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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작품해설]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하는 바람 - 호병탁

신아미디어 2012. 7. 9. 19:17

무더운 여름입니다만, 신창선님의 신작수필 <어멍아 어멍아>에 대한 호병탁님의 작품해설과 함께 시원함을 느껴보세요.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하는 바람


                                             1.
   내 서가에 꽂힌 여러 책 중에는 아무개 ‘신작 에세이’, 아무개 ‘수상집’
이라는 문학의 한 장르를 지칭하는 책들도 꽂혀있다. 그런데 이런 책들
은 아무개 ‘수필집’이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이 아무개라는 사람들은
매우 저명한 분들로 ‘에세이’나 ‘수상’이란 말을 쓰면 책의 무게가 더 나
간다고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분명 이런 명칭을 사용하며 책을 발간하고
있다. 하기야 내가 지금 쓰고 있는 ‘평론’이라는 것도 수필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구태여 따진다면 연軟에 상치하는 경硬, 혹은 경輕에 상치하는
중重수필이라고나 해야 할까.
   넓은 뜻에서 지금의 수필隨筆에 해당되는 글이 있어온 지는 매우 오래
되었고 이런 글에 대한 명칭도 꽤 많다. 고려 때부터 있던 서설書說, 증서
贈書, 잡기雜記, 찬송讚頌, 논변論辨, 패설稗說 등의 말이 모두 오늘의 수필
에 해당되는 말들이고 신문학 이후의 상화常華, 감상感想, 만상漫想, 만필
漫筆, 수상隨想 등 모두가 같은 말이다. 여기에다 에세이(essay), 미셀러니
(miscellany), 논픽션(non-fiction)같은 서구어까지 가세해 참 이름도 다채
로운 장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나게 한다.
   여러 명칭을 거명한 것은 아는 체하자는 게 아니라 왜 이렇게 많은
이름이 생겨났는지 그 연유를 묻고 싶어서이다. ‘붓 가는 대로 쓴 글’이
란 수필의 의미가 하찮게 보여서 다른 이름을 찾은 것인가. 그렇다면
직역해서 ‘작은 이야기’라는 의미를 가진 ‘소설小說’은 어떠한가. 문학의
삼대 장르로 우뚝 서 있는 이 ‘짧고 하찮은 이야기’는 생긴 이래 개명
한 번 없이 그냥 ‘소설’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문학의 한 장르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문학 이후의 한국문인들
은 수필을 본격적인 문학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여기餘技의 문학’ 정도로
취급했고, 말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隨想)’, ‘붓 가는 대로(隨筆)’이름을
붙여가며 글을 썼다. 이것이 한국수필문학의 발전을 저해한 요인이었고
많은 이름이 생겨난 까닭이기도 한 것 같다.
   수필의 형태, 성격, 유형, 주제, 제재, 구성, 문체 등에 대해서도 많은
정의와 해석과 설명들이 있다. 수필은 지성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 정서
적인 문학, 환상적인 문학, 이미지의 문학, ‘실감實感의 유리遊離’와 ‘실감
의 보수補修’의 문학으로 성격을 규정하기도 하고, 고백적 자조의 글, 산
문·무형식의 글, 비판정신의 글, 제재가 다양한 글, 심미적인 글, 철학
적 가치를 가지는 글 등으로 특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구성도 단순, 복
합, 산만, 긴축 등이, 문체도 간결, 만연, 강건, 우유, 건조, 화려. 소박,
교문 등 구분도 많다. 수필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김진섭)
라느니, ‘천연스런 유머나 보석 같은 위트’가 수필의 본성(김광섭)이라느
니 하더니, 수필은 ‘청자연적이요, 난이요, 학이요, 날렵한 여인이요, 그
여인이 걸어가는 고요한 숲 속의 길’(피천득)이라고 사물과 비유하여 정
의하기도 한다. 외에도 백철은 그의 ≪문학개론≫에서, 박목월은 ≪문
장의 기술≫에서, 최승범은 ≪수필문학≫에서, 문덕수는 ≪현대문창작
법≫에서, 공정호는 ≪수필론≫에서 나름대로의 수필론을 전개하고 있
다. 모두 옳고 좋은 말씀이다. 그러나 수필이 그 자체가 막연하고 폭
넓은 문학형식이서 이처럼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정의와 해석과 설
명들이 있게 되는 것인가.
   나 같은 둔재가 수필을 쓰고자 위에서 언급된 여러 정의와 해석과 설
명을 주마간산走馬看山식이라도 훑고 앉아있다가는 ‘붓이 가는 대로’는커
녕 ‘붓이 한 치도 못가고’ 끙끙거리기만 할 것 같다. 결국 수필 한 편
못 써보고 나는 사당치레하다 신주 개 물려 보낼 게 틀림없다.
   위 모든 사당치레를 쾌도난마식으로 수습해보자. 한마디로 ‘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다. 문학은 예술의 한 갈래다. 따라서 수필은 문학성, 즉
예술성을 생명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다. 하나의 예술작품인 신창선의 <어멍아 어멍아>처럼.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니다. 운문이 아니고 산문일 뿐이며 픽션이 아니고 논픽션일 뿐이
다. 그저 자유롭게 쓰는 ‘수필’, 그 자체일 뿐이다. 바로 신창선이 추구하
는 굴레를 벗어던진 ‘바람’처럼.


