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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3월호, 촌감단상] 바람결에 묻혀왔다 바람 타고 갔노라 - 백남일

신아미디어 2012. 3. 11. 13:51

백남일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잔잔하지만 소중한 것을 얻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바람결에 묻혀왔다 바람 타고 갔노라

   임진壬辰 해토머리에 5대조 산소를 파묘破墓했다. 사대봉사四代奉祀는
면했지만 묘소가 외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선영에 가족납골묘를 조성
하려면 우선 화장부터 해야만 됐기 때문이다.
   150여 년의 세월을 정지된 시간 속에 묻혀 있을 시신은 삽차가 표토表
土를 걷어내자 광중壙中의 윤곽이 삼태기마냥 드러났다. 황토 생땅과 연
갈색 부토腐土의 구획이 확연했다. 과연 유골이 남아있을까 하는 우려와
호기심으로 조심스럽게 긁어낸 흙을 연신 삽으로 떠내곤 했다.
   이윽고 긴장된 작업 속에서 삭정이 같은 뼈 부스러기 몇 점과 두개골
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형의 형체는 호미 끝에서 풀썩
와해되고 만다. 미진微塵한 존재 그렇다, 그건 숨결에도 흩어지고 마는
티끌에 불과했다.
   조가비를 엎어놓은 듯 10여 기의 봉분들이 흩어져 있는 선산은 6, 70평
이 실하다. 추석 무렵이면 서너 대의 예초기가 한나절 내내 웽웽거려야
벌초를 끝낼 수 있는 면적이다. 납골묘가 완성되면 묘지를 과감하게 줄
여야겠다. 관리의 수월성 말고도 훼손된 멧갓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
려 놓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의 매장埋葬 문화는 기존의 토장에서 화장 선호로 바뀌어가
고 있다.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화장률이 58%라고 한다. 더구나 그
파급 추세가 가속적이라니 비좁은 국토를 생각하면 바람직한 현상이 아
닌가 한다. 나 또한 응당 사후에 화장하여 부모님과 한 방에서 뗏장 이불
을 덮을 수 있도록 유언해야겠다.
   그런데 막상 생을 마감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흔적 하나쯤은 남겨놓아
야 되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앞선다. 한 줌의 재로 변하여 본연의 위치인
흙으로 되돌아가는데 무슨 표지가 필요할까마는, 깜냥대로 살다 간 내
인생의 묘비명墓碑銘으로 도막 글 하나쯤 던지고 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존재와 망각의 환승역에 펄럭일 묘지명! 이는 떠난 이의 체취가 묻어
날 한 인간의 삶을 압축했다고 볼 수 있을 게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
를 위해 쓴 묘지명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러 백발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는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하고 자식을 죽인 한을 토로했다.
   그런가 하면 처칠은 “나는 창조주께 돌아간다. 창조주는 날 만나는 고
역을 치를 준비가 됐는지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익살을 피우고 서거했다.
   또 어느 시집 못 가고 죽은 처녀 우체국장의 묘비명은 “반송返送-개봉하
지 않았음”이라고 숫처녀의 순결성을 온전히 지니고 떠났음을 항변했다.
   노을 비낀 황혼에 선산의 구도를 짚어보고 내려오는 발길이 구름 위
를 걷듯 자꾸만 휘청거린다. 멀리 솔밭을 거슬러오는 바람결에 서해의
파도 소리가 간간이 묻어온다. 그 바람결에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 티끌
같은 내 육신이 사부자기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음은 어인 일인가?

 

 

백남일  -----------------------------------------------------
1994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여백의 철학≫, 선집: ≪억새들의 춤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