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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월평] 수필 속의 심상心象 - 김상태

신아미디어 2012. 7. 17. 19:03

월평을 통해 수필들이 새롭게 다가옴을 느낍니다. 여러분들도 새로움을 느껴보시죠.

 

 

 

 

  수필 속의 심상心象


                                  1
   심상心象이란 말은 서구어(특히 영어)의 ‘image’를 우리말로 번역한 말이
다. 사전적 의미는 “외적 자극과는 관계없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구체
적·감각적感覺的으로 마음속에 재생되는 상像”(새우리 큰 사전)이다. 심상
은 대체로 시詩에서 주로 언급되고 있지만 산문에서는 별로 논의되지 않
고 있다. 그 이유는 심상은 주로 비유에 의해서 조성되고, 그렇게 조성된
심상이야말로 시적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심상을 지니고 있지
않은 시는 좋은 시로 대접받지도 못할 뿐 아니라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
하는데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은유는 시의 심장이다.”라고 단언한
러어너(Learner)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은유에 의존하지 않는 훌륭한 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가령, 박목월의 <청노루> 같은 시는 은유에 의존한 시가 아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
잎 피어가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시에서 우리는 뚜렷한 심상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은유로 된 시는
아니다. 어떻게 은유를 사용하지도 않고, ‘청노루’가 서 있는 심상을 뚜
렷하게 느낄 수 있는가. 문맥 혹은 상황(context)이 만든 심상이다.
   수필은 주로 산문으로 되어 있다. 산문에는 물론 은유가 많이 발견되
지 않는다. 그렇지만 심상이 그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독자의 감성을 충분히 자극할 수 없다. 수필 작품을 읽고 난 뒤에 어떤
형태로든 우리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어야만 좋은 작품으로 기억된
다. 다른 말로 하면 논술적 수필이 아닌 이상 뚜렷한 심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야만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심상은 그 자체만으로 “뜻이 있고, 시의 의미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다.”라고 저 유명한 <시의 이해>(Understanding Poetry)(클레안스 브륵스와 로
버트 팬 워른 공저)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심상이 의미를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것이 속해 있는 유니크한 컨텍스트의 관점에
서 그 효율성을 판단해야 한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컨텍스트를 떠나서
는 심상의 효율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수필에서 심상의 효율성
을 판단하는 것 또한 같은 이치로 생각해야 한다. 다만 시에서처럼 은유
에 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교를 통해서 심상을 산출하고
있는 것은 같은 이치다.


                                        2
   최해숙의 <기도>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지켜본 작가가 여러 형태
의 심상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처음은 “창문에 잠자리 한 마리가 붙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유리문에 갇혀 오르락내리락 하
더니 창문 잠금 쇠에 매달려 날개를 살짝 접는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어 누군가를 향해 기도하는 모양새”라고 생각한다. “절
박한 상황에서의 몸짓”은 곤충이나 사람이나 같다는 것이다. 잠자리의
안타까운 몸짓을 보면서 어머니의 기도를 떠올린 것이다.


   어머님은 바닥에 반듯이 누운 채 두 손을 모아 무언가 열심히 빌고
계셨다. 귀가 어두운 탓도 있겠지만, 자신의 기도에 몰입해 바깥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분위기가 자못 엄숙하기까지 해서 도로 문
을 닫을 수도, 안으로 들어설 수도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또 기도가 이어졌다. 틀니를 빼놓은 채 말하는
때문인지 내용이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고 귀를 기울여
겨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님의 기도는 아주 짧았다. ‘우짜던지
자는 잠에 가게 해 주이소.’