                                              2.
   신창선의 글에서는 ‘바람’이 인다. 책 표지 안쪽에 소개된 작가의 이력
만 보아도 그는 ‘바람’ 많은 제주에서 자라고 배웠으며, ‘바람의 혼’이 이
끄는 대로 사범학교를 나온 후 많은 곳을 전전하며 아이들과 부대꼈다
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바람의 글’로 방황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의 글에는 ‘바람’따라 끊임없이 떠다니는 작가자신과 그가
걷는 ‘길’이 보인다. 그는 지금도 “떠나고 싶다. 어디든 훌쩍.”(<작가의 말>)
‘바람’과 ‘길’의 이미지, 그리고 이에서 파생하는 작가의 존재론적 사유
는 그의 글 전체를 관통하는 큰 물줄기임에 틀림없다. 우선 분명 존재하
지만 볼 수 없는, ‘실재적’이지만 ‘불가시적’ 존재인 작가가 쐬고 있는 ‘바
람’을 함께 쏘여보자.


   우우우 하는 소리에 눈을 뜨니 내가 솔바람이 되어 우는 소리다. 달빛
이 창호문에 소나무 그림자를 파도처럼 출렁이게 하는 모습이 정겹다.
이리저리 기웃거릴 때마다 산사의 바람소리는 목탁 소리와 섞여 나무숲
을 흔들어 깨운다.
              (…중략…)
   세상에는 수많은 바람이 있다. 부는 게 바람인데 사람들은 바람의 세
기, 방향, 장소에 따라 바람 이름표를 붙이고는 울고 웃고 야단이다.
   실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흔들바람, 노대바람, 왕바람, 싹쓸바람,
회오리바람, 폭풍, 태풍, 토네이도…, 샛바람, 강바람, 산바람, 갯바람,
골바람, 솔바람…
                                                    -<바람이 되어>에서


