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일을 당할 때 작은 배려가 큰 은혜로 돌아오는 경험을 많이 하게되나 봅니다. 여러분들도 그러시죠.
봄불은 여우불
어느 해 초봄,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밭에 나와 나무들과 눈을 맞추
며속삭였다. “ 나무야, 잘있었냐. 겨울 찬바람에 눈비 맞으며 힘들었
지. 겨우내 찾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나는 메마른 가지를 어루만지
면서 천천히 밭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때 밭 주위에 날아다니는 비닐봉지와 쓰레기들이 보기 흉해 모
아서 둔덕 밑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더니, 느닷없이 회오리바람이 휙
불어 불똥이 마른 잔디 위로 날아갔다. 처음엔 대단찮게 생각하고 나
무 막대기로 두들겼다. 봄 불은 여우불이라더니 불꽃은 보이지 않고
모락모락 연기와 함께 타닥타닥 소리만 나면서 바람결 따라 시꺼먼
지도를 점점 더 넓혀가고 있었다.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 나란히 있는
어느 무덤 두 기와 둘레에 심어둔 진달래도 새까만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 와중에도 돌이 솔로 서 있는 노송 몇 그루는 놀란 기색도 없이
늠름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 무덤 옆엔 잡목이 우거진 야산이
있고, 그 사이 좁은 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고, 동쪽 농로 옆
밭둑에는 바싹 마른 억새가 바람에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 묘목 밭이
경계에 있어 불씨가 옮겨갈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기세등등하
던 불꽃은 자로 잰 듯 네모나게 잔디만 다 태우고 사그라졌다. 너무
도 아찔한 순간, 저절로 두 손이 합장을 했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산기슭에 풀썩 앉아 버렸다. 눈물이 두 뺨을 적
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 넓은 들판에 인적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불이 다 꺼지고 나서야 완장을 찬 중년 남자가 숨 가
쁘게 달려왔다. 그는 산불 감시원이라면서 연기가 시꺼멓게 올라와
놀라서 달려왔노라고 했다. 만약에 이 산에 불이 옮겼다면 벌금에다,
영창도 살아야 한다고 겁을 잔뜩 주었다. 앞으로 조심하라는 말을 남
기고 가버렸다.
일이 무사히 끝난 줄 알고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 정장을 한 젊은이
가 성난 얼굴을 하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뛰어왔다. “우리 아버지 산
소인데 이렇게 다 태우다니, 어찌할 거냐.”며 윽박질렀다. 나는 송구
스럽고 두려워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 가고 싶었다. 얼굴
을 들 수가 없었다. 뭐든 요구하는 대로 다 변상해 드릴 테니 노여움
을 거두라며 거듭 사죄를 했다. 어머니와 상의해야 하니 집으로 가자
고 했다. 어머니가 중풍 투병 중이라며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며 젊은이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
고 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이불을 두리두리 감고 앉아 있는 할머니가 계셨다. “어서
들어와요.”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 음성이 귀에 익은 소리 같고 안면
도 있는 듯했으나 황망중이라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 우선 사과하
고, 내 의중을 밝혔더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 내려와 몸을 좀 녹이고
쉬었다 가요.”하고 다정하게 말을 했다. 내가 말을 잘못 들었나 해서
어리벙벙하고 서 있는데 그의 아들에게 자장면 몇 그릇 시키라고 하
는 게 아닌가. 나는 자리가 불편하여 나오려는데 할 이야기를 덜했다
면서 옷자락을 잡고 주저앉혔다.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당신네 차를 많이 타고 다녔지요.”
하며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 말에 어리둥절했다.
몇 년 전 이 마을 어귀에서 묘목을 가꾸는 칠십 대 노부부를 우연히
만나게 됐다. 나무를 심어 가꾸어서 매출까지 다해주겠노라고 하기
에 나무 키우는 것엔 문외한인 나는 그분들께 다 일임해서 천 평 땅
에 벗지 묘목을 심었다. 밭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지만, 자라
는 나무가 보고 싶어 직장생활로 주말엔 쉬어야 하는 작은아들을 데
리고 밭에 나갔다. 아들도 나처럼 나무와 자연을 좋아해서 늘 동행했
다. 나는 새벽부터 서둘러 과일, 물 등 그분들의 점심까지 넉넉히 준
비하고 콩국도 만들고 전지가위도 챙겨서 밭에 가면 점심 가방은 아
예 그 댁 비닐하우스 안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묘목 밭으로 갔다. 등성이에 올라서면 밭
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나무야, 잘 있었냐. 내가 왔다.”하고 소리
치면 오뉴월 잎이 무성할 땐 바람 한 점 없어도 숲이 서로서로 어깨
동무하고 반겨주는 듯 일렁거렸다. 아들과 나는 밭을 둘러보고 나무
하나하나 수형을 잡아주고, 점심때가 되면 그분들과 함께 점심을 먹
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해가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 우리 모자는 지
친 몸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럴 때마다 가는 도중에 왜소한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힘들어 땅을 물고 걸어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
다. 안쓰럽게 여긴 아들이 그분을 만날 때마다 차에 태워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리고 차가 밀리는 날엔 우리는 어둠을 안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허다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이분이 그때 차를 같이 타고 다닌 그 할머니라
고!
아들의 작은 배려가 이렇게 큰 은혜로 돌아올 줄이야.
이종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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