   “어머님의 삶 속에는 늘 자식들을 위한 기도가 있었다.”고 하면서, “장
독대에서는 천지신명님께, 법당에서는 부처님께, 산에서는 산신님께,
강에서는 용왕님께 머리를 조아리며 빌고 또 빌었다.”고 했다. 여러 대
상에게 기도하는 모습이다. 필자도 이 글을 읽으면서 어릴 때 자친이
아들을 위해서 드리던 기도를 떠올렸다. 기도는 인간이 나약함을 느낄
때 어쩔 수 없이 안으로부터 솟는 신앙에서 발로되는 것이다. 특정한
종교의 교리에 집착한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비웃을지 모르지만, 이것
은 인간의 순수한 원망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제 병원에 계시는 어머님은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실까. 잠자리의 파
닥거리는 절박함과 어머님의 기도를 대비하여 보여 줌으로서 기도의 심
상을 살려내고 있다.
   이선화의 <나의 첫사랑>은 여고 시절 동네의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남학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때 한 남학생이 ‘샤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와 섰다.
스케이트를 정지할 때 뿌려진 작은 얼음조각이 내 옷에 튀어 나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눈이라도 흘기며 나의 상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를
힐끗 쳐다보는 순간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 같았다. 얼른 장갑을 벗고 내 옷을 털어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의 모습에 내 가슴은 더 뛰기 시작했다. 얼굴마저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아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작자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첫사랑 남학생에 대한 심상이다. 아름다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문에서의 심상은 이처럼 구체적인 행동, 말
등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때 그 남학생에 대한 인상이 남아서 첫사랑이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첫사랑도 아니다. 사랑을 주고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연락할 전화번호를 쪽지로 받았지만 결국 연락하지 못
하고 버렸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게 들켜 혼날까봐 그랬다니, 그 시절은
다 그랬던 것으로 보아 수십 년 전의 일로 추측된다.
   “얼마 전 옆에 사는 친구가 고향엘 다녀와서 하는 말이 자기의 첫사랑
이 우리 동네 ○○은행 지점장으로 부임해 왔다고 했다.” 그 친구와 함께
가서 보기로 했다. 만나본 그 첫사랑은 실망만 주었다. “큰 체구에 머리
는 반쯤 벗겨지고 배는 많이 나왔다. 그렇게 멋있다고 얘기했던 친구의
말과는 영 달랐다.” 당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
는 그 첫사랑은 십대의 심상이지만 현실의 그 남자는 중년을 훨씬 넘긴
느끼한 모습의 남성일 테니까.
   작자는 친구의 첫사랑의 현실을 보면서 스케이트를 가르쳐 준 그 남
학생을 생각해 본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간혹 궁금한 적도 있었
다. 단정하게 입은 교복 반듯하게 쓴 모자,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나에게 남아있다.” 첫사랑의 심상은 이렇게 아름
답게 남아 있는 것이 좋다.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첫사랑의 이미지는
현실 속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서영의 <여백에 붓을 치다>는 저수지, 철새, 솟대 등의 심상들이
결합되어 그림을 그리듯 나타나고 있다.


   혹한을 피해 남쪽으로 날아온 철새들의 지저귐에 저수지는 순식간에
활기에 찬다. 꽁무니를 치켜들고 자맥질하던 가창오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물고기를 낚아채곤 허공을 박차고 오른다. 큰 고니는 선비처럼
음전한 걸음걸이로 사방을 압도한다. 청둥오리 한 쌍이 갈대숲에서 깃
털을 다듬으며 사랑을 나누고 있다. 겨울 저수지는 또 다른 생명의 삶이
되고 은신처가 된다.
   물속에 담근 버들은 가지마다 새를 앉히고 솟대가 되었다. 여기저기
솟은 솟대는 마치 저수지도 간절하게 비손을 올려야 할 소원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솟대 신앙은 물을 상징하는 물새를 장대 위에 세우고
마을이나 집안의 화복을 빌었다. 인간이 희구하는 행운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소원을 이루고자 솟대를 세웠다.


   겨울 저수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독자에게 마치 눈에 잡히도록 보여
주고 있다. “양의 기운이 음의 기운으로 서서히 몸을 바꾸는 저녁나절이
되면, 노을은 붉다 못해 핏빛으로 흥건하게 적신다. 원숙미가 물씬 풍기
는 노을빛에 저수지의 여백은 또 다른 물감으로 한 폭의 추상화를 그린
다.”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그 정경이 하나의 심상이 되어 오랫동안 마
음에 남도록 한 작가의 탁월한 묘사 담론이다. 가창오리와 청둥오리가
수면 위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정경을 보고 “수천 마디의 언어들이 잿빛
저수지에서 종일 모이고 흩어진다.”고 했는데 이 또한 시적 발상을 산문
으로 쓴 글과 같다.
   문기욱의 <길을 잃다>는 산행을 하면서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보는 글
이다. “충북 금수산 자락 해발, 986미터의 남산”을 회원들과 함께 올랐다
가 일행과 헤어져 혼자 하산하면서 등산과 인생길을 비교하고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 그것이 문제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세 가지.
하나는 원점으로 다시 회귀하는 길. 둘째는 지도에 표시된 등산로. 그리
고 셋째는 산사 방향의 지름길이다. 결국 산사 방향의 지름길을 택하기
로 했다. 사람들이 오간 발자국도 선명할뿐더러 절로 통하는 길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이라는 길에서도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20여 년 재직하던 직장
을 IMF로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선배로부터 한께 일을 해
보자는 권유를 받았다. 얼마간의 돈을 투자하는 조건이다. 소위 명예퇴
직금을 투자하는 모험을 결정해야 한다. 또 월급생활만 하던 내가 사업
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그의 권유를 뿌리치고
다른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선택을 고려 후에 스스로 결정하는 거다.


   앞서 필자는 심상을 이루는 효과적인 방법 중에 브룩스 등의 말을 인
용해서 ‘비교’를 들었다. 이 글도 등산과 인생길을 비교하지 않았다면,
등산도 인생도 심상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가 선택한 하산 길도 그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순탄하게 내
려올 수 있었다. 작자는 이런 말로 남은 인생길을 다짐한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내 영혼에 드리운 채 소멸되
어 버릴 것을. 그러나 마지막 그때까지 의연하게 살아 있고자 한다. 내
영혼의 존엄을 지키면서 말이다.”
   김양희의 <꽃의 길을 걷다>는 약수터에 가면서 만나는 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이다. 꽃이 피는 모습, 그것에 얽힌 이야기, 꽃의 전설 등
을 재미있게 곁들이고 있다.