   앞부분의 글은 산사에 부는 바람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뒷부분의 글
에서는 갖가지 바람의 종류를 열거하고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날카
롭게 지적하고 있다.
   작가의 유려한 필력은 우리를 당장 ‘달빛’이 교교한 고적한 ‘산사’로
데려간다. ‘솔바람’ 소리에 잠이 깬 작가의 눈에 ‘소나무 그림자’가 ‘창호
문’에 “파도처럼 출렁”이는 게 들어온다. 바로 그 소나무 그림자가 일렁
이며 “기웃거릴 때마다” 바람소리는 ‘목탁 소리’에 섞여 ‘숲’을 깨우고 있
다. 우리는 창호에 출렁이는 솔 그림자를 함께 보며, 숲을 깨우는 바람소
리를 작가와 함께 듣는다. 한 폭의 한국화 같은 아름다운 정경이 여실하
다. 자연사물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독자가 함께, 글을 읽으며 즉시, 공
유하게 하는 이런 심미적인 예술적 묘사가 바로 수필이 문학이 되게 하
는 중요한 근거가 될 터이다.
   그러나 작가는 사물에 대한 미적 묘사로만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불가시적 존재지만 실재하는 ‘바람’에 대한 자신의 깊은 사유를 글에 녹
아 들인다. 세상에 많은 바람이 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우리의 뺨을
간질이며 산들거리는 천사의 ‘미풍’이 있는가 하면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는 악마의 ‘폭풍’도 있다. 바람이 부는 장소에 따라 강에서 부는 ‘강바
람’이, 산에서 부는 ‘산바람’이, 들에서 부는 ‘들바람’이 있다. 또한 위의
글에서 보는 것처럼 작가가 산사에서 느끼는 소나무에 부는 ‘솔바람’도
있다. 신창선은 단호하게 말한다. “부는 게 바람”인데 사람들은 갖가지
“바람 이름표를 붙이고는 울고 웃고 야단”이라고.
   어디 이뿐인가. 작가는 이 글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바람에 대해서
도 사유의 폭을 넓힌다. “사랑의 훈풍 속에 휘파람 불면서 신바람 나게
사는 방법도 많을 텐데”, 소위 ‘돈바람’, ‘야바위 바람’, ‘치맛바람’과 같이
부패의 냄새를 풍기며 부는 ‘속세의 바람’에 대해서도 걱정하고 있다.
   바람의 속성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보고 들리
는 것은 바람에 의해 반응하는 사물들의 모양과 소리에 불과하다. 창호
에 “파도처럼 출렁”이는 ‘소나무 그림자’도 비가시적인 ‘바람’에 의한 소
나무의 ‘움직임’일 뿐이지 바람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깨어나는 ‘나무숲’
도 ‘들리지 않는’ 바람소리에 의한 숲의 반응에 불과하다. ‘바람소리’는
아예 없다. ‘바람’에 의해 사물이 내는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솔바람
소리’에서, ‘소나무 그림자’에서 우리는 바람의 ‘실재’를 자각한다. 따라
서 작가는 ‘바람’은 형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본질로는 존재하는, ‘부
재(無)하는 실재(有)’를 사유하게 된다. 그는 ‘있음의 없음’’과 ‘없음의 있음’
사이를 고뇌한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바람의 이름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상 “바람 이름표”는 없다. 인간들이 그것을 붙이고는 “울고 웃고
야단”치는 것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글에서 자신을 “바람 속에 바람이 되어 굴러온 인생”이라
말한다. 그에게 “바람은 굴레를 벗어던진 자유의 표상”이다. 바람은 하
늘의 얼망에 구속되지 않는다. “바람 속 한 올 구경꾼”이었던 그는 드디
어 “바람” 그 자체가 되고자 한다.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3.
   이왕 내친 김에 신창선의 ‘바람’에 좀 더 확실히 다가서 보자.
   그의 글에는 이제 바람이 ‘이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바람’이 ‘많은 곳’
에서 적극적으로 불고 있다. 바람은 자연사물에 머물고, 부딪치고, 그것
들을 다듬고, 흔들고, 춤추게 한다. 그의 <노을>에는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과 “바람이 다듬은 고운 언덕”이 펼쳐진다. “대숲 이파리가 부딪치
는 소리며 소나무가지 흔들리는 소리”(<극락암에서 만난 마음의 빗장>)들은
물론 ‘들리지 않는’ 바람에 의해 ‘들리는’ 소리가 나는 경우다. “잔물결
이는 호수”(<호수>)도 바람에 의한 ‘움직임’이다. “무희가 된 갈매기의 쉼
없는 춤사위”(<창 시퀀스>)와 “끝없는 기러기 떼가 늦은 가을 한복판을 가
르며” 펼치는 군무(<가을 풍경>)는 모두 ‘보이지 않는’ 바람에 의해 ‘보이는’
서정이다. 갈매기나 기러기는 바람이 없으면 공중에 떠있을 수조차 없
다. 작가가 한 마디로 표현하는 “서걱대는 갈꽃, 철새들의 군무”(<강에게
말을 걸다>)는 바로 ‘부재하는 실재’인 바람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작가는 특히 갈대에 시선을 모은다.


