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작을 소개합니다. 비움과 흔적의 의미를 살짝 엿보세요.
흔적
1
뚜껑이 허술하게 닫혀 있는 빈 음료수병은 비울 것 다 비웠다는 말을
하는 듯하다. 비어 있지만 넉넉해 보이는 여유를 빈 병이 서둘러 보여준다.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컵 또한 이제 더 쓰일 일이 없다는 시늉을 한다.
아무렇게나 찢어버린 과자봉지, 책상 위에 구겨진 채 나뒹구는 이런저
런 영수증들은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느긋하다. 나는 그 여유 있는
표정들을 좋아한다.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쓰레기에도 정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
다. 찢어진 과자봉투 속에 남은 과일조각은 어김없이 초파리를 불러들
인다. 내 마음을 끼적거리던 쪽지도 가만 들여다보면 그 물건을 살 때의
설렘이 끼어 있다.
살아가면서 인간은 수많은 쓰레기를 만들고 또 버린다. 사람이 쓰다
가 벗어놓은 삶의 껍질인 쓰레기는 나름 거짓이 없다, 쓰레기는 정직하
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집안에는 늘 쓸모없는 물
건들이 쌓여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딸들이 버린다고 내놓은 것도 다시
보고 왜 버리느냐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도로 주워 담는다.
입으로는 정리하라면서, 손으로는 도로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나를 보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속에는 다 쓰지 않은 로션부터 몇 년 지난
참고서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어쩌다가 필요할 때가 생기면, 그 순간에
는 잘 챙겨두었다는 듯이 우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극히 드문 경우이
고 그냥 집안 어딘가에서 뒹굴다가 결국은 버려지는 게 다반사다.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버렸다가, 뼈저리게 후회한 적도 있다. 정리를
철저히 하고 좀 깨끗하게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하며 당장 이사 갈 사람
처럼 이것저것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북새통에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
끼던 물건 하나를 버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큰애가 아쉬워하는 모습에
괜히 버렸나 하는 후회를 했다. 갑자기 그것을 준 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한동안 우울했다.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그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 못했다. 게으른 성격에 좋은 핑곗거리를 얻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후로는 무엇을 함부로 버린다는 게 쉽지 않았다. 더 이상 버릴 게
없는 게 완벽함이고 자유로움이라면 난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있는 셈
이다.
버린다는 것은 한순간의 필요와 불필요라는 단호한 결정으로 판가름
이 되는 다소 냉정한 심판과정이다. 함께했던 일이 순간의 결정으로 안
과 밖이 바뀌는 일이라 서운한 적도 있다. 그런데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
는 뜻이며, 얽매이지 않는다는 내 나름의 가벼운 철학이다. 문제는 나의
사소한 집착이며 우유부단에 있다.
지금 나에게는 제대로 덜어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덜어내야 할
것은 쓸모없는 물건만이 아니다. 덕지덕지 굳어버린 이런저런 생각의
부스러기도 깨끗이 지워야 한다. 고정관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상투적인 발상을 덜어내고 거기에 새롭고 참신한 생각을 심어야 하
는 것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얼마 전 한 식당에서 우리 가족은 음식이 나오는 동안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조용히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터
넷에, 게임에, 만능이 되어버린 휴대폰은 심심한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족 간의 대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휴대폰 때문에 대화가 사라지는 상
황이 생긴 것이다.
올해는 내 집안, 내 마음을 좀 더 가볍고 헐렁하게 만들어볼 생각이다.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씩 정리하다보면 빈 공간 사이로 좋은 기운이 바
람처럼 스며들 것이다.
2
서울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며칠째 한파 예보
가 계속되고 있던 터라 깁스한 사람처럼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도 찾아
꼈다.
구포역에 도착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기차가 곧 들어온다는 안내방
송이 나왔다. 그런데 내 표가 보이질 않는다. 조금 전 승강장으로 내려오
면서 객차번호까지 확인했는데……. 가방과 선물꾸러미, 호주머니까지
다 뒤졌지만 없다. 장갑 낀 손이 어색해서 벗었다 꼈다 하는 사이에 흘렸
는가 보다. 되돌아가서 표를 챙겨야겠는데 성질 급한 기차는 벌써 고개
를 디밀고 있다. 갑자기 머릿속이 어지럽다. 얼핏 보았던 좌석번호를
기억해내야 했다. 내가 탈 객차번호는 확실하니 일단 올라섰다. 그리고
무조건 머릿속에 떠오르는 번호에 가서 앉았다. 마치 무임승차라도 한
듯 묘한 기분이 들면서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승무원이 들어왔다. 나에게 말을 걸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마치 시험지가 내 앞으로 빠르게 넘어오는 듯 긴장이 되었다. 자리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그래도 이 객차 안의 한 자리는 확실히 내 것이라
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조바심도 났다. 다행히 그대로 지나가서
일단 안심은 했지만, 그 후로도 한동안 눈치를 보았다. 서울역에 도착하
니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떼어낸 듯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어스름한 저녁, 당일치기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허둥대던 아침 녘의
장소를 두리번거렸다. 차가운 바람에 밀리고, 누군가의 발에 차이고 있
었을 나의 애간장. 그러나 길바닥은 깨끗했다.
어느새 내 마음을 스쳐지나가는 홀가분한 바람결이 어지럽던 마음을
깨끗이 지우고 있다.
신인상 수상작가의 소감 ----------------------------------------
작은아이 중학교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아이의
뒷모습에 가슴이 뭉클했지만, 한편으론 삶의 한 조각이 쑥 빠져 버리는
것 같은 서운함도 들었습니다.
그날 오후, 신인상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허전했던 마음에
기대와 설렘이 가득 담긴 새로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수필을 배우면서
저의 마음을 스스로 보듬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지나가는 세월에
묻혀 접어두었던 꿈을 위해 다시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
어서 행복합니다.
저에게 늘 힘이 되어주시는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집안 일이 소홀
해도 불평 없이 견뎌주는 남편과 언제나 엄마 편인 두 딸 사랑합니다.
부족한 습작을 가장 먼저 읽어주는 친구 경희 씨와 창작 동아리 여러분
고맙습니다.
낯설게 세상을 보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선생님과 막연
했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신 ≪수필과비평≫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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