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만의 18번을 가지고 있다. 노래, 시, 소설, 수필......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다른 누군간의 작품이다.
여기 『수필과 비평』에 수록된 나의 대표작 "바람개비의 갈망"을 보고 나만의 글을 표현하고 싶은 갈망이 더해진다.
바람개비의 갈망
수많은 바람개비 앞에 섰다.
옷깃을 여민다. 바람은 보이지도 않건만 저들은 하염없이 돌고 돈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 전혀 없는, 단지 바람으로만 도는 저들의 모습에
무아지경이 된다. 감정의 실타래가 바람개비처럼 돌돌돌 돌아간다.
인간을 이성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 말은 감정의 동물이란 말과 그
렇게 다른 말은 아니리라. 절제하며 가히 이성적인 판단으로 자신을 잘
추스르는 사람들이 한때는 부러웠다. 일말의 허점도 없이 정직한 생활
을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단연 엘리트며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활을 하기 위해선 자신을 얼마나 가혹한 이성의 밧줄로 옭아
매야 하는가. 때로는 조였던 끈을 느슨하게 풀 수 있는 사람, 상대가
베푸는 작은 배려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사람에게 인간미
가 느껴진다. 완벽으로 포장된 갑갑함보다, 허술하지만 시원하게 전해
오는 진심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더 사로잡는 것이 아닐까.
우연히 스쳐가는 길에 빨간색이 특색인 *바람흔적 미술관이 보였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은 빨간색으로 인해 더 한층 진한 계절의 향기를 뿜
는다. 바람의 흔적을 찾는 수많은 바람개비들이 장관을 이루고, 그 주변
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의 터줏대감 최영호 작가가
설치한 설치작업 마당의 작품 테마는 모두 바람이다. 목탁과 범종, 운판,
목어의 소리를 조화시키는 바람소리 마당엔 목탁과 범종만이 완성되어
있다.
이른 시간, 인적 드문 산골에 혼자만의 관람인 셈이다. 언뜻 범종의
울림이 은은히 들려올 뿐, 아무도 나를 주시하지 않는 곳. 어쩌면 고립
속에 자신을 가두어도 좋을 듯하다. 낯섦이 친근감의 다른 이름으로 다
가온다.
눈동자가 검어서 순하게 보이는 강아지 한 마리가 이곳저곳 기웃거리
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귀를 쫑긋 세우는가 싶더니 차츰 경계를
푼다. 저 혼자 심심했는지 꼬리를 흔들며 곁으로 왔다. 잔디 주변으로
오밀조밀하게 놓인 빨갛고 노란 꽃무리가 예쁘다. 양산 위로 떨어지는
따가운 햇살도 노랑나비와 잠자리의 날갯짓 따라 잠시 비껴간다.
바람… 흔적… 나와의 예사스런 조우가 아니다.
몇 년 전 ‘바람꽃’이라는 가사를 k대 음대 학생에게 준 일이 있다. 그는
작곡가 지망생으로서 아름다운 가곡을 만들고자 했다. 그들의 발표회
날 초대되어 갔다. 바리톤의 음색으로 ‘바람꽃’이 관객을 향해 피어날
때 그 감격은 정말 잊을 수 없었다. 다시금 되새겨지던 노랫말에 가슴이
저렸었다. 발표 후 정성껏 만든 악보를 건네받았을 때 ‘바람꽃’은 지상의
꽃이 되었다.
<흔적>이란 제목의 작품도 있다.
지금은 장성하여 한 가족의 가장이 되어 있을 한 소년의 과오를 쓴
글이다. 평소 우리 아이와 친근하게 지내던 소년에게서 가정환경으로
인해 정서가 불안정한 걸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우리 집을 택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두려움에 잠을 설쳤다. 훈계보다 깊은 포옹으로 설득을 시
켰지만 젊은 혈기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암담했었다. 당시 침묵으로 일
관하며 남긴 흔적은 이렇게 긴 세월 끝에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래서인지 바람과 흔적이란 단어에는 특별한 애정이 있다. 여기 발
길 닿은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어쩌면 내밀한 통로를 향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1층 전시실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문이 잠겨 있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 한 줄기는 추억 어린 난로 위에서 토닥댄다. 빛바랜 액자가
걸린 벽면이 허허롭다.
이층으로 난 철 계단을 오를 때 기분이 상쾌했다. 철 계단 특유의 소리
에 묵혀두었던 앙금들이 녹녹히 풀어진다. 1층의 닫힌 문과는 다르게
미닫이문은 쉽게 나를 허락했다. 사방이 통유리여서 주변 경관이 확연
히 들어선다. 진초록 풍광에 눈이 부셨다. 엄청 높은 키의 바람개비가
눈높이에서 와락 내 품으로 들어선다. 소용돌이친다. 주체하지 못할 내
면의 소리들이 바람을 일으킨다.
