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옛날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젊었을 때는 옛날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정겹고 행복감을 주는 단어인지를 몰랐습니다. 옛날과 현재가 일치될 수는 없을까요!
자두 이야기
언니가 살고 있는 곳에 우리 자매는 자주 내려가 쉬다 오곤 한다. 그곳
은 산으로 겹겹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충북 영동군의 한 작은 마을이
다. 공기도 좋고, 일교차가 심해서 그곳 과일은 당도가 유난히 높다. 가
을이 되면 감나무가 가로수인 영동읍내에 감이 빨갛게 물든다. 사과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과수원을 지날 때면 먹는 즐거움보다 보는 즐거
움이 더 크다. 언니도 그 지역에서 포도 농사를 지은 지 오래되었다.
그곳에 과수농가가 많은 것도 지형과 기후적 조건이 알맞기 때문일 것
이다.
자두가 한창인 지난여름 언니 집에 가는 길이었다. 언니 집으로 가는
길목에 경부선 철로와 국도 사이의 구렁에 주인 없는 과실수 같은 자두
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붉은 색이 감돌고 있는 먹음직한 자두가 나뭇가
지에 빈틈없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달리는 차 안이지만 잘 익은
자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자두를 본 순간 입 안에는 벌써 침이
가득 고였다. 그 지역에 사는 언니에게 저 자두나무 주인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언니는 “당연히 있겠지.” 한다. 전에 이곳에서 탐스러운 사과
를 보았을 때에도, 감나무 가로수에 빨간 감이 예쁘게 매달려 있어도,
포도나무에 까만 포도송이를 보아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이상의 욕
심이 없었다.
운전하는 형부에게 차를 멈춰달라고 했다. 형부는 의아해하며 차를
세웠다. 자두나무에 매달린 예쁜 과일을 구경만 할 참이었다. 차에서
나와 내려다보니 자두나무 밑에 떨어진 자두가 나무에 달린 자두보다
더 많아 보였다. 형부에게 떨어진 과일만 주워오면 안 되느냐고 묻자
떨어진 과일은 맛이 없다고 한다. 만류하는 형부를 뒤로하고 우리는 비
닐봉지를 하나씩 가지고 자두밭으로 내려갔다. 떨어진 자두를 비닐봉지
에 주워 담다가 먹어보니 단맛도 신맛도 없었다. 그 순간 내 눈이 자두나
무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나무에 달린 빨간 자두에서 싱싱한 단내가 코
를 자극하는 것이 “나를 빨리 봉지에 담아 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것 같
았다. 순간 머리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손은 이미 나무에 달린
자두를 잡고 있었다. 욕심이 이성을 압도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버렸다. 내 속의 자아가 ‘안 돼!’를 연신 외치는 소리
가 들렸다. 그러나 내 손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슴이 두근두
근거려 호흡이 가빠졌다. 우리 손에는 이미 한 봉지씩 잘 익은 자두가
들려 있었다.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서 있는 형부가 “그만하고 올라와. 어서!” 하는
순간,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침 철로에 경부선 열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달리는 기차에 나를 숨기고 싶었다. 그 지역에 사는 언니가
고함소리가 나는 곳으로 후닥닥 달려갔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겨우 중
심을 잡고 도로 위로 올라와 바라보니 언니가 주인인 듯한 남자와 이야
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무서워서 얼른 차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지
금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며 셋이서 킥킥거리며 웃는데, 경찰차가 특유
의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옆 차선으로 휙 지나갔다. “혹시 우리를 신고한
것 아니야?” 동생이 하는 말에 우리는 또 한 번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후 주인하고 이야기를 하던 언니가 왔다. 언니는 차에 타더니
“아저씨가 경찰에 신고했다는구나.” 한다. 우린 놀라서 얼굴이 금세 백
지장이 되었다. 놀라는 우리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언니는 웃으며 운
전석에 있는 형부에게 “경찰서로 자수하러 갑시다.” 한다. “정말? 이를
어쩌면 좋아. 창피해서.”
언니는 주인에게 서울에서 동생들이 왔는데 나무에 예쁘게 달린 자두
를 보고 떨어진 자두를 조금 주워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어 너무 죄송
하게 됐다고 하며 값을 치르겠다고 했단다. 주인은 그냥 두라며 인심을
썼다고 한다. 우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뒷좌석에서 자두를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신맛과 단맛의 상큼한 자두향이 입 안 가득히 퍼진다.
‘음. 이 맛이야!’ 어느새 죄책감도 잊고 맛있는 자두 한 봉지를 다 먹어
치웠다. 나는 과일이 맛있다고 과하게 먹으면 꼭 배탈이 나는 체질이다.
이 정도 양을 먹으면 배가 아프기 마련인데 자두 맛에 끌려 한 봉지를
탈없이 다 먹었다. 서리를 한 과일이어서 탁월한 맛이었던가….
인심 좋은 옛날에는 밤에 친구들끼리 재미로 조금씩 하는 과일 서리
를 장난으로 봐주었다. 동네 사람들 자녀들이어서일까. 요즈음 사회에
서는 그런 행위가 엄연히 절도죄에 속한다.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이 제
어되지 않는 것을 처음 체감했다. 순식간에 죄의 올무에 걸려든 느낌이
었다. 주인의 너그러운 마음이 아니었다면 큰 망신을 당할 뻔했다. 새콤
달콤한 상상이 입 안 가득히 고일 때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자두의
계절이 되면 아직도 정신이 뻔쩍 들곤 한다. 올해 자두가 익어갈 무렵에
는 영동 가는 길에 그 집에 들러 자두를 사먹어 봐야겠다.
김점순 ----------------------------------------------------------------------
2009년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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