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계에서는 널리 알려져있는 서순정님의 신인상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필가로 출발하는 제2의 인생에서도 일가를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스러운 여인, 엄마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사들고 엄마의 산소를 찾았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10년, 90세까지 사셨다는 것으로 남들은 복인福人이라고
들 하지만 나에게는 못다 한 효도의 자책감으로 늘 가슴속의 한限이 되
어 남아 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무엇이 그리 쑥스럽고 어려웠기에 “엄
마,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요.”라는 살가운 말 한마디를 끝끝내 하지 못
한 채 엄마를 떠나보냈다. 비석에 새겨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시편 23편의 문구가 이곳에 누워계신 엄마
에게 위로와 안식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부모님은 자식들한테 사랑받
던 기억만 가지고 간다고 하는데 불쌍한 우리 엄마는 저세상에서도 이
못난 딸이 보고 싶어 눈물짓고 계신 것은 아닌지…….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만큼
헌신적인 분이었으나 우리는 어렸던 탓에 그것을 아주 당연한 일로 생
각했다. 엄마도 꿈이 있으며, 섬세하고 예민한 정감을 지닌 한 연약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오로지 자식들의 성
공과 행복만을 위해서 자신의 꿈과 욕망은 다 접어두고 사셨던 엄마,
그 일생은 얼마나 외롭고도 고된 삶이었을까.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가
슴이 저려온다.
엄마는 그 시대의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훤칠한 키에 수려한 이목구비,
그리고 백옥 같은 피부를 지녔었다. 외출할 때는 늘 한복을 입으셨는데
그 품위 있고 우아한 자태는 마치 구경거리라도 난 듯 사람들이 쫓아다
닐 정도였다. 이런 타고난 조건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
으로는 많은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나긋나긋한 여성적 애교나
내숭이 없는데다가 성격 또한 곧고 직선적이어서 주변 사람들이 접근하
기를 어려워하였다. 또 온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의 결벽성 때문에 조금
이라도 지저분하거나 불결한 것은 참지를 못하고 표정과 행동에 그대로
나타내시곤 해서 집안 어른들로부터는 유별나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엄마였지만 자식들 앞에서는 아버지한테도 보여주지 않던 애교를 가끔
보여주셨던 기억이 난다. 새로 해드린 옷을 입고 좋아하시는 것을 보고
“엄마, 예뻐요. 아주 새색시 같아요.”라고 우리가 놀리면 정말 새색시라
도 되는 듯 눈을 착 내리뜨고 치마 꼬리를 살짝 움켜쥔 채 살랑살랑 얌전
을 빼며 걷는 시늉을 하시기도 했다.
아버지와 결혼을 하신 후에도 주위에는 친정과 시댁 할 것 없이 온통
도와주어야 될 사람들뿐이어서 얼마 안 되는 공무원의 봉급으로 어찌나
알뜰하게 살림을 하셨는지 그 근검절약의 정신은 다른 사람들이 흉내도
못 낼 정도였다. 아무리 낡은 것이라도 버리는 것이 없었고, 하다 못해
비닐봉지 같은 것도 커다란 광주리 몇 개가 꽉꽉 차도록 모아두셨다.
나는 “엄마, 자자손손 몇 대가 써도 남을 정도로 많으니까 제발 좀 버리
세요. 귀신 나올 것 같아.”라고 질색을 하면, “모아두면 다 쓸 데가 있다.”
하시며 태연히 받아넘기도 하셨다. 옷도 얼마나 아끼면서 곱게 입으셨
는지 20년 동안 입으신 옷도 금방 바늘을 뽑은 새 옷인 듯 깨끗했다.
내가 해외에 갈 때마다 사다 드린 선물은 손님들이 오면 우리 딸이 사다
준 것이라고 자랑만 하고 아까워서 잘 쓰지를 못하셨다. 1970년대에 불
란서에서 큰 마음 먹고 사다 드린 화려한 양산은 아끼시느라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채 아직도 새것 그대로이다.
