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앓느라 올봄은 격렬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꽃밭 맨 앞줄 중심에 서 본다. 곧 뜨거운 여름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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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 / 황미연
몸을 낮춘다. 겸손한 무릎으로 앉아 꽃무더기 속으로 얼굴을 묻어본다. 누군가의 발걸음에 짓밟혔을까. 초록 진물이 흘러내리는 뭉개진 꽃대에서 꽃 한 송이가 울고 있다.
걷다가 발을 접질렸다. 순간 찌익 소리를 내면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암시했다. 발등이 땅에 닿도록 무슨 생각을 하고 걸었을까. 결국 깁스를 했다. 당분간 발을 딛지 말고 외출도 자제하라는 다짐도 받았다. 깁스한 왼발과 멀쩡한 오른발의 높이 차이는 고작 몇 센티도 안 되는데 걸을 때마다 몸은 엄청나게 기울어진다. 절룩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몸 안에서는 스멀스멀 불안꽃이 피어난다. 무단히 아파서 수개월 동안 애먹었던 발이다. 겨우 걸을 만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담담하게 걸을 수 없을까 봐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지인이 떠올랐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완전하지 못하며 한꺼번에 많이 걸을 수도 없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칩거하다시피 했다. 발을 많이 디디면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기어 다녀서 무릎이 다 까질 정도였다. 그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혹여 내게 온 당분간도 잠시가 될지, 오래가 될지 몰라 무서웠다. 난데없이 수십 마리의 매미 울음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뇌를 파고들었다. 잠재울 수 없는 불안함과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밖은 꽃 천지다. 자유롭게 드나들던 문에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것들이 수런거렸다. 작약이 함박웃음으로 현관문을 두드려도 불편한 현실이 몸을 굼뜨게 한다. 저녁마다 들성지에서 만나던 바람과 수초 위로 내려와 놀다 가던 달빛도 볼 수 없다. 도서관을 오가며 걷던 천변의 물소리도 들을 수 없다. 쓰나미처럼 밀려온 우울이 몸에 있는 단단함을 모두 쓸어가 버렸다. 기운을 차려 보려고 해도 몸은 바닥에서 일어나지를 않는다. 넓은 사막에 점점이 박혀 있는 모래처럼 적막하고 외롭다. 뜨거운 모래사막을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도 이런 기분일까. 입 안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가시풀을 씹어삼키며 외로움을 이기는 걸까.
내가 없어도 바깥세상은 잘 돌아간다. 자신의 부재가 느껴진다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늘 뒷줄 한 모퉁이에 서서 앞사람에게 얼굴이 반쯤 가려진 채 사진을 찍던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서 활짝 웃지 못하고 어정쩡하던 자신이었다. 혼자보다 사람들의 틈에 끼어 달콤한 머시멜로를 즐겨 먹었다면 덜 외로웠을까. 종일 문자 한 통 없는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수백 개의 전화번호가 저장된 연락처는 열어보지 않는다. 섬이 되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도, 추스르고 단단해져야 하는 것도 결국 내 몫이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밀려온 쓸쓸함을 데리고 절룩거리며 공원으로 나왔다. 금계국이 환상인 꽃밭 속으로 들어가 우두커니 앉았다. 햇살이 슬어놓은 알들이 꽃 속에서 톡톡 터져 나오며 노란 꽃가루를 뿌려댄다. 꽃가루를 흠뻑 뒤집어쓴 채 꽃인 척하고 있는데, 서너 살은 됨직한 계집아이가 삑삑 소리 나는 신발을 신고 내 앞을 지나갔다. 애호박만한 머리에서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저만큼 가다가 휙 돌아서서는 나를 보고 생긋이 웃는다. 아이의 눈을 마주보며 나도 따라 웃으면서 치맛자락으로 슬며시 깁스한 발을 감췄다. 눈언저리가 뜨거워지면서 왠지 부끄러움이 솟아올랐다.
지금 내 안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뭉클함도 부끄러움도 담지 못할 정도라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비워야 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독을 즐기며 가끔은 고립감을 원하기도 했던 자신이다. 평생 불편한 몸으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깟 발 좀 다친 것은 대수도 아니다. 그런 게 삶이 아니겠느냐고 마음 한 자락을 펼쳐 위로해본다. 팽창된 감정 주머니를 열자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내면의 소리들이 엉엉거리며 쏟아져 나온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공원 한 편 축구장에서는 사람들이 햇볕을 입고 공몰이에 한창이다. 서로 공을 차지하려는 다리의 근육질에서 푸른 언어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송어처럼 펄떡거린다. 인조 잔디 위에서 꺾였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는 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눈이 부신다. 그 기운이 보랏빛 갈퀴덩굴의 넌출을 따라 이만큼 왔을까. 좀처럼 마르지 않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뜨거움이 공기처럼 새어나와 온몸을 휘감는다.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렁거리자 깁스한 발이 움찔거린다. 꽃과 나무와 사람들이 어우러진 풍경 안에는 뜨겁지 않은 것이 없다. 넘어져도 두려움을 모르고, 웃으며 다시 일어서는 저 모습이 가슴을 뛰게 한다.
불투명한 시간 앞에서는 희망보다 절망이 더 크게 느껴지기 마련일까. 나는 겁이 많은 원시인의 유전자를 타고났는지 두려웠다. 아무리 유전자 안에는 위험에 쉽게 반응하는 태도가 저장되어 있다고 하지만 겨우 아문 자리에 또다시 상처가 나고 보니 은근히 겁이 났다. 겁이란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비밀 같은 언어였기에 여러 불안의 요소들을 불러일으켰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한쪽 발에 균형을 잃자 마음마저 허뚱거렸다. 발등이 내지른 탄성은 잠시 쉬어가겠다는 몸의 간절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몸에 찾아온 반갑지 않은 불청객 덕분에 숲속의 화음을 더 다채롭게 해주는 음치 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람처럼 머물던 그 감정들은 자신을 들여다보며 품어주는 시간이었다.
몸과 마음을 앓느라 올봄은 격렬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꽃밭 맨 앞줄 중심에 서 본다. 곧 뜨거운 여름이 찾아올 것이다.
황미연 님은 월간 《수필문학》 등단,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은상 수상 외. 수필집: 《누군가 나를 부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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