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인연들이 모여서 사람의 마음을 살찌우는거라 생각합니다. 인연을 하나 만들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대청호에 잠긴 꽃 이야기
양승산을 내려와 청남대로 가는 길은 봄맞이 나온 가족들로 흥성인다.
길 양쪽으로 빼곡히 서 있는 벚나무 숲 사이로 꽃비를 맞으며 걷는다.
개구쟁이 소년은 실바람에 사뿐히 춤추고 있는 꽃잎들을 쫓아 밟기에
바쁘다. 호반의 정경은 마치 동화 속에 그리던 꽃동네 같다.
벌써 40여 년 전이다. 저곳 대청호에 잠겨있는 옛 문의 마을에 내가
장가들었을 때에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신록으로 물든 들녘에는
금강의 지류인 오가리 샛강이 햇빛에 반짝이고, 양지 바른 산자락에는
작고 아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루에 서너 번 청주로 오가는
버스가 교통의 전부였다. 나에게는 언제나 고향처럼 포근한 마을이었다.
몇 년이 지나 댐이 건설되고 물이 차오르면서, 마을은 산 중턱으로 옮겨져
현대식으로 조성되었다. 옛날에 비해 모든 것이 편리해졌지만 옛 마을의
정취는 물속에 잠겨 찾을 길이 없다.
충북 청원 문의의 석회암지대에서 ‘두루봉’ 동굴 유적 탐사가 본격적으
로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탐사팀은 고고학적으로 가치 있는
유물 ‧ 유적을 많이 발굴하였는데, ‘이 지역에 산재해 있는 동굴에서는 이미
20여만 년 전에 사람이 살았으며, 이곳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던 동굴 안에
장식용으로 진달래꽃을 따다 놓고 즐겼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했다. 인간
이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원초적인 본능인가 보다. 처음에는 들이나
산에서 자라고 있는 꽃을 자연 그대로 보다가, 차츰 주거 공간에 꽃을
꺾어다 놓고 즐기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뿐만이 아니다. 같은 지역의 또 다른 동굴에서는 약 4만여 년 전에
있었던 장례 유적이 발굴된 것이다. 다섯 살 정도 된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땅을 파고 바닥에 판자 돌을 깔았다. 그 위에 고운 흙을 뿌리고, 주검을
곧게 펴서 얼굴이 하늘을 향하게 눕힌 다음 다시 고운 흙으로 메웠다.
마지막으로 넓적한 판자 돌로 덮어 주었다. 그 주위에서는 국화꽃 가루가
발견되었다.’ 역시 발굴팀이 발표한 내용이다. 나는 호수에 잠겨 봄빛으로
청아하게 단장한 산봉우리를 따라 잠시 그때를 따라가 본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철부지가 어떤 사연으로든 안타깝게 목숨
을 잃었다.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비통한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그의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동굴 사람들은
정성스럽게 그들 나름의 장례를 준비하였다. 이별을 앞두고 어린 넋을 위로
하는 진혼제 같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장정들은 구덩이를 파고, 행여 다칠세
라 어린 주검을 마무리하면서 눈물과 함께 국화꽃을 뿌렸다. 그의 어머니와
동굴 사람들은 못다 한 이승의 짧은 만남을 애석해하며 동굴을 떠났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어떤 모습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든 아주 먼 옛날에 대청호 주변의 동굴
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의 고고학적 의미를 규명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꽃을 일상생활에 활용할 줄 아는 정서
를 가진 사람들이 일찍부터 이 지역에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때
에 천문의 이치를 알았고, 미숙하나마 천지의 음양을 따랐다. 어떤 의미에
서는 현대인보다 더 정중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들은 죽음을 단순히
생물적인 수명의 마감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있을 수도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염원하였는지 모른다.
우리는 선진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을 발전시키고 공산품을 수출하여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전환되면서 사람들
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이 변하여, 대대로 지켜왔던 감성적인 많은 문화 요소들
이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제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얼마나 더 행복해졌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과학의 발달이 생활을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고, 머지않아 인간을 각종
질병에서 해방시켜 장수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한다. 인간도 어떤 목적에
맞게 설계되어 공산품을 찍어내듯 맞춤형으로 양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공상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행복한 미래가
올 것이라는 희망보다는 감성이 메마른 로봇 같은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지
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앞서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청남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춘제로 발길을 돌렸
다. 한창 무르익은 꽃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흥겨워한다.
진달래꽃을 꺾어다 자기 주변을 장식했던 사람들, 국화꽃을 따다 뿌리며
어린 영혼을 달래주던 동굴 사람들, 지금은 대청호에 잠겨 사라진 오가리 샛강
의 꽃동네, 언제나 감성의 기운이 넘쳐나 훈훈한 정이 있었다. 어쩌면 이곳은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맥을 이어오는 곳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석양빛에 대청호가 반짝인다. 몇 만 년의 세월을 넘어 아련하게 나타났
다 사라지는 ‘두루봉 사람들’의 환상을 뒤로하고 꽃잔치를 떠났다. 그들은
진정 꽃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신규 -------------------------------------------------------------------------------
2009년 ≪수필과비평≫ 등단.
한국문인협회, 우암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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