의 몸을 맡긴다.

 

 

이은희  -----------------------------------------------------------------------
2004년 ≪월간문학≫ 등단. 신곡문학상수상(2012년)
저서: ≪검댕이≫, ≪망새≫, ≪버선코≫, ≪생각이 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