   갈대는 바람의 화신이다. 갈대는 바람의 혼을 먹고 자란다. 갈대에는
바람의 의지가 담겨 있다. 바람의 꿈이 잠겨 있다. 바람의 영혼이 깃들
어 있다. 그리움이 밀려들면 허공에 시를 끼적이고, 그림을 그린다. 노
래를 읊조리고 몸들 흔들어 춤을 춘다.
                                                                  -<갈대>에서


   미려한 문장이다. 갈대꽃이 허공에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 쓰는 ‘시’고,
서걱대는 소리는 바람의 ‘노래’며, 흔들리는 것은 바람의 ‘춤’이란 말이
가슴을 친다. “갈대는 바람의 화신이다.” 갈대에는 바람의 ‘혼’과 ‘의지’와
‘꿈’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
   “깎여 없어진 글자는 비碑의 뜻을 더하고, 그윽한 옛 가락은 끊어진
거문고 줄에서 들린다(沒字豊碑 古調無絃).”라는 옛 시가 있다. 없어진 글자
에 뜻이 어디 있으며 줄 끊어진 거문고에서 무슨 음이 들리랴. 그러나
신창선은 바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서 그 뜻을 읽고 가락을 듣는다.
비가시적이고 비가청적인 바람의 움직임에서 시를 읽고 노래를 듣고 춤
을 보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꽃잎’에서 바람의 의미를 포착한 시인이 있다. “바람은 꽃잎
을 나부껴/ 제 몸을 짓고/ 꽃잎은 제 몸이 서러워/ 바람이 되네.”(김영석의
시, <낙화> 전문) 바로 신창선의 <갈대>에는 한 편의 시가 오롯이 숨어 있
었다. ‘꽃잎’을 ‘갈대’로 환치시켜보라. 같은 사유를 하는 아름다운 두 영
혼을 만날 수 있지 않은가.
   지금도 강둑에 서면 갈대는 바람에 서걱대고 있다. 변함없는 ‘자연의
이치’다. ‘땅엔 가득한 갈꽃, 하늘엔 한결같은 밝은 달(滿地蘆花一天明月)’이
란 말처럼 자연은 억만 년의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은 무이無異의 본연이
다. 인간의 언어문자인 ‘장경의 만법’도 결국은 부질없다. 그러나 그 경
전 밖에서 오늘도 ‘바람’에 갈대는 무심하게 흔들리고, 꽃은 피고 진다.
신창선은 ‘바람’을 통해 바로 이를 일깨운다. 부는 게 바람인데 사람들만
오만가지 이름(인간의 언어)을 붙이고 “울고 웃고 야단”이라고 짐짓 지
청구하면서. 백년을 다 살아야 삼만 육천 일이다.


                                            4.
   우리는 모두 길을 간다. ‘길’은 실제의 길뿐 아니라 ‘인생길’의 전부 혹은
일부를 암시한다. 길의 교차로는 생의 전환점을 의미하며 길의 표지들은
운명의 갖가지 지표가 되는 것이다. 신창선의 글에도 ‘길’따라 떠다니는
작가자신의 모습과 그가 걸었고, 걷는, 걸어야하는 여러 ‘길’이 나타난다.
우선 작가의 고향, 제주의 돌담길은 ‘그리움의 원형’으로 그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돌담은 길을 만들고, 길은 돌담을 따라 먼 데로 달아난다. 길 따라
불쑥불쑥 나타나는 과수원의 거무스레한 돌담은 밖을 갸웃거리며 주렁
주렁 얼려 있는 노란 귤과 어우러져 보는 이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돌담의 미학>


