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로 입문했으니 명작을 남기고 싶은가. 후손이 자랑스러워할 이름자를 얻고자 하는 건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는데 문학 창작에 투신한 사람이야 더 물을 게 있을까. 어차피 이루기 어렵겠지만 꿈이라도 꾸면서 살아보는 것. 그만이라도 품고 때로는 어설픈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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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 방민方旻
수필 쓰기 시작한 지 오년이 넘는다. 발간한 수필집도 여러 권, 활자로 치장하여 얼굴 내민 글도 백여 편이다. 이만큼 수필을 발표했으니 명작을 썼거나 쓸 때도 되었다 하면 생각만큼 후세에도 독자에게 사랑받을 명품으로 남을 글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문학 평가 기준은 오리무중이다. 당대 이념과 사회 세태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더하여 문학 취향은 너무도 다양하니 들쑥날쑥 천차만별이라 부를 만큼 많고도 많다. 제대로 꼽아보자면 사람 수만큼, 아니 작품 수만큼 명작 기준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수필 쓰기 전부터, 수필가로 나름 행세하는 지금까지 많은 수필을 보았고 또 계속 읽을 거다. 글을 대하며 마음에 담았던 명작은 그때마다 달랐다. 청소년기에 만났던 글과 성년기에 보았던 수필, 창작을 하게 되면서 읽은 작품이 따로따로다. 좋은 작품으로 각인되었던 글을 뒤에 다시 보면 그때와는 다른 평가가 매겨진다. 학생 답안지 점수가 식사 전후에 달라 앉은 자리에서 다 봐야한다던 지론을 지키던 어느 교수처럼, 언제 어떤 심정에서 읽었는가에 따라 명작 평가는 다르다.
몇 해 전부터 야구 경기를 즐겨본다. 야구 글도 발표했을 정도로 꽤 좋아한다. 운동장에서 직접 관람하기보다 티브이 중계방송을 보며 혼자만 조용하게 즐기는 방식을 선호한다. 한두 번 운동장에 가보기도 했지만 취향에 잘 맞지 않아서다. 그곳에 가 응원하는 열기를 느끼며 한 자리 차지할 만큼 행동적 열정이 없기 때문일지 모른다. 전문가 해설과 느린 장면의 화면이 더욱 편하면서도 구체적이라서 더 좋아한다.
야구 선수는 포지션에 따라 실력 정도를 재는 기준이 제각각이다. 타자는 타율, 투수는 승률이 대표적이고, 그밖에 세부 기준도 여럿이어서 꽤 객관적 수치를 제공한다. 대략 실력을 가늠할 때 타자는 몇 번이나 타석에서 배트를 휘둘러 공을 제대로 맞춰 베이스에 도달했는지를 따진다. 투수는 마운드에 올라서 소속팀을 몇 차례 승리하게 했는가를 따지는데, 아주 쉽게 우열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을 만하다.
야구 선수 실력 평가 잣대를 수필 명작 기준에 적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신체 활동인 운동과 정신 작용인 작품 창작을 대조하여 기준을 맞추는 게 합당한 기준인가 따진다면 뾰족한 대답을 낼 수는 분명 없다. 하지만 나만의 명작 기준을 하나 세우고 거기에 맞추어 노력한다면 설사 잘못된 기준일지라도 위약 효과를 볼 수 있으면 마다할 이유는 없겠다. 그렇게라도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든 막대를 쓰든 달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 텐가.
야구 타자 기준에 맞추어보면 한국 프로 야구 톱클래스 타율은 3할 대다. 간혹 시즌 중에는 4할 대가 나오기는 하지만 최종 결과는 3할 대에 머문다. 3할 대를 연중 기록하거나 생애 통산 기록을 보유하면 최고 선수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그런 우수 선수는 연봉도 꽤 높게 챙길 수 있고 각 팀 대표 타자로 명성을 유지하면서 인기도 높아 성공한 선수라 할 만하다. 이걸 수필에 적용하면 열 편쯤 발표해 세 편 정도가 읽을 만한 글, 소위 명작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이 기준은 작가 자신의 평이 아니라 독자나 평론가가 인정해야 한다는 면에서만 그렇다.
이 기준으로 내 작품을 적용하면 100여 편 이상을 발표하였으니 대략 30여 편이 기준에 들어맞아야 한다. 얼핏 따져 보아도 이걸 충족하기에는 그야말로 어림 반푼도 없다. 30여 편은커녕 그 3할인 10여 편도 못 미친다. 도대체 편수를 따지지 말고 ‘수필가 방민'하면 떠올리는 작품이나 있는지, 아니면 방 아무개가 수필가인 것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턱도 없는 얘기다.
명작 쓸 능력은 안 되면서 그걸 이루고자 노력하기는커녕, 불가능한 기준을 만들어 놓고 어쩌자는 것인가. 글 쓸 거리가 그토록 없어서 현실에 존재 불가한 가상 상황에 빠져 드는 건 아닌가. 괜한 헛짓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명작 기준이 어떻고 그 비율이 어떤지 따지기 전에, 명작을 쓰겠다는 헛된 욕망을 내려놓는 게 더 현실성이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수필가로 입문했으니 명작을 남기고 싶은가. 후손이 자랑스러워할 이름자를 얻고자 하는 건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는데 문학 창작에 투신한 사람이야 더 물을 게 있을까. 어차피 이루기 어렵겠지만 꿈이라도 꾸면서 살아보는 것. 그만이라도 품고 때로는 어설픈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지 않을까.
방민 님은 《에세이문학》 등단. 저서: 《방교수, 스님이 되다》, 《미녀는 하이힐을》, 《용서의 언덕 너머-카미노 데 산티아고》, 《수필, 제대로 쓰려면》, 《수필, 이렇게 써보자》, 《삶을 길에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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