   산골 후미진 곳에는 원추리꽃 군락이 있다. 두 줄로 겹쳐난 초록 잎대
의 윗부분에 황색 꽃이 달리면 꺾어다 화병에 꽂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
야 하는 꽃이다. 꽃은 매일 새로 피어났다. 피어선 하루만 지나면 지고
대신 새 꽃이 연달아 피곤했다. 잉태한 부인이 원추리꽃을 허리에 차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었으니 간절한 그리움은 꽃과 같은 것일까.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 배경 속에서도 하잘 것 없는 풀꽃들은 ‘그날’
을 기다리며 이 땅을 지킨 민초의 상징이기도 했다. 삽주꽃, 비비추꽃,
노랑매발톱, 마타리와 지천에 널린 구절초와 쑥부쟁이…. 사람의 삶 역
시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다. 어쩌다 기다리는 사람이 오는 수도 있지만
그래도 더 많은 기다림은 남아있다. 그러나 계절의 순환은 변치 않으니
때 되면 꽃피우는 꽃의 숙명은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행복하다 하겠다.


   많은 꽃을 말하고 있지만 이 글의 주제는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의 숙명을 기다림이라고 한 것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기 때문이다.
이 글은 꽃의 기다림과 사람의 기다림을 비교함으로써 아름다운 심상을
만들고 있다. 백목련과 자목련의 설화를 이 글의 끝에 둔 것은 기다림의
심상을 한 번 더 되새기도록 한 것이다.
   김점순의 <자두 이야기>는 자두를 주인 몰래 따먹다가 들켜서 가슴을
졸였던 이야기다. 언니가 살고 있는 동네로 잠시 쉬러 갔던 모양이다.
가는 길목에 자두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처음은 떨어져 있는
것만 주워 오려던 것이 이성을 잃고 나무에 달린 것까지 따게 되었다.
그 순간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언니가 주인에게 가서 사과해서 무사하
게 되었지만, 훔쳐 먹은 자두지만 맛은 기가 막혔다는 것이다.


   떨어진 자두를 비닐봉지에 주워 담다가 먹어보니 단맛도 신맛도 없었
다. 그 순간 내 눈이 자두나무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나무에 달린 빨간
자두에서 싱싱한 단내가 코를 자극하는 것이 “나를 빨리 봉지에 담아주
세요.”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순간 머리는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하면서 이미 나무에 달린 자두를 잡고 있었다. 욕심이 이성을 압도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버렸다.


   자두라면 벌써 입에 군침이 돌 정도로 그 신맛과 단맛이 우리들의 미
각을 자극한다. 이 작품은 자두의 탐스러운 모습과 맛의 심상을 기본으
로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훔쳐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 심상을
보강하고 있는 셈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이 제어되지 않는 것을
처음 체감했다.”라든지 “순식간에 죄의 올무에 걸려든 느낌”이라고 한
것은 작자의 도덕심을 압도할 정도로 자두에 대한 유혹이 컸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어떤 작품이 훌륭한가 하고 묻는다면 비평가들은 대체 어떤 대답을
할까? 비평가들의 대답과는 달리 일반 독자들에게 같은 물음을 던진다
면 그들은 또 어떤 대답을 할까? 다시 물음을 바꾸어 위대한 작품이란
어떤 작품을 가리키는 것일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수잰
랭거의 말처럼 대답보다는 물음이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물
음 속에 대답의 골격(frame)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물음에
대답하기란 더욱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 대답은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야 그 대답의 어렴풋한 윤곽이 잡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시
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민족에 따라 다른 대답을 기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선 전자의 물음에 답해 보기로 하자.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을 작품이라고 말한다면 대충 바른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방편 중에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일
까. 심상(image)이라고 말해도 결코 벗어난 대답은 아니다. 그만큼 문학
작품에 있어서의 심상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작자가 심혈을 기
울여 쓴 언어들은 심상이 되어 독자의 마음속에 남기 때문이다. 심상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크고 작은 형태로 남아 있다. 훌륭한 작품은 크고
작은 심상들이 하나의 큰 심상으로 형성되어 다가오기 마련이다.
   작가들이여!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라. 이 말은 수십 년 전에 이미
에즈라 파운드가 한 말이다. 수백 편의 시를 쓰는 것보다 하나의 당당하
고 견고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가 시인이니까 시인
에게만 해당한 말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다. 모든 작가들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김상태  ------------------------------------------------------------------------
전북대·한양대·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한국비교문학회·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현,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생활수필쓰기 지도.
저서-수필집 ≪참말과 거짓말 사이≫, ≪여자대학의 촌티 나는 교수≫,

≪먼 꿈 가까운 꿈≫, ≪선생님 우리 선생님≫, 콩트 ≪유리구슬≫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