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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1월호, 신작수필23인선 I 옮겨심기 - 김민숙

신아미디어 2019. 4. 26. 10:02

"사름한 벼들이 꼿꼿이 일어서고 작열하는 햇빛과 폭풍우, 병충해를 이기고 푸른 세상을 만들어 내던 모들이 경이로웠다. 깊어진 가을, 마침내 이룬 황금 들판. 배부르다. 지난여름, 온 나라를 괴롭혔던 폭염도 점점 잊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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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겨심기           /    김민숙 


   추석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높아져 가던 하늘이 바람길을 놓쳤는지 며칠째 장마철에나 내릴 법한 폭우를 쏟는다. 지난여름에는 가마솥처럼 세상을 달구더니 이 가을에 무슨 어깃장인가. 절기를 거스르는 날씨를 나무란다.
   오전 10시, 으슬으슬 춥다. 커피를 내려놓고 식탁에 앉아 멍하다. 마주 보이는 벽에 걸린 열다섯 명의 가족과 눈을 맞춘다. 남편과 나를 중심으로 왼편에 셋째, 둘째네 가족, 오른편에 첫째네 가족과 막내가 앞 뒷줄로 나누어 균형을 잡았다. 반갑다. 바라만 보아도 포만감이 든다.
   이쪽, 저쪽 바쁘게 눈 맞춤을 하는데도 어딘가 허전하다. 지난주에 막내가 집을 떠났다. 10년째다. 그는 스스로를 유학민이라 한다. 가방 두 개 밀고 현관을 나서면 다음 발길 닫는 학교 기숙사가 제집이다. 대학을 다니느라 서울 이문동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느라 강원도 양구에서, 복수 학위와 석사 과정을 이수하느라 미국 동부 델라웨어와 보스턴에서 살았다. 다시 서울에서 1년을 일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겼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할 참이다. 겉으로야, 처음도 아니고 이제 홀로 설 나이도 되었다고 태연한 척했지만 어미는 늘 처음처럼 가슴이 울렁거린다.
   보는 것으로는 모자란다. 벽에 걸린 액자를 식탁 위로 내린다. 점검하듯 짚어가며 얼굴을 들여다보고 눈을 맞추노라니 멀쩡하던 얼굴이 겹쳐 보이다가 둘로 나뉘어 보인다. 자꾸 눈을 비빈다. 내가 왜 이러나. 종일 거실을 서성이며 손자 타령을 하는 구순 시어머니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내가 한심하다. 딸 셋에 아들 하나, 사위와 손주까지 열세 명을 그러안고도 허전하다면 욕심이 과한 게다. 식은 커피를 마시며 우학스님의 천일 수행일기 <도고마성>을 펼친다.


11월 19일
   웬만하면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것이 좋다. 수일 전 추위를 생각하여 비닐봉지를 씌웠던 나팔꽃, 양배추, 개미딸기를 살펴보니 밖에 노출되어 있을 때보다 더 기진맥진해 있다. 관찰해보니 비닐봉지를 씌우지 않은 것들이 더 싱싱하다. 보호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본다.


12월 1일
   작물은 ‘옮겨심기’를 해야 한다. 터앝에 늦게 씨를 뿌린 양배추를 보니까 꼭 그러하다. 옮겨 심은 양배추는 제법 모양이 잡혔는데 옮겨 심지 않은 양배추는 그렇지 못하다. 인간의 성공에서도 ‘옮겨 살기’가 꼭 필요한 것 같다. ‘옮겨심기’ ‘옮겨 살기’는 존재를 튼튼하게 한다.


   읽기에 속도가 붙는다. 지난해 들여놓고 그냥 책꽂이에 쌓아 두었던 책이다. 오늘, 무심히 뽑아 들고 나왔는데 구절구절 가슴으로 들어오는 말씀이다. 그렇다. 막내는 지금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 학교와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모든 식물이 다 옮겨 심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이가 다 옮겨 살아야 성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스님의 일기가 막내를 위한 격려사 같아서 큰 위로가 된다. 묘목이나 모종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하여 자리를 바꾸어 심는 것이 옮겨심기다. 막내는 옮겨 살기를 하는 중이다.
   며칠 운동도 하지 못했다. 핑계는 비 때문이었지만 실상은 막내의 전화를 기다리느라고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게다. 떠날 때 LA에 사는 육촌동생한테 마중을 부탁하지 않은 일이 후회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잘한 일이다. 낯선 도시에서 이삿짐을 들고 공항 셔틀버스로 기숙사까지 찾아갔으니 뿌리가 한 발 더 깊이 땅속으로 내려갔을 터이다.
   삽자루 하나 들고 새벽마다 논물을 보러 나가시던 할아버지의 발소리가 그리운 날이다. 새참을 나르는 어머니를 따라 나서 바라본 모심던 날의 풍경이 아스라하다. 오십여 년도 더 지난 일이다. 모심기가 끝난 논에서,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배슬배슬하던 어린 모를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을 이제 알 것도 같다. 사름한 벼들이 꼿꼿이 일어서고 작열하는 햇빛과 폭풍우, 병충해를 이기고 푸른 세상을 만들어 내던 모들이 경이로웠다. 깊어진 가을, 마침내 이룬 황금 들판. 배부르다. 지난여름, 온 나라를 괴롭혔던 폭염도 점점 잊혀간다.



김민숙 님은 2005년 《계간수필》로 등단, 수필집: 《어릿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