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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2011년 하반기, 평론] 청마의 사랑에 관한 또 다른 해석 - 박진희

신아미디어 2012. 3. 17. 09:34

박진희님의 청마 유치환님에 대한 평론이 표현에 수록되어 소개합니다.

항상 평론은 읽을 때마다 다른 새로운 세상이 내앞에 펼쳐지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청마의 사랑에 관한 또 다른 해석

                                   1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그리움


   대학 시절, 한 선배의 손목에는 흉터가 있었다.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선배의 마음을 알았기에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얼른 시선을 돌려
버리곤 했다. 왠지 궁금해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무슨 흉터냐고 물어보
지는 않았지만 주변을 통해 들은 바로는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흔적이라 했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선배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흔적과 마주하게 될 때, 그리고 그 흔적을 깊게 응시하
게 될 때 그의 생각의 끝은 어디에 가서 닿을까. 그토록 사랑 했던 한
여자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목숨도 버릴 수 있을 만큼 열렬하게 사랑
했던 자기 자신일까.
   사랑의 신 에로스가 풍요의 신 포로스(Poros)와 결핍의 신 페니아
(Penia)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라는 층위에서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랑의 본질은 충족과 결핍의 교호交互
과정이라는 정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끊임없이 사랑하
는 대상과의 거리를 좁혀가며 충족감을 느끼고 싶어 하지만 완전한 소
유나 합일이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사랑이라는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결핍감을 내재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랑의 지속이 충족감이 아니라 결핍감에 기반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 충족감에 이르렀을 때 그때부터 식어가는 것이
사랑이라는 정서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완성은 곧 파괴에 다름 아니
라는 역설이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성립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히려 대
상에 대한 결핍감, 대상과의 거리에 대한 인식에서 지속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연원하는 아픔, 외로움, 갈구, 열정 등이 사랑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의 의미는 완성이 아니라 진행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기억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은 이
러한 경험과 마주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때를
돌아보았을 때 오히려 그/그녀의 이미지는 흐릿해지고 정작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누군가를 그토록 순수하게, 혹은 처절하리만큼 무
구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말이다. 이는 인간이 어떠한 대상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내면을 면밀
히 들여다보면, 그 초점이 사랑하는 대상으로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이
지만 기실은 대상을 사랑하는 자아에 맞추어져 있는 경우라 할 수 있
을 것이다.
   사랑하는 행위를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에 비유해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목
숨을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는 것, 그런데 내가 바
라보고 있는 사랑하는 대상이란 결국 거울 속의 또 다른 나인 것이다.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자, 그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대상
이라기보다 대상을 눈물겹게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 사랑하는 과정,
연정 그 자체는 아닐까.
   유치환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 하고자 운을 뗀다는 것이 그만 사랑에
관한 서설을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결과가 되었다. 유치환의 삶과 작
품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랑 또한 이러한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판
단되기 때문이다.
   이제 유치환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그의 사유와 사랑을 만나보자.

 

                                  2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 져도
소리 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바위」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련한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청마 유치환(1908~1967)은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靜寂」을 발
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공식적인 창작활동은 1931년부터라지만
유치환은 그 이전부터 오랜 기간 동인지를 통해 활동해 온 터라 상당
한 습작기를 거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창작활동 시기에 있었던,
일제 강점과 해방, 6·25전쟁과 분단, 독재와 4·19혁명 등의 큰 사건
들만 헤아려 보아도, 유치환의 시는 그야말로 우리 역사의 파란의 정
점들이라 할 만한 시대를 배경으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적 자아의 고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유치환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사변적이고 진취적인 경향의 시가 하
나의 축을 이루고 있고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경향의 시가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두 시는 각각 그 경향을
대표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작품들이다. 전자의 경우로
「깃발」이나 「생명의 서」와 같은 작품들도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위의 시 「행복」을 비롯한 「그리움」, 「기다림」과 같이 서정성이 깃든
연정의 시가 더 공감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품 「행복」을 보면 20여 년간 이어졌던 이영도 시조시인과의 연서
를 떠올릴 만하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문학이란 높은 윤리의 태반
에서 낳아지는 것”이라 한 유치환의 언술과 대치되는 행동으로 평가하
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토닉 러브’라 명명하며 신비화하
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그 사건의 진실이나 그에 대한 해석의 진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유치환의 문학과 사유의 궤적에서 그의 사랑의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유치환의 문학과 사랑, 그리고 사회현실에 대응하는 태도에는 한 가
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을 관류하는 정신사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
이다. 여기에 접근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유치환의 시세계에서 그 근간
을 이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고독이라는 정서의 의미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3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亞喇比亞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을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생명의 서(1장)」

