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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5월호, 세상 마주보기] 벌이 되어 꽃 속으로 - 김순자

신아미디어 2012. 5. 22. 18:25

김순자님의 수필 맨 끝에 쓰인 '너도 세상과 통하였구나 !' 라는 말과 '평범한 진리가 인생의 공식'이라는 말이 저의 허전함을 꽉 매워주네요..  수필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벌이 되어 꽃 속으로


   보인다.
   보고 있지 않아도 보인다. 까맣게 닫힌 망막 너머로 하얀 꽃물결이
일렁인다. 낮에 화접花蝶체험을 하다가 잠시 올려다봤던 파란 하늘이 내
려와 앉는다. 그 투명한 하늘 호수에 유영遊泳하듯 둥둥 떠다니는 수만
송이의 배꽃. 아기손톱만 한 다섯 장의 앙증맞은 꽃잎과 그 안에 꼭꼭
숨겨진 꽃술까지 점점이 보인다.
   온 종일 꽃잎과 눈싸움하며 실컷 본 얼굴인데 어이하여 이 밤, 예까지
따라온 걸까?
   가까운 친구의 아들 내외가 경영하고 있는 배 농장 일이 요즘 한창
바쁜 시기라 했다. 부족한 일손을 구하기가 날이 갈수록 더해간다며 걱
정 놓을 새 없는 친구 옆에서 안타까운 마음만 보탤 뿐, 도울 방법이
없었다. 배꽃이 피기 시작하면 반가움은 잠깐이란다. 화접 시기에 맞춰
숨 가쁘게 돌아가야 하는 일들 때문에 꽃이 꽃으로 안 보인다고, 어려운
심경을 토로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근동에서 가장 잘생긴 명품 배로 뽑혀 서울로 올린
다는 그 배를 선물로 받곤 했다. 친구와 그 가족들이 쏟아부었을 땀방
울을 생각하면 염치없지만, 좋은 친구 둔 덕분에 풍성한 가을을 한 아름
선물 받은 것 같아 마냥 흐뭇했다. 그동안 베풀어준 배나무에 대해 언
젠가는 감사의 예를 갖추어 대면인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
었다.
   오늘, 바쁜 일상을 밀쳐두고 친구를 따라 화접 체험도 할 겸 봉사에
나서기로 했다. 우선 배꽃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으
로 마음은 앞서 달렸고 첫 경험이라 잘해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기
도 했다. 서너 명의 일할 사람을 실은 승합차는 서둘러 배 농장으로 달렸
다. 시야에 들어오는 드넓은 대지가 온통 하얀색 물결로 장관을 이루었
다. 멀리서 바라본 배꽃은 하얀 구름 조각들이 내려앉아 나뭇가지에 수
를 놓은 듯 단아했다.
   농장에 도착하니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이 농장의 역사와 함께했을
법한 커다란 자목련 한 그루가 환한 미소로 일행을 맞아 주었다. 일벌
부대 구성원들이 속속 도착하고 싸움터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완전무장
에 들어갔다. 작업복과 운동화, 특수 제작한 모자와 눈만 내놓고 얼굴
전체를 가린 하얀 복면을 뒤집어써야 했다. 수류탄만 한 꽃가루 병을
목에 걸고 손에는 낚싯대처럼 생긴 대롱을 총대처럼 받쳐 들었다. 대롱
끝부분에는 민들레 갓 털같이 부드러운 화접용 붓이 달려 있었다. 오늘
의 성스럽고 진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필수 무기였다. 입을 벌린
병 속에는 잘 숙성 건조된 꽃가루가 얌전히 들어앉아 있었다. 머지않아
다가올 암꽃술과의 운명적 만남을 고대하면서…….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춘 슈퍼 벌떼들이 우루루 고지를 향해 돌진했
다. 그 숱한 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저 쏘아대기나 하는 무서운
곤충으로, 눈에 보이는 만큼만 건성건성 보아왔던 벌. 자연 생태를 지키
고 종족을 번성시키기 위해 그들은 부지런히 날갯짓을 하고 이꽃 저꽃
옮겨 다니며 꿀을 따고 꽃가루를 나르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자연의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건 아
닐까?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과 물질문명의 그늘 아래 파괴되고 멸종되는 자
연의 생명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지구를 맡아 경영해야 할 주체는 바로
인간이기에 그 책임을 통감하고 참회해야 할 일이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 송이송이 사이를 누비며 벌처럼 꽃가루를
나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굵은 나무 둥치를 중심으로 옆가지
