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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봄호, 신작수필 21인선] 사랑을 위하여 - 김용순

신아미디어 2012. 5. 6. 20:50

여러분들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좋은수필』에 소개된 김용순님의 사랑을 살짝 엿보세요.

 

 

 사랑을 위하여

 

   새봄맞이 대청소를 하던 중이었다. 장롱 위에서 가계부 보따리를
발견했다. 누렇게 색이 바랜 보자기에 싸여 오롯이 세월을 이고 있는
주부 김용순의 살림 성적표. 나는 몇 점짜리 주부일까. 먼지를 털어
내고 매듭을 풀었다. 새살림을 시작한 1980년 어느 날을 보니 콩나물
200원, 김 350원, 돼지고기 1,100원, 파 150원, 동태 300원, 버스삯
320원이라고 적혀 있다.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샀던 모
양이다. 십 년 후의 그날을 펼쳐보니, 두부 600원, 갈치 100원, 조기
1,000원, 콩나물 300원이라고 적혀 있다. 갈치 값이 100원인 것이
의아하다. 호기심으로, 다시 10년 후인 2000년의 그날을 펼쳐보았
다. 부식 27,000원이라고 적혀 있다. 30여 년간 앞치마를 두르고 있
는 내 영상이 가계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동동거렸다. 2012년 그날
인 오늘 역시 퇴근길에 마늘 2,000원짜리 한 봉지와 돼지고기
12,000원어치 산 것 외에는 지출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랑으로 산다고 했는데, 나는 먹기 위해 살았
나. 동지섣달 칼바람 속이나 한여름 뙤약볕 아래나 가리지 않고 일터
로 내달렸던 것 같은데, 고작 하루 세 끼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그랬단 말인가.
   가계부를 밀쳐놓고 오늘 하루를 꼼꼼히 되짚어보았다. 아침 7시.
‘하루의 시작’이라는 휴대전화 모닝콜 음악 소리에 잠이 깼다. 흐트
러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대충 훑어내리며 부엌으로 향한다. 우선
손을 씻고 개수대 주위를 행주로 한 번 훔치고 나서 먹을거리를 장만
하기 시작한다. 머리숱이 적어지는 남편을 생각해서 서리태를 섞어
밥을 안치고 냉장고를 열어 국거리를 찾는다. 무슨 국을 끓일까 결정
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우선 식구들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고기 종류를 먹었으면 푸성귀를 이용해
국을 끓이고, 식물성 음식을 먹었을 때는 생선이나 계란요리를 준비
한다. 그런데 오늘은 갈지자로 들어와 코를 골고 있는 남편을 위해
주저 없이 황태를 꺼내 두드린다. 아침을 먹은 후에도 다음 식사 준
비를 위해 설거지를 끝내 놓고 나서야 출근을 서두른다. 근무 중에도
틈틈이 ‘오늘 저녁엔 무얼 먹나?’하고 고민한다. 잡무로 퇴근이 늦어
진다. 그러나 시각에 관계없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앞치마부터 두른
다. 퇴근길에 사 들고 온 음식재료를 꺼내놓고 다시 먹을거리를 준비
하는 것이다. 저녁을 먹은 후, 다음 날 아침거리 쌀까지 씻어놓은 다
음에야 하루를 마감했다. 역시 내 하루는 먹을거리 장만으로 시작하
여 먹고 난 빈 그릇 설거지로 끝이 났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인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일기 쓰기를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학생들
의 일기장을 검사한 일이 있다.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맛있었다.’
‘삼겹살을 먹었다. 삼겹살은 파채와 먹을 때 짱이다.’ ‘아빠가 밤 11
시에 치킨을 사오셨다. 다 먹고 나니 동생이 일어나서 닭 뼈를 보고
는 막 울었다.’ ‘마당에서 사촌 동생네 식구와 우리 식구가 곱창을 구
워먹었다. 또 먹고 싶다.’……. 온통 먹는 이야기뿐이었다. 맛있게 먹
었기 때문에 기분이 ‘짱’이고, 더 먹고 싶어했다. 잠자느라고 먹지 못
한 아이는 눈물까지 흘렸다. 일기는 하루를 되돌아본 후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소재로 해서 쓰는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먹는 일이 가장
마음 깊이 새겨진다는 말인가.
   그래도 만물의 영장인데 이럴 수야 있는가. 열어젖혔던 창문을 닫
으며 달력을 보니 ‘빨간날’이 이어서 다가오고 있다. 그동안만이라
도 먹고 사는 일에서 벗어나 보자, 먹고 살기 위해 마음 졸이던 시시
한 걱정거리들은 트렁크 가득 실어 동해 바람결에 훌훌 날려 보내자
고 인터넷 여행 사이트에 접속했다. 우선 강릉에 숙소 한 곳을 예약
하고 식구에게 다음 날 일정을 물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느
냐 남쪽으로 내려가느냐가 관건이었다. 작은 녀석은 해안도로를 타
고 북쪽으로 올라가야 대포항에서 값싸고 싱싱한 회를 실컷 먹을 수
있으니 그곳의 콘도를 예약하자고 조르고, 큰애는 요즘 대게가 제철
이니 남쪽으로 내려가다 강구항에 들러 영덕대게 맛을 봐야 한다고
우겼다. 홀가분하게 털자고 떠나는 여행에도 ‘먹는 일’이 앞장서 일
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데, 그렇다면 먹는
것이 사랑이란 말인가. 식구의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이 일상인 나
와, 먹은 것을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아이들을 보건대 먹는 것이
사랑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식구가 대포항이
나 강구항을 고집하는 것도 다 사랑을 위해서란 말인가.
   그나저나 내일 아침엔 또 뭘 해 먹지? 제각각 입맛이 다른 식구를
골고루 사랑하자면 일찍 일어나야겠는 걸! 사랑을 위하여 ‘바보 주
부’는 인제 그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김용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