   고독은 그의 초기시에서부터 줄곧 등장하는 소재이자 시정신의 근
간을 이루는 정서 중 하나이다. ‘삶의 애증’에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유치환은 끊임없이 자신을 사막과도 같은 고독의 관념 속에
침잠시켰다. 이 대목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짜라투스트라의 동굴을 연상시킨다. (유치환이 니체의 영향을 받았음
은 몇몇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산에서 내려온 짜라투스트라는 ‘저 세계’만을 바라보며 현 세계를 부
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신은 죽었음을 알리고 다닌다.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자신이 ‘왜소’해지고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껴’
올 때면 홀로 다시 산 위의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짜라투스트라에게
동굴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시간이자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고독의 공간
이다. 동굴 속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한층 고양된 자아로 거듭나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된다. 더 강
해진 짜라투스트라는 비로소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세계에 응전할 용
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유치환에게 고독은 짜라투스트라의 동굴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열렬
한 고독’ 가운데서 유치환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
다. ‘삶의 애증’에 허덕이는 과거의 자신을 응시하고 성찰하고 극복하
고 정화하는 것이다. 유치환 시세계의 전시기에 걸쳐 고독이 주조적인
정서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과정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유
치환의 삶과 문학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에서 볼 때 그의 삶이란 더 한층 정화되고 고양된 자아를 창조하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유치환의 정신
사적 면모는 그의 문학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4
   “나는 시인이 아니다” (유치환, 「나의 시에 대하여」, 『세대』)
   유치환은 시라는 예술작품이나 그것을 제작하는 시인이라는 예술가
를 두고 자신을 보면 자신은 도저히 시인이 될 수 없고 시인이 아님을
여러 지면을 통해 밝혔다. 유치환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그에게 시
란 “생명의 목마른 절규 같은 데서 자연 발생”한 “문학 이전의 소재”이
며 “시 이전의 토로”(유치환, 『쫓겨난 아담』)이다. 즉 유치환에게 시란
하나의 완성된 예술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진
의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시를 쓰고 지우고, 지우고 또 쓰는 동안에 절로 내몸과 마음이 어
질어지고 깨끗이 가지게 됨이 없었던들 어찌 나는 오늘까지 이를 받
들어 왔아오리까.”(유치환, 「서」, 청마시초)


   위 인용글에서 확인되듯이 유치환은 시에 관해 목적이 뚜렷했다. 그
에게 시란 일종의 도구였던 것이다. 예술지상주의적인 문학인들에겐
탐탁지 않게 들리겠지만 유치환에게 시란 생리적인 배설과 같은 직정
의 토로이자 이를 통한 자기정화의 도구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사
실 유치환은 자신에게 시가 제일 우선은 아님을, 인생이 우선이고 인
간이 우선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그러므로 유치환에게 있어
서 시를 쓴다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예술행위가 아니라 삶의 구도자로
서의 수행과도 같은 의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유치환의 사랑으로 돌아가 보자.

 