정작 목이 타야 하는데 가슴이 탄다. 나무의자에 앉아 교란되는 파음
에 지그시 나를 맡긴다. 장작더미 위에 놓인 기타에 뭔가 웅크려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여린 풀잎을 정교하게 엮어서 만든 여치의 모형이다.
누군가의 정성으로 빚어낸 무생물일 뿐인데 기쁨이 수반된다. 바람개비
를 돌리는 바람의 마음도 그와 같은 것일까.
책장에 빼곡히 들어앉은 책들 속에 누렇게 변색된 노트가 시선을 끈
다. 열 권 넘는 그 노트 속엔 삶의 얘기들이 짤막하게 적혀있다. 바람처
럼 스쳐가는 사람들이 흔적을 남겨두었나 보다. 대부분이 관람 후의 소
감을 적었지만 드문드문 사랑의 맹세도, 고백도 적혀있다. 남의 고백서
를 읽다보니 묘한 흥분도 일어난다.
문득 인간사가 별것 아니란 생각이 든다. 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
낌이 들 때도 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 주지 않고 그 어떤 기회도 나에
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비감에 젖을 때면 한없이 쓸쓸하고 처량하다.
노트는 나를 끌어안으려 한다. 내밀한 언어를 한껏 싸안아 주려 한다.
진실은 알려지고 진심은 통한다며 응축된 갈망들을 죄다 풀어버리란다.
그랬다. 한없이 자유로워졌다. 그 공간은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언
젠가 우연히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보여질지라도 괘념치 않는다. 그것은
바람의 흔적일 뿐이니까.
둥지를 떠나는 새를 보는 것보다 둥지로 돌아오는 새를 보는 것이 마
음을 한결 숙연하게 가라앉혀 주듯이, 어쩌면 끝없이 배회하고 갈망하
는 것도 연습에 불과할 뿐, 그 연습이 오히려 나를 지탱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결국 옷깃을 여밀수록 더 드러내고픈 갈망이 있었음을 바람개비는 알
고 있었던 것일까.
바람 부는 날 일제히 돌아가는 바람개비.
저 혼자의 갈망이 더 깊어진다.
* 바람흔적 미술관은 경남 합천의 가회면 한밭 새터 황매산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동이 -----------------------------------------------------------------------------------
2000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바람개비의 갈망≫(2008)
2008년 ≪경남문학≫ 우수작품집상 수상.
작가메모 --------------------------------------------------------
바람 불어 좋은 날 인근의 주남저수지로 나갔다. 바람이 좀 거세다 싶었
지만 옷깃 한번 세우면 그만이었다. 둑길에 오르니 물과 바람이 가득 차
넘실넘실 이랑이 진다. 그 위로 아직 떠나지 않은 철새 몇 마리…. 저들끼리
는 깨가 쏟아지는 모양이다. 군락을 이룬 왕버들 가지에 연록의 봄빛이 물들
었다. 둑길을 걷다가 벤치에 앉기도 하며 망원경으로 먼 곳의 풍경도 본다.
드문드문 싸라기를 뿌린 듯 하얗게 핀 냉이꽃과 통통한 아랫도리를 드러낸
쑥이 시선을 붙잡는다.
점점 바람이 맵다. 못물도 바람의 힘을 견디지 못하여 바닥의 흙과 수초
를 수면으로 토해내고 만다. 아마도 수억 년을 이처럼 바람과 싸우며 수생식
물이랑 물고기를 키워왔으리라. 이렇게 자연의 숨결에 코끝이 아린 날이면
복잡한 생각과 집착에 빠진 나를 건질 수 있어서 좋다.
그날도 바람이 나를 이끌었을까. 우연찮게 바람흔적 미술관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바람개비에 숨겨진 은유를 읽어내느라 골몰했다. 아니 어
쩌면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멀리 달려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이유였는지 내밀한 언어를 변색된 노트에 깨알같이 쏟아내었다.
내 사고 체계를 허물고 들어앉는 그것은 두려움을 동반한 희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즐거움에 도취되어서, 슬픔에 도취되어서, 열정에 불타서 목적 없이 가다보
면 이르게 되는 조화로움, 그것이 아닐까 싶었다.
또한 삶은 매 순간 살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하여 솔직한 마음의 행로를
따르는 게 현명하지 싶었다. 바람은 쉬지 않고 불어대니까.
수필집의 표제이기도 한 바람개비의 갈망은 대표작이라기보다는 이성과
감성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았고, 응축된 나의 갈망과 상통한다는 의미로 적
은 글이다.
대표작 하면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수작을 말함이 아닌가. 선뜻 선택받지
못한 내 글들에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다. 이로써 내 글쓰기 작업이 더 치열
해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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