들은 위로 뻗지 않고 거의 수평으로 자라도록 그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열매를 딸 때 편하도록 고안된 것이리라. 가지를 뒤덮은 꽃송이들이 마
치 잔칫집 마당을 덮고 있는 차일처럼 하늘을 가렸다. 여러 개의 가지
중 한 가지라도 빠뜨렸다가는 실패작이 될 것이니 꼼꼼히 살펴야 했다.
활짝 핀 꽃잎을 대상으로 붓끝을 조준하여 정확히 꽃가루를 암꽃술에
떨어뜨려야 하는 긴장의 순간들이었다. 위로 치켜든 목이 아파오기 시
작하면 총대를 받쳐 든 팔도 뻐근하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비탈진 둔덕
을 딛고 서 있는 발끝과 두 다리 또한 버티느라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평생 업으로 알고, 전쟁 치르듯 해온 친구의 고생담
이 피부에 와 닿았다. 흙과 나무와 몸이 하나 되어 때로는 뜨거운 태양
과, 때론 느닷없이 덮쳐오는 태풍과도 싸워가며 반복되는 삶을 두엄처
럼 삭여 왔을 터이다.
   난생처음 몸으로 부딪쳐보는 배농장일이라 동작은 어설프고 굼떴다.
육신의 고통쯤은 참겠는데 마음이 영 편하질 않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화접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답
답했다.
   경험 많은 농장 주인이 옆에서 귀띔해 주었다. 꽃가루 묻힌 붓 끝을
갖다 대면 암꽃술의 점액이 당기는 듯 끈끈한 느낌이 온다는 것이었다.
이미 내 손끝의 촉감으로 감지되었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바로 그 느낌
이었다. 낚싯대의 찌를 통해 전해오는 물고기 입질 같은 그런 미세한
느낌이었다. 암꽃술이 알아서 꽃가루를 끌어당기는 현상이리라. 오묘한
자연의 이치와 생태계의 종족 번식을 위한 생명현상이 놀랍다. 대자연
의 조화 상생의 원리가, 사랑을 근본으로 한 신의 의지라는 걸 또 한
번 배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 빛깔로 잘 익은 배 한 알이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방울들이 필요했을까? 배꽃 안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보석처럼 쏟아
진다. 꿈을 가진 생명의 씨앗 하나 떨어져 자연의 품에서 싹을 틔우고,
어린 나무가 되고 가지를 키워 하늘로 기지개 펴는 어른 나무가 된다.
따스한 봄볕의 애무로 꽃을 피우고 여름햇살에 포동포동 살이 오를 열
매를 위해 꽃은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름내
태양과 비바람과 싸우며 품어 키운 소중한 열매를 가을볕에 몸 풀듯
쏟아 놓고, 배나무는 홀가분한 빈 몸으로 다음 한살이를 준비하리라.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해진 굳은살 속에 세월의 옷, 또 한 겹 걸치고
의연한 땅지기의 자태로 여기 우뚝 서 있겠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 먼 훗날에도…….
   자연의 허락도 없이 어중이 벌이 되어 웽웽거렸던 배꽃 속에서의 하루!
평생 공부해도 못다 깨우칠 자연의 섭리를 조금은 터득할 수 있는 고
마운 계기가 되었다. 그저 자연이 퍼주는 천혜의 조건과 사람의 노력이
보태져 쉽게 얻어지는 과일로만 생각했던 배. 그 안에 숨겨진 생명의
실체와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방관자로 살아온 건 아닐까.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한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그렇다. 황금빛 열매 속에는 서리서리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다. 하얀
미소로 화답하는 배꽃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네 인생살이도 꿈을 위한
그들의 한살이와 닮아 있다는 걸 깨닫는다. 굽이굽이 넘어야 할 고통의
순간들이 무시로 존재한다는 것, 농익은 과일처럼 달콤한 행복을 얻기
위해선 쓰디쓴 인내와 기다림과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 이 평범한 진리
가 인생의 공식이라는 걸 또 한 번 복습하게 해 준 배나무야, 너도 세상
과 통하였구나!

 

 

김순자 --------------------------------------------------------------------
2007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