                              5


무척이나 무척이나 기다렸네라
기다리다 기다리다 갔네라


날에 날마다 속여 울던 뱃고동이
그제사 아니 우는 빈 창머리
책상 위엔 쓰던 펜대도 종이도 그대로
눈 익은 검정 모자도 벽에 걸어 둔대로

두 번 다시 못 올 길이었으매
홀홀히 어느 때고 떠나야 할 길이었으매
미래未來없는 억만億萬시간을
시간마다 기다리고 기다렸네라


흐림 없는 그리움에 닦이고 닦이었기
하늘에 구름빨도 비취는대로
이름 없는 등성이에
백골白骨은 울어도


그때사는 정녕
너는 아니 와도 좋으네라
                                 ― 「기다림」


   위 시에서는 ‘무척이나 무척이나’, ‘기다리다 기다리다’와 같은 반복
화법으로 화자의 절실한 기다림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심정
은 점층적으로 심화되어 2연과 3연에 가면 극에 달하게 된다. ‘미래未來
없는 억만億萬 시간’이라는 무시간성은 기다림으로 화석화된 시적 자아
의 내면의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마
지막 연의 ‘그때사는 정녕/ 너는 아니 와도 좋으네라’이다.
   이토록 절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토로하고 있음에도 화자는 왜 기
다리고 기다리던 임이 오지 않아도 좋다고 한 것일까. 그리고 임이 오
지 않아도 좋을 ‘그때’란 과연 어떠한 때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때’의
의미는 그 앞의 연에서 밝히고 있는데 ‘그때’란 바로 하늘의 ‘구름빨’도
비칠 만큼 ‘흐림 없는 그리움에 닦이고 닦인’ 때를 의미한다. 이 ‘그리
움에 닦이고 닦인 때’라는 시구에서, 우리는 그리움이나 기다림이라는
정서가 화자에게는 자기정화의 기제가 되고 있음을 간취해 낼 수 있
다. 즉 임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과정이 자신을 성찰하고 극복하고
정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유치환이 연정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산문을 보면 이러한 의미
는 보다 명확해 진다.


   그것이 관능적인 계략이나 정욕의 발작이 아니요, 어디서 연유한
지도 모를 근원적인 이성에의 진실한 갈망에서 오는 연정이라면, 그
애틋하고도 짙은 황홀한 연소로 말미암아 인간의 바탕은 얼마나 지
순至純하며 지선至善하여지는 것인가? 지순 지선한 것은 언제나 진실
하고 깊은 회오悔悟를 상반하기 마련인 운명인 것이다.
― 유치환, 「‘눈 감고 죽고 싶다’고」, 청마 유치환 전집Ⅴ


   유치환에게 ‘연정’은 ‘관능’, ‘정욕’ 등과 같은 본능이나 직관적 정서와
관련된 개념이 아니다. 그에게 ‘연정’은 ‘갈망’, ‘애틋함’, ‘짙고도 황홀한
연소’의 과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유치환은 이러한 과정이 ‘인간
의 바탕’을 ‘지순至純’하고 ‘지선至善’하게 만드는 과정이라 여기고 있다.
유치환의 사랑에 관한 의식이 이러하기에, 작품 「기다림」에서 임이 오
고 오지 않음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의 시에서
임은 오지 않아야 한다. 그러할 때에라야 자기극복, 자기고양의 과정
이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유치환의 시에서 임과의 합
일은 계속 유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치환은 임을
‘가상假像’이라 설정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가 이렇듯 당신을 애모愛慕함은 무슨 연유이
랴?
당신의 용모? 당신의 자질?
- 아니거니!
당신을 통하여 저 영원에의 목마름을 달래려는 한 가상假像으로-
그러기에 아득한 별빛을 우러르면 더욱 애닲게도 그리운 당신!
                                                                    ― 「목마름」


   ‘당신’을 애모함은 ‘당신’의 용모, 자질 때문이 아니다. 나아가 ‘당신’
은 용모, 자질을 갖춘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다. ‘당신’은 ‘아득한 별빛’
과 같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당신’과의 만남은 영원히
유보될 뿐이므로 ‘당신’은 하나의 ‘가상’이다. 유치환은 이렇게 사랑이
완성에 이르지 못하도록 사랑하는 대상을 ‘가상’으로 설정해 두고 끊임
없이 기다리고 애달프게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과정은 바로 유치환이 자신을 지순, 지선하게 정화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유치환이 타계하기 직전까지 20여 년 동안 이어졌던 한 여인을 향한
연서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이렇게 말
이다. 유치환이 사랑한 것은 이영도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유치환에게 이영도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하나의 이미지이며 가상이
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사랑이란 필연적으로 지독한 고독과 애달픔이
자 끝이 없는 기다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치환은 이 지독한 고
독과 절절한 그리움 속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했던 것이고, 성찰과 극
복의 과정을 통해 고양된 자아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아름답게 창조하
는 행위이다. 이렇게 본다면 유치환은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
한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유치환이 끊임없이 응시하고 있었던
것은 문학, 사랑하는 대상, 세계 자체가 아니라, 문학하는 자아, 사랑하
는 자아, 세계에 대응하는 자아였으며, 그는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늘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시인이었
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