   ‘노란’ 귤의 밝음과, 굽어 돌아가는 돌담길의 ‘거무스레한’ 어둠이 선명
한 보색의 효과를 만들어 강한 시각적 심상을 나타내고 있다. 굽어 돌아
가는 이런 아름다운 제주의 돌담길은 유년시절 작가의 놀이터였다. 비
록 간난의 세월이었지만 ‘투박하면서도 순박한’ 돌담길은 “참새가 놀다
가고”, “귀뚜라미도 뛰어” 다니는 길이며, 어쩌다 “들풀 씨앗이 날아들어
뿌리를 내리”기도 하는 곳이다. 신창선에게 제주의 돌담길은 ‘그리움의
원적지’이자 ‘슬픔과 동의어’로 다가오는 고향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무
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고향을 떠나 많은 곳을 전전한다. 청년시절 그는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 거기서 다시 삼십 리 길을 다시 걸어야 하는, 우산이라는 깊
은 산골에서 교편을 잡은 바 있다. 그 길은 큰 재를 넘고 개울을 건너야
하는 먼 길이다. 상주에서 오일장을 보고 작가는 달빛 쏟아지던 이 길을
걷던 일을 회억한다. 책 맨 앞에 위치한 <잃어버린 달>은 바로 이 길의
여정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마침내 그 길을 걸어 집에 도착했을
때 신창선은 기가 막힌 서정시 한 편을 뽑아낸다.


   털레털레 집에 도착하니 반딧불이 하나가 내 옷소매에서 날아갔다.
그래. 나는 그동안 달빛을 머금은 풀잎이었던가.


   절창이다. 한 편의 시로 완벽하다. 어떤 설명이 필요 없다. 아니, 이
짧은 시의 심미적 효과를 설명하자면 나는 또 다른 긴 평론을 써야 한다.
“반딧불이 하나”가 옷소매에서 날아갔고, 그것은 그 먼 길을 오는 동안
화자가 “달빛을 머금은 풀잎”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표현은 압권이다.
   ‘신발’은 인간의 발을 담고 ‘길’을 간다. 신산한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모든 아픔과 한숨을 오롯이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이다. 신창선
은 우리의 이력서는 “신발이 끌고 온 역사의 기록”인 셈이며 신발은 “존
재와 근원을 찾는 이력”이 된다고 말한다.


   땅과 몸 사이에는 신발이 있다. 신발의 고무 밑창 하나가 인간이 돌아
가야 할 대지의 경계가 된다. 신발을 신을 수 없을 때 땅 속으로 돌아가
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신발은 삶과 죽음의 중간자다. 나의 중간자는
온전한가.
                                                   -<신발에서 삶을 읽다>에서


