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고인 허상을 씻어내기 위해 야관문주 한 모금 넘긴다. 남편의 정성이 닿았던 것일까, 발의 통증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술잔 속에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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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관문주夜關門酒에 끌리다 / 이동이
눈雪에 흠뻑 젖은 마음이 춥다. 속을 데우기 위해 마땅한 것을 찾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몇 년 전에 담가두었던 야관문주가 눈에 띈다.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톡 쏘는 맛과 감미로운 향이 온 몸에 퍼진다. 잠시 후면 육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잠자던 오감마저도 일제히 깨어나리라.
오전에 갑자기 내린 함박눈에 갇혔다. 실낱같이 가벼이 내려 이리저리 흩날리고 말 줄 알았다. 차츰 눈송이가 커져 발등을 적시더니 한두 시간 만에 소복이 쌓였다. 외출하려다 만난 뜻밖의 눈에 마음이 설렜다. 불현듯 마음 내키는 아무 곳에나 달려가고 싶었다. 창 넓은 찻집도 괜찮고, 파도 부서지는 해변을 거닐면 더욱 좋겠다. 혼자보다는 함께이고 싶어 눈앞에 펼쳐진 설경을 동영상에 담아 지인들 카톡에 날렸다. 답을 기다리는 눈 위에 발자국을 새겼다.
“나이가 몇인데 눈이 오면 아직도 그렇게 설레나요. 당신 띠랑 묘하게 맞네요.”
귓전을 울리는 익숙한 소리에 뒤돌아보니 눈바람만 차다. 옆지기의 환청이다. 어떤 일에도 동조를 해 주던 사람. 격려와 용기로 자존을 세워주던 다정했던 사람. 이젠 그 음성마저 들을 수 없으니 현실이 냉혹할 뿐이다.
심상찮게 내리던 눈은 일탈하고 싶던 내 작은 바람마저도 주저 없이 덮어버렸다. 갑작스런 적설량으로 마산 창원간의 교통이 마비되었다. 제설작업을 하려면 한나절은 족히 걸리니 부푼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축축한 겉옷에 매달린 공허함을 털어내며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다시 들어선 것이다.
야관문주의 효력은 금방 나타났다.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냉기를 쭉 뽑아낸 듯 후끈후끈 속이 달아올랐다. 설레던 감정들이 누그러지면서 안정이 되었다. 느긋한 마음이 되어 행하지 못한 일들에 관대해졌다. 혹여 잘못을 저지른 이가 용서를 구한다면 도리어 내 잘못이라며 따뜻한 포옹으로 화해를 구하겠다. 술이 마법이라도 부린 듯 선한 마음이 된다.
오래전부터 제철에 나는 과실로 술 담는 것을 좋아했다. 한 잔을 마시면 한 말을 마신 듯 얼굴이 불콰해지는 남편은 술과 거리가 멀었다.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면서도 술 담그는 일은 만류하지 않았다. 한 잔의 술기운으로 천군만마를 얻는 내 기분을 맞춰주려는 것이다. 굳이 마시기 위해서보다는 숙성되면 우러나는 빛깔과 향이 좋아 무턱대고 담갔다.
관절에 좋다는 돌복숭아를 비롯하여 매실, 살구, 석류, 보리수뿐만 아니라 솔잎도 솔방울도 약이 된다 하여 담갔다. 와송이나 더덕, 산삼은 기본이었다. 그 중에 비수리라 불리는 식물 야관문은 귀한 약초라며 삼년 전 남편이 구해 왔다. 술이라곤 거들떠도 안보더니 야관문에는 관심을 보였다.
오랫동안 시린 발 때문에 여러 곳의 병원을 다니며 많은 약을 먹었고 통증클리닉도 다녔다. 침도 수차례 맞았으나 발의 통증은 그치지를 않았다. 아내를 위해 노심초사 애쓰다가 나와 같은 증상에 좋다며 구해온 것이다.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 여기면서도 한잔씩 마시다보면 어느 틈에 나을 거라는 남편의 굳건한 의지가 나보다도 강렬했기에 믿기로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남성의 양기를 북돋워주어 부부 사랑에 효험이 있다고 했다. 직접 담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짓던 그의 심중을 그제야 알 듯했다.
야관문주는 맛과 향이 특별하다. 싱그러운 향의 깊고도 진한 맛, 부드럽게 넘어가는 느낌이 양주 중 발렌타인 맛과 흡사했다. 남성들에게 좋은 술이라는 말과는 상관없이 내 취향을 저격하는 향에다가 남편의 애정이 담겨 있기에 가끔 찾는다.
술의 성분은 물이지만 속성은 불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도 알코올을 '타오르는 물'이라 했다. 술은 나약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주기도 한다. 때로는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약손이다. 그러고 보면 술을 합법적인 마약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요즈음 밤을 꼬박 지새우는 일이 잦다. 100부터 숫자를 거꾸로 세기도 하고 자기 최면을 걸어보기도 하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문득 수면제로 불면의 고통을 견딘다는 지인이 이해가 된다. 나는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허물어졌다. 그렇다고 약으로 잠을 청하고 싶지 않으니 아침이 되면 정신이 맑지 않다. 그럴 땐 술 한모금의 처방에 기대고 싶어진다. 혹여 의존이 습관이 될까봐 주의하면서, 반주도 약이 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품위 있게 마시면 어떨까.
여태 가능할 것이라 믿어온 일들이 모호하다. 세상일이 어찌 뜻대로 될 수 있으랴.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내일도 안주하는 둥지가 탄탄해야만 하기에 흔들리지 않으려 바짝 긴장한다. 한낱 부질없는 꿈일지라도 손끝이 닿을 수 없는 존재들을 탐하고 있으니 이 욕심을 어찌 잠재울까.
가슴에 고인 허상을 씻어내기 위해 야관문주 한 모금 넘긴다. 남편의 정성이 닿았던 것일까, 발의 통증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술잔 속에 눈이 내린다.
이동이 님은 1991년 《경남문학》, 2000년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집: 《바람개비의 갈망》 《머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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