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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1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그날 밤 - 박영자

신아미디어 2019. 4. 29. 14:18

"작은 잎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손바닥에 쥐고 세기로 했다. 정확한 답이 손바닥 위에서 증거로 남았다. 단순해지는 삶이다. 이제부터 나의 삶은 단순한 삶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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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    박영자 


   자정을 넘긴 시간, 누군가 나를 침대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몽롱한 의식으로 꿈을 꾸는 듯하고, 부딪친 몸의 통증을 느끼니 현실 같기도 했다. 꿈과 현실을 오가면서 ‘이게 아닌데……’ 희미한 의식으로 확실한 분별을 가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의식은 있었지만 누가 나를 밀어냈느냐고 묻거나 생각할 겨를 없이 엉금엉금 기어 침대로 올라가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또다시 거센 팔뚝이 초월적인 힘으로 한방에 나를 밀어뜨렸다. 그제야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닫고 일어나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포복을 하며 자연발생적으로 더럽혀진 몸을 씻기 위해 목욕탕으로 기어들어가 샤워기를 잡으려는 순간 앞으로 다시 고꾸라지며 나의 행동은 본능에서만 움직이고 있었다.
   남편 방으로 기어가 도움을 청하는 순간부터 부부의 예의나 도덕적 미덕은 내 몸에서 떠났다. 살려달라며 애원하듯 남편을 흔들었다. 80을 넘겼으니 이제는 부부의 예의는 잊을 만한 나이도 되었지만 남편을 하늘이라 여겼던 습관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아내로서의 체면은 무너졌고 몽롱한 의식 속에서 본능적으로 “빙원! 빙원! 가” 헛손질을 하며 옷을 갈아입으려다 다시 나뒹굴렀다. 119를 부르는 남편의 당황한 목소리를 메아리처럼 들으며 나의 의식은 사라져갔다.
   그런 와중에도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더 따뜻한 웃음으로 어머니가 내 머리를 짚어 주었고 이탈리아의 화가 키도레니가 그린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이 스쳐 지나갔다. 교회도 가지 않는 내게 왜 그리스도의 환영이 보였으며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오가는 상황에서 왜 나는 어머니의 환영이 보였을까.
   운수업을 경영하면서 그날그날 들어오는 현금을 엄지손가락으로 침을 발라가며 세던 어머니는 자식들의 학자금과 미래의 삶을 저축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늘 단호하고 냉엄해 결혼을 한 후에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쓰러진 내 이마를 짚으며 말없이 미소 짓던 모습은 예전과 너무도 달랐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83퍼센트의 행복함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9퍼센트의 혐오감과 6퍼센트의 두려움 2퍼센트의 분노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의식을 잃어가며 만났던 어머니의 미소는 내재된 비밀이 감추어 있었던가. 하지만 그날의 어머니의 미소는 과학적 근거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미소를 닮아 있었다.
   주위에는 무서운 것 투성이어서 나는 변변히 맞서 보지도 못하고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채 앞만 보고 달렸다. 모자람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식들에게까지 오류를 범했던 날들을 죄책감으로 느낀다. 열등의식, 자격지심, 용기 없음을 안고 지내온 오만함과 더불어 모자람까지도 새롭게 받아들이며 거듭나려 했던 잠재의식 때문이었을까? 병실에 누워 곰곰이 그날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본다.
   굵은 남자의 팔뚝이 느닷없이 나를 밀어냈던 일,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의 환영, 모나리자의 미소를 닮은 어머니의 얼굴,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버릇처럼 내뱉었던 가벼운 말 한 마디가 내 입을 떠나면서 상반된 것임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경각에 달린 죽음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서 지병처럼 소화기관이 아프다며 ‘죽으면 죽으리라’ 뱉어낸 언어가 얼마나 오만한가를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죽음을 하찮게 보며 죽으면 죽으리라 하던 오만함은 간데없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였던 가는 기억이 없고 오직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만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후배(정경)가 떠오르고 중국을 10여 차례나 우리를 인솔해 주었던 허세욱 선생님, 이응백 선생님, 윤모촌 선생……. 선생님과 선후배는 떠오르는데 글씨와 숫자 개념은 쓸 수도 계산할 수도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뇌신경은 검게 퇴색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온전한 뇌가 도와 줄 수 있으니 시간을 놓치지 말고 공부를 하면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죽음을 남의 말처럼 쉽게 입 밖으로 뱉어냈던 나. 죽고 싶다는 마음은 간데없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집념만이 일어났다. 어차피 유한의 삶을 꾸리다가 덧없이 가는 게 인생이라면 한 맺힌 멍울만 가슴에 응어리로 남겨 놓고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안의 관찰자까지 모두 만나 남은 삶의 평온함과 침착함으로 죽음을 맞고 싶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하며 삶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죽음을 공부해야 한다는 철학자들의 말을 듣는다. 환영을 잡듯이 빛을 잃어가면서도 빛을 잡으려는 안타까움이 내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큰 아들이 “어머니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일학년 초등학생 교본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어찌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 시거든 떫지나 말아야 할 일이다. 채점은 처음부터 할 수가 없다. 1+2를 왜 합해야 되는가. 숫자의 개념을 만들어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가 없었다. 좋은 점수가 나올 리 없다. 채점을 포기하고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수의 개념이 싹을 틔웠다.
   세계의 으뜸인 잊어버린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다. 가갸거겨……. 소리를 내며 읽으라는 의사의 권고를 듣지만 혀가 겹쳐 발음이 뜻과 다르게 읽혀진다. 죽음을 당했다면 무서운 줄도 괴로운 줄도 즐거운 줄도 알지 못했을 것 아닌가. 뒤에 것은 생각지 말고 앞의 일은 미리 생각지 않고 현재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시작한다.
   눈을 뜨면 딸이 주고 간 예삐와 함께 공원을 나선다. 그 녀석도 할미가 뇌경색으로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함께 있어준다, 이 병에 걸리면 대부분 걸음이 불편하다. 불행 중 다행이다던가. 어눌해도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게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트위스트 머신을 200번 돌린다. 발 구루기 200번, 허리 돌리기 200번, 팔 굽혀 펴기 60번, 걷기 20분을 끝내면 예삐는 저를 두고 떠날까 봐 내가 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바라본다. 20분을 걸으면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하나에서 열까지는 온전히 세는데 20에서 30을 넘어갈 때는 다음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20으로 세었는지 30십으로 넘어 가려는 것 인지, 10자리씩 넘어갈 때마다 뒷자리가 떠오르지 않아 때로는 가슴을 두드린다. 150m를 돌며 한 나무를 돌면 목표 지점이 된다. 시작한 한 바퀴를 기억하기 위해 명심을 한다. 한 바퀴 두 바퀴……. 처음 시작이 숫자부터 시작한 것인지 숫자 없이 돌고 난 뒤의 수의 개념이었지 여섯 바퀴를 돌고 나면 앞의 숫자와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수가 모두 사라지고 만다. 공원에서 비몽을 잡듯이 앉아 생각에 잠긴다. 예전에 나는 공원 의자에 앉으면 좋은 대목의 수필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사치스러운 생각이다.
   작은 잎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손바닥에 쥐고 세기로 했다. 정확한 답이 손바닥 위에서 증거로 남았다. 단순해지는 삶이다. 이제부터 나의 삶은 단순한 삶의 시작이다.



박영자 님은 수필가. 《에세이문학》 등단, 수필집 : 《한 장의 흑백사진》, 《앞산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