   우리의 발을 담고 ‘길’을 걷는 ‘신발’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대단하다.
글의 제목처럼 그는 ‘신발’에서 ‘삶’을 제대로 읽어 내고 있다. “고무 밑창
하나”가 인간과 대지의 ‘경계’가 되고 신발을 신을 수 없을 때 그 경계는
무너지고 우리는 땅속으로 돌아간다는 통찰은 차라리 엄숙하다. 작가는
같은 글에서 “산사의 댓돌 위에 놓인 스님의 하얀 고무신”에 대해 언급한
다. 돼지우리에 주석 자물쇠 달고, 갓 쓰고 박치기해도 제 멋이라 우기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정결하며 검박한 이 ‘하얀 고무신’은 속절없는
우리의 미몽迷夢에 대한 깊은 성찰이 온축되어 있다.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들이 길에서의 만남과 길에서 발생되는 사건들
을 직접적인 기반으로 구성되고 있는지 모른다. 거의 모든 문학작품이
길 혹은 이의 변형태의 모티브를 포함하고 있다 철길 위에 존재하는 신
창선의 외로운 ‘승부역’도 당연히 그중 하나다. 1966년 작가의 발걸음은
오지 중의 오지인 전교생 17명의 승부분교에 이른다. 당시 그곳에서 발
생했던 일과, 요즘 그곳을 다시 찾은 감회를 그는 <승부리의 아이들>에
서 동화처럼, 수채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그곳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마당도 세 평”이란 말처럼 작고 깊은 곳이었다. 작가는
하루 한 번 승부역을 지나는 당시의 ‘석탄 열차’가 지금의 자신을 닮았다
고 생각한다.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속세를 내려놓은 곳이다.” 그곳은
“자연의 순백이 온전”한 곳이며 “소멸과 생성, 무와 유가 넘나드는 곳”이
다. 작가는 차라리 승부역을 닮고 싶은 것이다.
   작가의 이런 사유는 ‘비움’을 통해 ‘맑고 고요한 세계’로 비상한다. 자
신이 밟아왔던 무명無明의 길에서 ‘무와 유’가 따로 없는 ‘불이문不二門’의
빗장을 만져본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에게 “버리거라, 버리거라. 욕심
하나 버리면 집안이 극락이요, 이 세상이 극락이다.”(<극락암에서 만난 마음
의 빗장>)고 다짐한다. 작가는 갈대 서걱대는 강둑에서 <강에게 말을 걸
다>가 아니라 ‘강이 주는 말’을 듣는다. <호수>에 가서도 “호수가 가만히
속삭이”는 말을 듣는다.


강물 혼자서 비움과 고요함으로 여백을 만들기도 하고, 바람을 불러
들여 우주를 낚아채고 출렁대기도 한다. 끝내는 하늘과 뒤섞여 버린다.
그리고는 적막에 휩싸인다./ 이 적막은 고립이 아니다. 얽매이기 싫은
자유정신이다. 정중동. 멈춤 속의 끝없는 용틀임이다.
                                                      -<강에게 말을 걸다>에서

 

   곱게 물든 가을산이 호수 속에 거꾸로 앉아 있다. 나무와 하늘, 호수
가 가만히 속삭인다. 비우고 비워라, 깨우쳐 나를 보라고. 그런 연후에
호수를 보라고. 인생무상, 자연무상, 모든 게 무상이라고.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아닌 비유비무라고 타이른다.
-<호수>에서


   강과 호수가 주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내적 성찰이 ‘정과 동’, ‘멈춤과
용틀임’그리고 ‘비유비무’라는 역설 속에서 심원하다. 내 발을 스친 강물
은 이미 흘러갔다. 하여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본질적
실재’에 대한 이런 사유는 결국 강이 하늘과 섞여 버리는 ‘불이의 세계’를
통찰하게 된다. 세계를 향한 원심적 사유와, 마음 안을 향한 구심적 사유
는 독정담연獨淨湛然’의 세계, 즉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는 스스로
고요한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우리에게 신창선의 사
유는 현상 너머의 실재를 감각하게 한다. 그 매개체로서 ‘바람’과 ‘길’이
있다. 이 두 가지에만 시선을 모았는데도 제법 글이 길어진 같다. 이
책에는 애주가인 작가가 풀어놓는 <주력 50년>, 애절한 사모곡인 <어멍
아 어멍아>, 기구한 가족사를 그린 <특별한 도쿄 여행> 등 가슴을 적시
는 글이 산재해 있다. 다 다루지 못해 아쉬운 감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강가로 가자. 작가가 가르쳐준 대로 강둑길을 걸어보자. 서걱대는 갈대
를 보고 바람이 들려주는 말을 들어보자.

 


호병탁  -------------------------------------------------------------
부여 출생. 한국외국어대와 원광대대학원에서 어학‧문학전공(문학박사).
시집: ≪칠산주막≫, 평론집: ≪나비의 궤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