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그의 생일인 1월 19일, 포를 사랑하는 주민들과 여러나라에서 온 마니아들이 포 축제를 개최한다. 그리고 해마다 누군가가 뚜껑 열린 꼬냑 한 병과 장미 세 송이를 그의 무덤에 바친다. 포의 무덤을 방문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귓전엔 <애너밸 리>의 파도소리가 울리고, 가련한 포의 얼굴이 술잔에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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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벨 리 / 김원길
에드가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슬픈 멜로디와 아름다운 싯귀가 좋아 하루가 멀다하고 음반을 틀었다. 그때 나는 중 2였다. 영시의 리듬과 운율에는 깜깜했으나 자꾸 듣다보니 나중엔 웬만큼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그때가 생각났다. 그 바리톤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고 그가 누구였는지 궁금했다. 수많은 가수들의 음반과 시디를 뒤진 끝에 목소리의 주인공 짐 리비스(Jim Reeves, 1923~1964)를 찾는데 성공했다. 오랜만에 그의 목소리를 접하니 그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일당이 장면 총리를 해임시켰던 1962년,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온 가족이 새집으로 이사했다. 키 큰 축음기는 아버지가 아끼시는 물건이었고 음반의 주인인 삼촌은 걸핏하면 우리를 혼내키곤 했다. 헤르만 헤세가 타계하고 존 스타인벡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였다.
미국 문학사에서 포의 위치는 확고하다. 18세에 시집을 낸 시인, 소설가, 비평가, 세계 최초의 추리소설가, 단편소설과 범죄소설의 선구자, 낭만주의의 거두 등으로 불린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배우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도망쳤다. 어린 자식 셋을 보살피던 어머니마저 죽자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세 살배기 포는 리치몬드의 부유한 권련업자에게 입양되어 영국에서 살기도 했다. 양아버지 앨런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포를 사업가로 만들려는 앨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찌기 바이런에 심취한 포는 작가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가 없어 중퇴했고, 5년 계약의 군대생활도 중도포기로 끝났다. 앨런은 자신의 뜻에 반하는 양자에게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불행 속에서 누가 온전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자신의 꿈을 얘기하고 위로 받을 것인가. 외로운 천재였던 그는 절망과 광기의 글쓰기에 집중했다. 한때는 잡지사 편집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평론을 쓰고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여러 곳을 전전하는 사이 가난과 질병이 심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곤경에 빠진 포는 볼티모어에 사는 고모를 찾아갔다. 고모는 포를 불쌍히 여겨 아들처럼 대했다. 그러고 5년 후, 스물여섯 살 포는 열세 살 먹은 외사촌동생 버지니아와 결혼했다. 이듬해 그는 과도한 음주로 실직을 당했고, 공포와 비탄 속에서도 열심히 평론과 단편을 썼으나 수입은 세 사람이 먹고살기엔 부족했다. 그는 곧잘 동료작가를 혹평하고 말다툼 끝에 직장을 때려치우거나 불륜을 저지르고, 고주망태가 되어 거리를 헤매었다. 설상가상, 버지니아가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몇달 간 글쓰기를 포기했으며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율과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발버둥쳤다. 불행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실수록 더 불행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고 결국엔 아편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
2016년 가을, 나는 미국 동부여행 중에 볼티모어의 <포 문학관>을 찾아갔다. 집 앞 너른 풀밭에 키 큰 나무 몇 그루가 섰을 뿐 한눈에 보아도 가난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 동네였다. 말이 문학관이지 작고 볼품없는 2층 벽돌집이었다. 판매용 책들, 벽에 붙은 여러가지 안내문, 다락방에는 낡은 침대와 옷장 하나, 부츠 한 켤레, 의자에 걸쳐진 외투. 저 외투와 신발로 얼마나 많은 거리를 쏘다녔을지 궁금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상과 현장을 고스란히 보존한 건 옳은 일이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작가의 문학관이라기엔 너무 초라했다. 포가 이 집에 산 햇수는 2년이지만 그에겐 중요한 곳이다. 할머니가 사셨던 집, 두번째 시집과 단편소설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집, 버지니아를 처음 만난 집, 그녀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친 집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일곱살 소녀였고 포는 스물한 살이었다.
