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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봄호, 신작수필 21인선] 봄비 - 김애자

신아미디어 2012. 5. 9. 13:33

이제는 봄을 넘어 여름을 가고 있네요.. 김애자님의 봄비에 대한 소중한 생각을 느껴보시면서 봄을 좀더 느껴보세요.

 

 

 봄비


   간밤에 비가 내릴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청동물받이를 타고 떨어
지는 물방울 소리에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이다.
   실은 어제 해 질 녘에 멀리 백운산 능선 위로 떨어지는 햇무리가 너
무 붉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단지 햇무리가 붉다는 이유만으로
는 비가 내릴 것이란 기대를 예측한다는 것은 지레짐작에 가까울 뿐
이어서 곧바로 잊어버렸던 것이다.
   아직은 사물의 형태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숲으로 올라가는 동안
서서히 밝아져 올 것이므로 두꺼운 바지와 파카와 목도리까지 주섬
주섬 걸친 다음 우산을 펴들고 집을 나섰다.
   봄비 내리는 새벽 숲으로 들어서면 하늘과 땅 사이에 펼쳐진 허공
은 젖빛 안개로 자욱하다. 임신한 여인의 자궁에 차 있는 양수빛깔과
흡사하다. 순간 여인의 자궁 속에 자라고 있는 어리디 어린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평화로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자궁이란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적의 산실産室이다. 사람이건 동물
이건 자궁 안에서 태동하는 생명들은 무의식의 상태로서 순결하다.
순결한 생명이 자궁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먹이를 위해 젖을 빠는 최
초의 노동을 시작하게 된다. 먹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은 죽는 날까
지 이어진다. 신들에게 미움을 받은 시지프가 끊임없이 바윗덩이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과도 같은, 실로 고단한 도정이
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밤사이에 시작한 봄비로 나무들은 겨우내 몸에 낀 먼지를 씻어
내고 있다. 선명해진 목피가 산뜻하다. 가만히 목피에 손바닥을 대
어 본다. 마치 의원이 진맥을 하듯 조심스럽게 나무의 혈을 더듬어
보니, 아! 피돌기가 느껴진다. 줄기세포를 타고 생명의 숨결이 느
껴진다.
   그러고 보니 입춘이 지나고서부터 온 산이 수척해지던 이유를 이
제야 알 것 같다. 입덧을 하고 있었던 게다. 오늘 허공이 뽀얀 양수빛
깔로 채워진 까닭도 다 이런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알다니, 성호를 긋
는다. 하늘과 땅이 뜻을 같이하여 무수한 생명들이 탈 없이 생생지의
生生之意하기를……, 찬연한 빛으로 피어나기를!
   숲으로 들어와 제멋대로 뻗어나거나 휘어진 나뭇가지들을 보고 있
으면 그 야성적인 구도가 참으로 멋스럽다. 더구나 지금은 초봄이라
서 뼈대만 드러난 허허적적함이 도리어 선미禪味를 느끼게 한다.
   잠시 늙은 적송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목피에서 묻어나는 습
기가 차갑다. 그러나 빗물이 관능처럼 스며든 차가움이 싫지 않다.
   이 순간, 산에서 느끼는 자유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다. 진정한
자유란 나 홀로 있을 때 누리는 것이다. 나 홀로 그 무엇에도 구애받
지 않고 나와의 독대를 통하여 내면을 정화시키노라면 에너지가 안
으로 모이고 뇌파도 안정된다. 또 보고 느끼는 것들을 심연으로 끌어
들이면 감성과 접속하게 된다. 접속이 이루어지면 감동의 파장이 인
다. 감동의 파장을 통하여 일어나는 이 조용한 희열은 자유를 통하여
얻는 나의 또 다른 현용現容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린다. 자드락길 옆에 있는 생강나
무 가지에는 크고 작고 높고 낮은 물방울이 음표처럼 매달려 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재플린 뒤프레가 연주한 슈만의 <세 개의 환상> 소
품을 들을 것이다.
   봄비는, 찬탄해 맞이할 나의 반가운 임이시다.

 

 

김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