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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6월호, 사색의 창] 소리 속으로 - 홍미영

신아미디어 2012. 6. 21. 18:00

주위에 존재를 알리는 다양한 소리가 모두 우리가 깨어있음을 알려주는군요. 수근거림의 행복을 느껴보세요.

 

 

 

 소리 속으로


   도로변에서 꽤 오래 살았다. 창문을 열 때마다 온갖 세상소리들이 기
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보다 먼저 방을 가득 채우는 소리
의 불청객, 존재를 드러내는 세상 소리 속에 파묻힌다.
   창문을 열어두는 여름철은 특히 심하다. 한밤중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동차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친다. 더 빠른 속력은 짐승의 괴성처럼 날카
롭게 들린다.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끌려간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 정지하려고 용쓰는 바퀴 신음 소리가 섬뜩하다. 연이어 구급차
사이렌 소리라도 들리면 귀가하지 못한 식구에게 핸드폰부터 서둘러 눌
러본다.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소리의 공포, 속력은 벗어날 수 없는 도시
민의 고통이다. 허공은 막무가내로 들어차는 소리의 집이다.
   어릴 적 비오는 날 처마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마루 끝에 앉아 한 방울씩 천천히 잦아드는 소리의 울림이 평화로웠
다. 낙숫물 소리는 나의 친구라도 된 듯 빈집의 적막을 물리치고 시간
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듯했다. 똑똑 느리게 허공을 두드리는 물방울의
여유, 점점 그 소리가 느려지고 마지막 물방울의 둥근 파장이 천천히
우주 속으로 스며들면 뿌연 하늘이 천천히 개고 구름 사이로 한줄기
햇빛이 차오르는 기쁨. 그 오묘한 풍경에 작은 가슴은 풍만과 환희로
출렁거렸다.
   겨울바람은 얇은 문풍지부터 찾아왔다. 바람이 들어오겠다는 기척을
한다. 팔팔 떨면서 바람을 막아 내려고 용쓰는 문풍지는 바람과 힘 겨루
기를 하는 듯했다. 문풍지는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묻고 깊은 잠에 빠진
우리 형제들을 깨우지 말라며 긴긴 겨울밤을 지켜 주었다. 문풍지 소리
가 요란한 날은 작은 창호지 알 유리를 통해 환한 눈세상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눈밭을 종일 휘젓고 다녔다. 문풍지를 비집고 들려오려는 바람
소리는 인간과 공존하고자 하는 친화와 화친의 소리가 아닐까. 문풍지
사이로 들락거리는 맑은 소리길이 아름다웠다.
   가까운 산을 찾는 날은 세상소리는 철꺽 자물쇠로 채운다. 산의 미세
한 소리에 귀 기울인다. 산과 마주하는 내 귀는 더 크게 열리고 산의
소리에 마음을 헹군다. 숲길을 걸을 때는 발밑에 밟히는 자갈 구르는
소리에 어두운 그림자를 지운다. 뽀드득 자갈 부딪히는 내 발걸음 소리
에 잊고 있던 세월이 먼 길 끝에서 달려온다. 가볍고 청량한 숲의 소리에
마음의 문이 열리고 기억은 낮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간다. 산의 적막을
깨는 나뭇가지 툭 부러지는 소리의 소용돌이, 삶의 화두 하나 떠올린다.
떨어진다는 자유로움과 가벼움이 삶의 무거움을 덜어낸다.
   산이 품는 담백한 소리들이 좋다. 산을 깨우는 산사의 풍경 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마음을 맑고 가볍게 한다. 작은 들꽃을 깨우고 미물마저
다독이는 풍경 소리, 가벼운 소리길이 풍경 곁을 떠나지 못한다. 산에는
산만의 맑은 영혼이 있지 싶다. 산이 품는 생명체들의 숨결 속에 산의
혼이 숨을 쉰다. 산 아래 세상은 산이 내쉬는 숨소리에 세상의 잡다한
소리가 걸러지나보다.
   홍류동 계곡 소리길을 걸어 보았다. 단풍은 소리길을 쓰다듬고 계곡
은 천하제일경이라는 말을 데리고 흘러간다. 산의 소리들을 쓰다듬어
폭포의 소리길을 만들고 팔만대장경으로 살아있는 해인사 경 소리를 쓰
다듬어 소와 담을 만든다. 소리길은 천년의 세월을 담은 한자 한자의
경을 새기는 마음과 지혜를 쓰다듬는다. 천년의 마음길이 소리길이 되
어 명상과 침묵, 마음 씻기와 비움으로 함께 가자며 세상 속으로 흘러간
다. 범종 소리와 목탁 소리로 성불하는 바위들은 이끼 낄 새도 없다.
산 아래 세상이 맑아진다.
   어떤 수필가는 삶은 끝없는 수런거림이라고 했다. 살아 있는 것들의
수런거림, 잎들의 수런거림, 댓잎의 수런거림, 물살의 수런거림, 바람이
밀고 가는 것들의 수런거림, 부딪히는 것들의 수런거림, 그 소리 속으로
소리의 길이 한생을 끌고 간다. 부대낌의 소용돌이가 소리의 길이 되어
요동치기도 하고 고요해지기도 한다. 빌딩과 빌딩, 벽과 벽 사이에 끼여
앉는 부대낌과 어울림의 소리들. 허공의 소리로서 매일 새로운 삶을 돋
아나게 한다.
   멀쩡하던 귀에서 소리가 난다. 위험 신호처럼 윙윙거리는 이명 소리
도 아니다. 귀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치료를 해도
잘 낫지 않는다. 귀를 흔들어도 보고 후벼보기도 한다. 빠져나가지 못하
고 부스럭거리기만 하는 소리의 정체가 무엇일까. 내 몸의 이상 신호일
까. 지난 삶의 악다구니 소리들일까. 누군가 속 터져 고함치던 소리일까.
남의 소리에 귀담지 못한 한탄과 한숨의 소리인가, 허술한 나의 행동에
내 잘못을 덮는 사악한 마음의 소리들이 갈아앉지 못하고 달팽이관에
오종종 모여 맴도는 것일 게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맴도는 소리의 길들
을 쓰다듬는다.
   겨울나무들 사이로 거침없이 스쳐가는 소리의 길들, 막힘이 없다. 제
몸의 무게를 털어 바람의 소리길을 내어주는 나무처럼 세상의 궂은 소
리에도 초연해질 수는 없을까. 살아간다는 것은 소리 속에 사는 것이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은 소리를 품는 것이 아닌가. 우주의 소리, 삶의
소리, 생명체의 소리, 자연의 소리, 맑은 소리, 탁한 소리들도 다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길을 열어 둔다. 소리 속에서 생성과 소멸의 길을 짚어
본다.
   밤은 깊어 가는데 축제는 절정에 이른 듯 확성기 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홍미영  ---------------------------------------------------------------------------

2005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