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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3월호, 세상마주보기] 신들린 여자 - 고은

신아미디어 2012. 3. 13. 09:13

고은님의 외침과 울림을 느껴보세요.

 

신들린 여자

 

   햇덩이가 산등성이로 떨어지면 고요한 강물은 구릿빛 내 몸을 받아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말랑한 물의 가슴을 더듬으며 내 생애의 어디쯤
도달하면 이만한 안위를 만날까. 물마루 아슬아슬 디디며 허우적댔지만
허전한 발은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절망과 희망을 함께 껴안고 허기와
눈물로 밤마다 나를 찌고 우려도 뚜렷한 꿈 한 모금 고이지 않았다. 미친
다는 건 몸을 던지는 것이다. 외줄인 세상을 중심 잡고 가기 위해 끝없이
출렁이며 곧추서는 것이다. 아프지 않기 위해 상처에 드는 것이다. 눈을
감고 내 안을 가만히 응시하면 사자 혓바닥 같은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생의 모토
   유재건 劉在建(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읽다가 김덕형이
란 인물을 발견한다. 그는 특히 화훼 그림에 솜씨가 뛰어난 사람인데
한 폭이 완성될 때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소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다. 본래 이름도 없이 김 군으로만 통했던 이 사람의 작품인 ≪백화보≫
라는 그림책은 그가 미쳤다고 손가락질받으며 그려낸 작품으로 역사에
그 공훈이 기록될 만큼 뛰어난 것이라고 한다. 꽃을 하나 그리기 위해서
날이 밝기도 전 꽃밭으로 달려간다. 아예 꽃 밑에 자리를 깔고 누워 하루
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꽃의 생태를 살핀다. 집에 손님이 왔다고 전갈
이 와도 방해가 된다 하여 만나지 않았다.
  아침에 이슬을 머금은 꽃망울이 정오에 해를 받으면 어떻게 꽃잎이
열리고 저녁에 닫히는지. 그러다 마침내 어느 순간 떨어지는지 1년 내내
꽃 아래서 살았다. <백화보>는 도저히 정상으로 보기 어려운 그의 집착
과 열정과 애증이 빚어낸 결정체이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그린 그림
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꽃빛깔도 퇴색되지만 그의 그림책 속의
꽃들은 늘 변치 않고 절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벽돌쌓기
   높은 곳을 향하여 더듬이로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도 언젠가는 닿을
수 있다는 꿈 하나 붙들고 저리 아픈 팔과 다리로 허공을 움켜쥐고 기어
오르건만 내겐 실낱 같은 불빛 하나 잡히지 않던 참 막막하던 계절, 저기
까마득히 줄지어 엎드린 것들은 필경 내가 지고 가야 할 업보이거나 일
생 넘어야 할 산인지도 모른다. 칠팔월 염천, 끓어오르는 땅의 열기를
반항 한번 없이 끌어안고 있는 저기 저것들은, 필경 내가 일생 쏟아야
하는 눈물방울의 숫자인지도 모른다.
   가로 18센티, 세로 30센티미터의 시멘트 벽돌을 끊임없이 뒤집고 있
다. 허리를 편다거나 하늘을 봐서는 안 된다. 해가 지기 전, 끝 보이지
않는 너른 공터에 어른들이 박아놓은 벽돌을 정확한 타임에 반드시 뒤
집어 줘야 한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친척집 형부가 운영하는 벽돌공
장에서 특별히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뼈와 키가 채
자라기도 전 과중한 무게의 삶을 지고 나는 시키는 대로 주어진 일을
감당했다. 그때 내 나이 열다섯 살. 수천 수만 개의 벽돌을 날라다 쌓아
놓고 고르게, 기울지 않게 쌓였는가. 요리조리 만져보고 갸우뚱하며 거
리를 재고, 크기를 쟀다. 벽돌이 높다랗게 쌓여갈 때마다 막연한 희열을
느끼곤 했다. 상념이 오락가락하는 사이 벽돌이 삐끗해서 무너지기라도
하는 날엔 내 밥그릇도 한꺼번에 깨어지고 말았다.