“버지니아는 하늘의 천사를 닮았다”, 그녀를 만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었다. 포는 검은 머리에 진주 같은 눈동자를 가진 버지니아를 사랑했다. 오누이 같은 사랑이어서 어떤 이는 둘의 사랑이 육체적 관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1837년, 포는 열세 살의 버지니아와 결혼했다. 신부는 10년 후인 1847년 1월 말, 결핵을 앓은지 5년만에 죽었다. 그녀는 뼈가 오그라드는 뉴욕의 추위와 모진 가난 속에 짚으로 만든 매트리 스 위에서 눈을 감았다. 남편에게 사랑의 헌시를 썼던 아내, 영감의 대상, 시의 원천인 그녀는 포의 모든 것이었다. 포는 ‘어떤 남자도 사랑한 적이 없는 그런 사랑을 했었다’고 말했다. 아내를 땅에 묻은 후 그는 실성했다. 날마다 버지니아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녀의 얼굴 같은 창백한 달빛 아래 울었다. 비내리는 날엔 비석을 어루만지며 술을 마셨다. 눈내리는 겨울 밤엔 그녀의 무덤 곁에서 벌벌 떠는 눈사람이 되어 앉아 있곤 했다.
포는 시작에 관한 에세이를 남겼다. 가장 고양되고 가장 순수한 쾌락은 미를 관조하는데 있으며 시란 영혼을 고양시키며 강렬한 격정을 일으켜야 한다고. 시의 정조情操란 애상조가 으뜸이고, 그 정조가 섬세한 사람을 눈물짓게 만드는 것이라고*. <애너밸 리>가 그와 같다.
“아주 오랜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혹시 여러분도 아실 지 모를 ‘애너벨 리’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살았답니다/ 그리고 소녀는 나를 사랑하고/ 내게 사랑 받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녀였답니다…. 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That a maiden there lived whom you may know/ By the name of Annabel Lee/ And this maiden she lived with no other thought/ Than to love and be loved by me….”
포는 <애너벨 리>에서 아내의 죽음을 환상의 세계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죽었지만 둘의 사랑은 죽음을 초월할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가 자신이 사랑한 유일한 여인이었노라고 포는 친구에게 고백했다. ‘내 사랑하는 작은 아내가 내게 비극적이고 배은망덕한 삶과 맞서 싸우는 용기를 준다’ 고도 했다. 아내와 사별한 포는 2년 후 볼티모어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나이 마흔, 의식불명인 그를 병원으로 옮겼으나 며칠 후 그는 눈을 감았다. 그가 뉴욕에서 볼티모어로 간 이유가 무엇인지, 술병인지 머릿속 울혈인지 결핵인지 아무도 정확한 사인을 모른다. <애너벨 리>는 포가 쓴 최후의 작품이다. 어쩜 죽음의 검은그림자가 다가옴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뉴욕에 있던 버지니아의 유골은 남편의 묘지에 합장되었으나 까딱하면 그녀의 백골이 사라질 뻔했다. 묘지의 인부들이 몇 기의 무덤을 파헤쳐 버리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포의 지인이 흩어진 버지니아의 백골을 수습, 몇년 간 자신의 거실 마루 아래 보관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셨던 동네, 버지니아와 사랑을 나눈 도시, 함께 거닐었던 바닷가의 추억 때문인지 포는 볼티모어로 돌아와 한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시민들은 아직도 포의 유령이 볼티모어에 떠돈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그의 생일인 1월 19일, 포를 사랑하는 주민들과 여러나라에서 온 마니아들이 포 축제를 개최한다. 그리고 해마다 누군가가 뚜껑 열린 꼬냑 한 병과 장미 세 송이를 그의 무덤에 바친다. 포의 무덤을 방문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 귓전엔 <애너밸 리>의 파도소리가 울리고, 가련한 포의 얼굴이 술잔에 어린다.
*《생각의 즐거움》 에드가 앨런 포 에세이, 송경원 옮김, 2004년 하늘연못 출간.
김원길 님은 수필가. 《계간수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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