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부디 명복을 누리세요. 생전에 미운 짓만 했던 아들이 이렇게 두 손 모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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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모庶母님 영전靈前에 / 고 춘
어머니!
제가 서모庶母님을 만난 뒤 처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불러보는 호칭이군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가 서모님께 잘못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호칭을 바꾼 거예요.
어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오셔서 무불간섭으로 집안일에 참견하여 항상 집안을 시끄럽게 했던 건, 뭐든 보고 듣는 대로 내뱉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어머니의 타고난 외향적 기질 때문이지, 겉에 드러나지 않은 속마음은 여리고 가냘픈 분이었다는 걸 제가 이제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그 외향성은 내 어머니 자격으론 큰 결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모자는 거의 매사에 부딪쳤던 게지요. 어머니가 겉은 저래도 마음은 그렇잖은 분이라는 걸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알아차릴 만한 계제도 많았는데 말입니다.
어머니는 유별나게도 우뭇가사리로 만든 우무寒天채를 좋아하셨지요. 우무채를 사먹으려면 어머니가 기거했던 양림동이나 백운동에서 족히 오리五里길이나 되는 광주천변 공설시장까지 나와야 했는데, 어머니는 그런 걸 사먹으러 혼자 나가기가 식구들 보기 거북했던지, 꼭 날 앞세우고서 당신은 두 사발 난 한 사발, 그렇게 사먹었지요. 그럴 때 왜 어머니의 여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그런 철부지였으니 보기 드믄 외향성인 어머니와 사사건건 부딪혔을 밖에요.
하지만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자식 명색이 어머니에게 번번이 대들고 맞서 싸운 건 어떤 말로도 발명할 수 없는 잘못이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각설하고 이야기를 바꿔볼게요.
비록 큰 병중이었다 해도 본처가 엄연히 있는데, 그 본처의 눈앞에 또 다른 여인을 맞아들여 병들어 누워 있는 조강지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어린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건 아버지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내 눈에 보인 아버지는 여탐女貪이 많은 분이었어요. 아니 색탐色貪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이없게도 엉뚱한 핑계를 끌어다 대시더라고요. 당시 아홉 살도 채 안 된 나의 양육을 형수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병든 시어머니 수발들기도 버거운 형수라나요! 어린 나를 돌보려면 건강한 서모가 필요하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시앗으로 들인 것입니다. 양림동 집 가까운 곳에 셋방을 얻어 어머니를 거기서 기거하게 하고, 밤이면 나를 업고 그곳에 드나들며 주무셨지요. 백운동 셋방에 드나든 기억도 있습니다. 양림동에서 백운동에 가려면 경사가 만만찮은 제중원濟衆院(서양인 병원)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기운도 좋으셨어요. 아홉 살이 다 된 나를 업고서 거뜬히 그 고개를 오르내리셨으니 말입니다. 병석에서 그 모양을 바라보는 본처 마음을 한번이라도 헤아려보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의 생모 마음에선 그때 아버지 등에 업혀 시앗의 셋방에 드나드는 나에 대한 저주가 싹텄던 것 같아요. 만 열 살에 그 생모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꿈에 그분이 현몽하신 다음날엔 반드시 내게 재앙이 뒤따랐으니까요. 해방풍解放風이라고 불렸던 1945년 7월 달이던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불었던 태풍에 교실 창문이 날아와, 깨진 유리조각이 내 오른쪽 눈썹을 갈라놓았을 때도 전날밤 꿈에 생모의 모습이 보였어요. 내가 환갑을 넘긴 뒤에까지도 잊을 만하면 그런 일이 계속됐었지요. 그러다가 칠순팔순 다 넘긴 요즘엔 그분의 현몽이 없어졌답니다. 짐작에 미우면 시앗을 본 지아비가 밉지, 죄 없는 저 아이 꿈에 나타나 매번 재앙을 내리는 건 내게 대한 가혹한 복수라고 생각한 거겠죠?
어머니! 어머니는 갓난애들 돌보아 키우는 데에 참으로 탁월한 재간을 지니셨어요. 그래서 그 외향적 결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시앗 노릇과 우리 형제들의 어머니 노릇을 무난히 해내신 겁니다. 큰형의 7남매와 작은형의 3남매. 자그마치 열이나 되는 손자들이 모두 어머니 손에서 잔뼈가 굵었으니, 어머니 애보기 재주는 하늘이 내린 재능인 것 같아요. 어머니의 둘째 손자 홍석이 안양 제 집에서 할머니를 모실 때에는 윤강 영명 예강 등 증손자들조차 제 어미 뱃속에서 나오기 무섭게 다 어머니 차지였지요. 그러니 어머니는 손자 10남매 증손자 3남매, 도합 무려 열셋이나 되는 우리 집 아이들을 키워내신 겁니다.
아들며느리 손자 할 것 없이, 어머니가 친 혈손같이 아이들을 맡아 길러주시는 고마움 때문에 어머니의 결점을 다 눈감아 버리는데, 그런 속내를 전혀 모르는 숙맥인 저만 어머니에게 바락바락 대들었으니, 집안에서 제가 얼마나 미운 털이었겠습니까!
애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 궂은일을 다 맡아 하셨으니, 어머니가 우리 집안에 베푼 공이 참으로 크십니다.
뒷날 내가 우리 고가高哥네 종중산에 약천할아버지 이래 4대에 걸친 묘역을 만들어 스물두 분의 선영을 모두 그곳으로 면례할 때, 나는 처음에 어머니는 서모니까 묘역 밖 오른쪽 언덕바지에 따로 묻어드리려 했어요. 그러다가 이내 생각을 바꿔 아버지의 합폄유택 바로 옆에 모시게 된 것도, 우리 집안을 위하여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의 공로를 생각한 겁니다. 그래선 안 된다는 큰형수 권유도 있었고요.
오늘부터 번듯한 내 어머니가 되신 서모님!
제가 여수여고에 발령받아서 여수에 내려가 따로 살 때, 어머니는 손녀 을미乙美를 데리고 제게 두 번이나 다녀가셨습니다. 한 번은 제 처가 만삭일 때 해산 수발하러 내려오셨다가 그만 그 아이가 잘못되는 바람에 그 뒤치다꺼리까지 다 하고 가셨습니다. 그렇듯 집안의 궂은일은 도맡아 하신 어머니! 고맙습니다. 다시 한 번 엎드려 뒤늦은 용서를 빕니다.
어머니, 부디 명복을 누리세요. 생전에 미운 짓만 했던 아들이 이렇게 두 손 모아 빕니다.
고 춘 님은 수필가. 《좋은수필》 등단. 수필집: 《억이야 떡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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