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렸을 때 20살이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제 40살이되면... 그러다 이제 60살이되면.... 황선유님의 작품이 저의 마음을 흔드네요..
여러분들도 즐거운 감상되세요.
오십을 기다리다
시월의 마지막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 가까이 사는 친구를 해거름에
밖으로 불러냈다. 우리는 집에서 가까운, 낯설지 않은 조그만 카페에 들어
섰다. 창가에 아직도 남아있는 금정산 산그림자가 그 날은 더 길었다.
새삼 마주 앉은 친구의 얼굴이 눈 안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친구의
얼굴 위로 내 얼굴이 보인다. 나이가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지금쯤 고향
의 너른 들녘에는 아직 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아직 해야 할 일이 가을걷이처럼 무겁고 산그늘처럼 두텁게 남아있다.
저문다는 말은 괜히 나를 서두르게 한다. 서둔다고 금방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면서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아쉬움이다. 그걸 숨기고자 시월의 마지막 날임을 핑계 삼아 친구를 불
러내는 것인지 모른다.
한 해 열두 달을 돌아보아 아쉽지 않은 달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시월
은 좀 더 아쉬운 달이다. 하늘이 얼마나 높고 그윽한가. 사과알이 얼마나
굵고 붉은가. 자분자분한 들꽃들의 두런거림이 얼마나 행복한가. 열 손
가락 끝의 봉숭아물은 한창 예쁜 달이다.
이른 봄에 움을 틔운 잎새들은 여름내 가을 올 줄 모르고 푸르기만
하더니 이제사 철이 들기 시작한다. 철이 든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지만
애잔하기도 하다. 가을 단풍은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이다. 이 애잔한
것들이 미처 갈 곳도 정하지 못한 채 서둘러 십일월을 맞는다면 낙엽들
을 다 어찌할 것인가. 바람조차도 아무 인정없는 십일월의 길거리를 방
황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겠는가.
시월과 연이어 있어도 사뭇 다른 십일월이다. 입동이 들어 있으니 겨
울의 시작이다. 차라리 십이월은 춥기나 하지.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십일
월은 모든 게 어정쩡하고 애매모호한 얼굴을 하고 있다. ‘11’이라는 숫자
는 생긴 것조차도 밋밋하고 썰렁하다. 하다 만 공사장에 을씨년스럽게
박혀있는 말뚝 꼴이다. 십일월은 함부로 멋을 부리는 달이 아니다. 어쩌
다 얇은 차림새로 멋을 냈다가는 물기없이 까칠한 바람한테 마음을 상
하게 될 것이고 두터운 겨울 코트를 꺼내 입었다가는 그새 야위어서 겨
울 볕이 된 햇빛의 눈에나 날 일이다. 십일월을 들먹이면 그럴수록 시월
이 아쉬워진다.
나는 오랫동안 이를 데 없는 막연함으로 오십의 나이를 기다렸다. 오
십에 대한 막연함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는 오
십의 나이를 끝으로 나와 이별했다. 내 유년은 일찍 깨어 나온 나비처럼
곱고 여리고 귀하였을 것이다. 스무 살을 막 넘겼을 즈음이다. 불 안
땐 온돌방에 누운 것처럼 쓸쓸했던 날이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뜬금없
이 오십의 나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등을 다독이며
선잠을 다시 재워주었던 엄마의 손바닥 온기가 온몸을 타고 번지며 시
린 손을 데우는 것을 느꼈고 마음에는 까닭없는 고요가 자리잡기 시작
했다. 사는 일에 분주했던 서른에도 내 가슴팍에서 키득거리는 아이들
의 웃음소리 사이사이로 오십의 손짓이 보이고는 했다. 마흔에는 하릴
없이 먼 데를 바라보는 날이 잦았다. 그러나 오십을 기다리므로 그것은
마흔의 수선거림에도 마냥 잠잠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분명 내가 기다리는 오십은 가을 들녘처럼 넉넉할 것이다. 지나는 길
손이 볏단 얼마를 집어간들 빈 표시도 없을 것이다. 팍팍했던 지난날들
을 아무 동요 없이 떠올려서 수고했다며 등을 쓰다듬을 수 있는 것도
오십에는 가능할 것이다. 가슴 한편에 짱돌 하나로 눌러둔 무릇 서운한
모든 것들도 오십에는 화로재처럼 사그라져 주겠지. 긴 시간 동안 나를
옭아매던 지독한 낯가림도 오십이면 제풀에 떨어져 나갈 것이며 주저주
저하기만 했을 뿐 하지 못했던 일들, 남들 앞에서 머뭇머뭇하던 말버릇
도 오십에는 사라져 줄 것이고 그뿐인가 낯선 곳을 향해서 선뜻 길을
나설 용기까지도 생겨날 것이다. 무엇 좀 밉상인들 어찌하겠는가, 내
나이가 오십인데.
시월…. 그렇게 나의 오십은 바구니 가득 주홍빛 단감이 아름다운 시
월만 같을 것이다.
친구와 함께 다디단 카페모카를 주문하여 마셨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커피처럼 모두 다 달지는 않았다. 제법 온기를 더해가며 주고받던 대화
는 어느새 자식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떨쳐버리지 못할 인연들. 매듭
으로 꽉 조여서 옴짝달짝 못하도록 감추어 두었던 이야기가 조금씩 풀
려지는가 하더니 어느새 얇은 한숨으로 새 매듭을 만들고는 기어이 끝
을 맺었다. 이러자고 만난 것은 아닌데 허전함을 발목에 매달고 돌아가
는 걸음이 무겁다.
아무래도 나의 오십은 아직도 시월이 되지 못한 듯하다. 또다시 돌아
올 시월을 기다려야 하는가. 저문 밤 거리 위로 천천히 떨어지는 단풍잎
이 맥없다.
황선유 ------------------------------------------------------------------------
2011년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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