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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2년 봄호, 신작수필 21인선] 최후의 자유 - 백남일

신아미디어 2012. 5. 2. 09:02

백남일님의 수필을 『좋은수필』에서 소개합니다. 자유, 자유, 자유...

나이가 들면서 밝으면서도 어두운 면이 같이 존재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인가요???

 

 

 

최후의 자유


   족형族兄이 췌장암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
으나 이미 퇴원한 뒤였다. 수술까지 받고 나갔다니 괜찮겠지 했는데
실은 그게 아녔던 모양이다. 암세포가 모든 장기에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지라, 개복하자마자 복강을 봉합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한부 인생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유한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일회성 생명체가 아닌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철칙이야 억겁의 세월
을 다스려온 불변의 진리인데, 우린 마치 영생의 특혜라도 받은 듯
짐짓 죽음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하기야 어느 절대자가 느닷없
이 나타나‘ 당신은 몇 년 몇 월 며칟날 죽을 것’이라고 단언한다면,
과연 그의 여생이 계획성 있게 마무리짓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
을 떠날 수 있을까? 모르면 몰라도 자포자기의 비탄 속에서 지레 자
진하고 말 게다.
   우린 웃어른이 타계했을 때 흔히 ‘죽었다.’는 말 대신 ‘돌아가셨다.’
라고 표현한다. 본래의 위치로 회귀했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고 보면
죽는다는 행위 자체가 삶의 한 과정으로 궁극에는 자연으로 되돌아가
게 마련이다. 하면 얼마만큼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느냐 하는 문제보
다도, 머문 동안 어떻게 삶을 영위했느냐가 더 큰 이슈로 남는다.


   늦장마 뭉그적대는 주말이었다. 향리鄕里에 볼일이 있어 내려가는
길에 아래뜸 족형 집부터 들렀다. 눅눅한 적막이 깔린 안마당으로 들
어서니 마루 끝에 넋 놓고 앉아 있던 형수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긴
다. 환자는 막막한 심경을 추스르기 위해 논배미에 나가 물꼬라도 둘
러보고 오나? 잠시 뒤 쇠잔한 육신을 삽자루에 의지한 채 어그적어그
적 들어오고 있었다. 퀭한 눈자위가 암세포와의 처절한 사투를 말해
주는 듯해서 차마 마주볼 수가 없었다.
   초점이 와해된 시선, 명줄이 간댕거리는 이의 표정은 과연 저런 걸
까? 그 옛날 산판을 일궈 비알밭에 곡식을 부치던 억척은 어디 가고,
안개 자욱한 들길을 표표히 떠돌다 온 듯한 빛바랜 영혼의 잔영!
   퇴원하던 날은 밤이 이슥토록 깡소주와 씨름하더란다. 평생 흙을
주무른 죄밖에 없는데, 왜 이런 몹쓸 병마가 엉겨붙느냐고 천읍지애
天泣地哀로 꺼억꺼억 속울음을 토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달포
가까이 자리보전하고 나선 부스스 일어나 집안일까지 거들기 시작했
다는 것이 아닌가. 어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촌부의 수척한 얼굴 위에, 잠시 뒤면 스러지고 말 하
오의 잔광이 머뭇댄다.
   삐걱이는 대문을 밀치고 나오는 발걸음이 천만 근이었다. 바지런
하기로 근동에서도 소문난 그가, 선친이 탕진가산蕩盡家産하여 기운
살림을 다시 일으켜세운 아귀찬 살림꾼이었던 걸 생각하니 새삼 초
로인생草露人生의 덧없음이 한스러웠다.


   4월이었다. T.S 엘리엇이 ‘가장 잔인한 달’로 못 박은, 움 돋고 속
잎 피어나는 잎새달이었건만 기예 족형의 비보가 날아오고 말았다.
그것도 순명이 아닌 농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니, 암 선고
후 8개월 동안 견딘 투병생활의 고초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암은 우리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에서 원인 모르게 발생하여,
차차 다른 곳으로 옮아가는 악성 종양이라고 한다. 페루 사막에서 발
굴된 천 년 전 미라에서도 뼈 종양인 골수암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
을 보면, 암은 수천 년 동안 인류 곁에서 우리 목숨을 공격해 온 그야
말로 암적 존재다. 의술의 첨단화를 자랑하는 현대의학에서도 여전
히 블랙박스인 이 암에 대한 전략은, 그저 종양을 메스로 제거하거나
방사선으로 태워버리는 시술밖에 없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극한상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용단이 수반될 자살! 하늘로부터 점
지받은 오직 한 번뿐인 생명을 제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분명 죄악이
다. 그러나 ‘행복하게 살 권리’ 만큼 ‘때맞춰 적절하게 죽을 권리’ 또
한 상황윤리의 기로에서 필요한 게 아닐까? 우리 속담에 “앓느니 죽
는다.”라는 말이 있다. 말기 암의 통증으로 손톱이 빠지도록 벽을 긁
어댔다지만, 그만한 고통을 감내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포기할 그
가 아니다. 어쩜 당신은 자수성가한 인업因業의 보람을 남은 가족들
에게 온전히 건네주고 떠난 게 아니었을까? 중환자실의 하루 비용이
얼만데 이렇게 죽치고 누워 있을 수 있느냐고 퇴원을 채근했다지 않
던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전 재보 중 적절한 때에 죽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고, 그 중에 가장 훌륭한 재보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플리니우스는 역설했다. 그러고 보
면 그는 최후의 자유를 만끽하고 간 인간 투지의 바로미터(barometer)가

아니었을까?
   봄의 실종을 예고하나, 사월의 끝자락인데도 한낮의 볕살이 이마
에 따갑다. 됫박골형님, 부디 영면하소서!

 

 

 

백남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