엄마의 처녀시절 꿈은 작가作家가 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고등
여학교를 다녔던 엄마는 글을 잘 써서 일본인 작문 선생님으로부터 칭
찬과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이화여전梨花女專으로 진학하여
작가수업을 받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가정형편상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평생 이화여전 출신의 신여성들을 부러워하며 사셨다. 머리도
좋고 끈기와 참을성이 놀라웠던 엄마가 체계적인 문학수업을 받을 수
만 있었다면 당대에 문명文名을 떨치는 작가가 되었으리라고 나는 믿고
있다. 엄마는 거동을 못하고 누워계셨던 마지막 몇 년을 빼고는 평생
독서하는 습관을 놓지 않으셨다. 1980년대에 <슈후 또 세이갓쯔>(主婦와
生活)라는 일본 잡지에 자식들이 불치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들의 투병
수기가 연재된 일이 있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엄마는 일본 잡지사로
부터 허가를 받아 이 수기들을 번역해서 출판하였는데 그때 엄마 연세
가 76세였다. 자식들이 어쭙잖게 참견하며 방해를 할까봐 얼마나 철저
하게 비밀을 지키셨던지 번역이 다 끝날 때까지 우리는 엄마가 번역을
하고 계신지도 몰랐었고, 출판이 되어 나온 후에야 그 글들을 읽어 볼
수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자신의 반평생을 기록한 33권의 노트를 발견하
였다. 손가락 마디만큼 굵은 글씨에 줄도 맞지 않고 어떤 페이지는 하단
글씨가 반토막인 것을 보니 엄마의 시력이 극도로 약해졌던 80세 전후에
쓰셨던 것 같다. 페이지마다 자식들의 작은 재롱과 성취에도 얼마나 가
슴 뿌듯한 자부심으로 행복해 하셨는지, 구구절절 녹아있는 사랑과 헌
신의 기록에 가슴이 메여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33권의 노트가 단순
한 수기가 아니라 돌아가실 때까지 문학에의 꿈을 버리지 못한 엄마의
집념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리도 오랫동안 문학에의 열망
을 가슴 깊숙이 묻어둔 채 엄마는 얼마나 서러운 한恨을 안고 가셨을까?
엄마의 연세가 아무리 많았더라도 문학수업을 받으실 수 있도록 내가
적극적으로 주선하고 추진했어야 마땅했다. 만일 그랬더라면 엄마 가슴
에, 그리고 지금 내 가슴에 이렇게 한恨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을. 내가
받은 감동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슴 저미는 감명을 줄 수 있도록 내
손으로 엄마의 일대기를 꼭 한번 써보고 싶다. 그러면 엄마의 한을 조금
이라도 풀어드릴 수가 있으려나. 부질없는 소망이지만 가져본다.
엄마를 모시고 살면서 나는 엄마 고집이 너무 세다고 걸핏하면 신경
질을 부렸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하찮은 일들이 그때는 왜 그토록
섭섭하고 분개할 일들로 여겨졌는지. 내가 아무리 화를 내도 다 받아
주시고,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해도 나에 대한 신뢰는 결코 변함이 없
으실 엄마에게 나는 못된 성질을 참지 못하고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럴 때마다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듯 엄마의 심정은 얼마나 불편하고
슬프셨을까. “엄마, 뭐든지 엄마 좋으실 대로, 엄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 지금이라도 이 말은 꼭 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엄마에게 전할
수 있을까? 내가 고집이라며 우기던 엄마의 주관도, 질색하며 싫어했
던 지나친 알뜰함도, 그리고 몇 년 동안 받아냈던 엄마의 대소변 냄새
까지도 지금은 다 그립기만 하다. 엄마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한번
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지만 다 헛된 일
이다.
세상에서 제일 참을성 많고, 머리 좋고, 알뜰하고, 순진하고, 고지식하
고, 헌신적이었던 엄마. 자기 자식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로 착각
하셨던 팔불출 엄마. 여리디여린 소녀의 감성을 지녔지만 험한 세상에
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인해질 수밖에 없었던 엄마. 그럼에도 불구하
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소녀 같은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엄마는 누가 뭐
래도 진정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40대 초반에 홀로 되신 후 50여 년 동안 자식 셋을 키우고 의지하며
사셨던 엄마의 외로움과 고통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고독과
고뇌를 견디며 살았던 엄마의 기나긴 세월만큼 나에게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불효의 통한痛恨을 안고 살아가는 세월이 있어야만 지극히 작은
속죄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순정 -----------------------------------------------------------------------
단국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및 학장 역임. 현 명예교수.
현 밀레니엄 심포니에타 대표 및 지휘자. 이화수필문학회 회원.
수상소감
우선 저의 변변치 못한 수필을 신인상 후보로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지도해 주신 교수님과 함께 공부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문우들에게도 아울러 감사드립니다.
평생을 통해 누구보다도 문학에 뜨거운 정열을 가졌고, 글쓰기에도
재능이 뛰어나셨던 어머니에게 이 영광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어머니의 굴곡진 생애를 소설 형식으로 써 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필과 소설의 작법은 상당히 다르
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수필반에서 작문의 기초를 배우고 몇 편의 수
필을 쓴 경험은 저에게 큰 수확이 되었습니다. 수필 문학 신인상은 무거
운 짐이 되기도 하지만 반면 아주 신나고 기쁜 마음을 숨기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음악을 통하여 예술에 접근해 왔다면 이제는 글을 통
해 예술의 본령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두 길은 다른 길이 아니라, 같은
길임을 이제 어느 정도는 실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성심껏 노력해서 이 방면에서도 일가를 이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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