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옥님의 시 2편을 소개합니다. 차분하면서도 계속 음미를 하게 만드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들도 차분히 들어보세요.
헛생각, 오래 밝았으면
달이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
오래전에 아주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산성 길 걷다가 마주친 열나흘 좋은 달
자꾸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거듭 생각되며 나는 또 부푸는 것이었으니
이 허공에 나를 드리워 주시는 그 손길은
나를 얕잡아 헛생각 또 넣어주시는 것이리
얕잡아 보는 눈길, 한두 번 받은 것 아니니
울먹이다 그치고 하늘 한 번 우러르면 되지만
이렇게 자꾸 따라오는 좋은 달을 어찌하나
이 흥 깨고 나면 구만리 밤길을 어이 갈까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탱탱했으면
이 길 다 가도록 헛생각 오래 밝았으면.
갑자기, 맑은 날
멍하니 횡단보도 앞에 있는 중인데
한 손으로 지팡이 짚으시고
한 손으로는 비닐봉지 꼭 잡으시고
어르신 한 분이 흐릿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길을 물어 오신다
주변 사람 헤치고 귀를 대었는데
내가 잘 모르는 길이다
어물어물하고 있자니까
한 젊은이가 다가서며 거든다,
젊은이 말이 신통치 않다는 듯이
파마머리 굽실한 아주머니 한 분은
목소리 높이며 달려들어 거든다,
아주머니 말도 석연치 않은지
웃는 상, 여학생 더 맑아지더니
파란 신호등 보며 우선은 건너서야 한다고
어르신 부축하고서 보조 맞추어 건너간다,
흐릿한 목소리를 에워싸고 발구르던 사람들도
호위하듯 뒤따라 천천히 건너간다
갑자기, 맑아진 날이었다.
한 영 옥 ------------------------------------------------------
성신여대 국문과,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성신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수상 : 한국예술비평가협회상, 천상병시상, 최계락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저서 : 시집 ?비천한 빠름이여?, ?아늑한 얼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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