 

도전장을 내다
   “영업은 가장 정직한 과학이다.” 누군가 세상을 향해 던진 이 말의 화
두를 잡고 나의 제2의 인생은 시작된다. 양파처럼 나를 둘러싼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 세상과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한 꺼풀씩 벗고 싶었다. 자신
에겐 언제나 냉정하고 단호했다. 스스로를 낭떠러지에 세우고 살아남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시험해 보기도 했다. 진정한 과학을 일구어 내고
체득하고 싶어 낯선 세상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대다수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치고 예고 없이
닥칠 재난으로부터 모든 가정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기 시작했
다. 결정적 계기는 30대 초반 가장의 죽음을 보고, 두 아이의 미래와 가
정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부터였다. 결혼 6년차 고객이었던 K씨
는 아들만 둘을 두었다고 든든해 하며 삶에 최선을 다했었는데 야간 근
무를 하고 귀가하던 중 빗길에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가 설계해준 상품에서 두 자녀 대학까지의 학자금과 아파트 한 채 구
입할 수 있는 자금이 나왔다.
   사람을 잃었는데 돈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그 사람은 아직
도 삶이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이렇듯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고 대한다거나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가슴은 더 뜨거워졌다. 그런 사람들을 발 빠르게
찾아내어 참 취지를 알려야겠다는 절심함이 더해갔다.
   일이 주어지면 먼저 잘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를 갖고 자기 최면을
건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최대한 침착하고 진실하게, 스스로를 격려한
다. 이렇게 하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자신감을 얻는다.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고, 우쭐하기보다는 겸손하며…. 개인적인 상담도 물론 하지만
불특정 다수인을 만나 상담을 하고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재난으로부
터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자 스스로를 채찍하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외길을 걸어오며 23년간 수십만의 사람을 만났지 싶다.

 

외침
   기회에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이 있다. 책상 앞에 앉아 펜대만
굴리는 사람은 선망의 대상이고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미개
한 나라에나 있을 법한,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사회적 인식이 안타깝다.
대다수의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게도 격려의 시선을 보내주시라. 사
회는 전문화·세분화 되어가고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1인 3, 4역을 감당하며 나라 경제, 지역 경제를 살찌운다. 모든 사람의
가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중차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크다.
우리를 누추하게 보지 말라. 정말 누추한 건 더러운 명예를 좇아 나비처
럼 여기저기 옮겨 앉는 일이다. 롱런 하는 동안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타 회사에서 스카웃 유혹도 여러 번 있었지만 오늘까지 나를 키워 준
당사와 나와 인연된 많은 고객들을 생각할 때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껏 나는 온몸을 던져 정직한 과학을 이루는 데 앞장섰고 몸 사리
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 되기 위해 몸부림 쳤고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내조자로,
어미로서의 역할에 게으르지 않았다. 단 한번밖에 없는 삶이 안타깝고
성스러워 어찌 허투루 살아낼 수 있었겠는가.

 

참 신神을 위하여
   삶의 솔기마다 어루만지며 가끔 나태와 안일에 빠져 있을 땐 정신을
후려치는 죽비소리를 듣는다. 사람 만나는 걸 제일 무서워하던 내가 역
으로 사람을 끝없이 만나는 일을 하게 된 데는 나를 향한 신의 특별한
섭리가 있음을 믿는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
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시느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
렀나니….”(여호수아 1장 5~9) 무시로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
   오늘날까지 나는 썩어질 육신을 위해 몸 던져 충직하게 일해 왔다.
육신보다 더 귀한 건 영혼이다. 은행 잔고가 대책 없이 빠져나가듯, 내
생의 잔고도 눈 깜빡할 사이 거의 빠져 버렸지만 기회가 되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데 몸바쳐 일할 것이다. 넘어
질 때 일으켜 눈물 닦아주시고 끝없는 연단을 통해 잘 벼리어진 나를
그분의 도구로, 제대로 쓰임받는 날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오! 나의 하
나님!

 

 

고은 -------------------------------------------------------
2005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신들린 여자≫.
시집: ≪꿈꾸는 콩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