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비평 2012년 2월호에 수록된 작품에 대한 김상태님의 감상입니다.
이 평이 작가들의 글에 대한 무한자유를 자극하는 하나의 바람이기를 기대합니다.
수필과 화자
1
화자(narrator)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호(≪수필과 비평≫ 122호)에 간단
하게 언급한 바가 있다. 소설이나 시에서만 적용되는 용어인 것으로 흔
히 생각한다. 그러나 수필에서도 화자가 엄연히 존재한다. 수필은 대체
로 작자가 화자로 인식되기 때문에 시나 소설과는 달리 작자와 화자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엄격하게 말하면 문학 작품에서 화자만이
말할 수 있고, 작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S. 챗트맨
(Seymour Chatman)이 일목요연하게 보여준 바에 의하면, 우리가 문학작
품을 읽을 때 화자(narrator)와 피화자(narratee)만이 직접 대면하게 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실제 작가와 대척되는 곳에 실제 독자가 있고, 작품
속에서 말없이 떠오르는 내포작가가 있고, 그 대척되는 곳에 내포독자
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예시한 도표를 그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실제작가-[내포작가-(화자-피화자)-내포독자]-실제독자
그러니까 서사 텍스트는 […] 안에 든 경우만을 말한다. 실제 작가는
내포독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다. 반면에 실제 독자 또한 작가나
독자 자신이 상상한 실제 독자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강도짓을 할 수
있는 흉악한 인물이라도 아름다운 정이 넘치는 소설을 읽을 때만은 착
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오래전 일이다. 지방의 여류 문인들이 유주현 씨를 초청해서 강연을
들었던 적이 있다. 유주현 씨는 당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었던 ≪조
선총독부≫를 쓴 작가다. 그런데 실제 작가 유주현 씨를 처음 보게 된
여류 문인들은 적이 실망했다고 했다. 상상한 대로의 작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가 유주현을 ≪조선총독부≫에 나오
는 잘 생기고 명민한 청년 주인공과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모양이
었다. 우리는 작가를 만나보기 전에는 작품을 통해서 작자의 이미지를
그린다. 작품집의 어디에 사진이나 캐리커처가 나와 있으면 실제 작가
와 조금 비슷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작가
와는 많이 다르다.
수필에 있어서 대체로 화자는 작가의 음성과 말투를 많이 닮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의 실제 체험에 근거해서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를 꾀하는 작가는 실제의 말투와는 전혀 다른 화
자를 내세울 수 있다. 우리는 이 양자를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고,
구별해서 다루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
김윤재의 <착각이라구?>는 남편을 비방하는 말투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남편을 바꾸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가 손을 대면 고장 난 라디오가 소리를 내고, 형광등이 번쩍 들어오
는 재주꾼이었으면 좋겠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무뚝뚝하고 가족
들만 사랑하는 차가운 남자였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
고 재주가 다른 것은 인정한다. 모두 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면 상권이
무너질 것이니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못 하나 정도는 쿵쿵
박아야 두 손 모아 쥐고 용사 바라보는 나약한 여성의 모습을 취해 보지
않겠는가.
결혼식 후 괜히 트집을 잡자고 몰려온 친구들을 잘 처리하고 올 때만
해도 “믿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이후 기대와는 전혀 어긋나는
행동만을 해 왔다는 것이다. “집안일을 슬슬 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서 가재도구가 고장 나도 전혀 고칠 엄두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이뿐이
면 남편을 바꾸고 싶어 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못질하다
손톱치고, 세차하다 상처내고, 쌀통 들다 엎지르고 잔디는 쥐 파먹은 듯
잘라놓고, 상추며 쑥갓 싹이 풀이라며 뽑아 버리는” 남편, “택시기사에게
친절하기, 술집아가씨들 챙겨주기, 선후배들 돌아보기”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한두 가지 아니었다. 정말 속 터진 사건은 “이사관이 되면
후배를 위해 멋지게 물러나겠노라고 했지만 그냥 하는 소리겠지 생각했
었다”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니까 자기와는 상의도 없이 결행해 버렸다
는 것이다. 이 밖에도 남편의 결점을 수없이 나열했지만, 결국 “남편의
결단력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말았다.”라고 했다.
화자는 남편을 헐뜯는 말투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 속에 패러독스가
숨어 있다. 언술한 말과는 달리 남편을 믿고 사랑하고 있는 진정이 느껴
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고생을 했으니 좋아하는 책 실컷
읽으면 좋으련만 왜 내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는지 모르겠다. 누가 설거
지 하랬나. 빨래 널어 달랬나. 장바구니 들어 달랬나……” 이런 말 속에
서 우리는 그 역설을 느낄 수 있다.
화자의 말만으로 독자는 함축 작자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말뜻을 새기며 함축 작자를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역설을 통한 수필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송순녀의 <어느 집사 이야기>는 충청도 어느 촌부의 말투로 이야기하
는 작품이다.
헤헤,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이구만유. 밥 있으면 밥 먹고 죽
있으면 죽 먹으면서 살아가는 그러저러한 사람이구만유.
얼마 전부터 등도 시리고 옆구리도 시려 오더만유. 집구석에 들어가
봤자 이 잡아 주고 때 밀어 주는 사람도 없이 늙어 가는 게 좀 거시기
해서 햄스터 두 마리를 키우기로 했구만유.
왜 하필 햄스터냐고 물으신다면 헤헤, 제가 싼 걸 무지 좋아하거든유.
그래서 마리당 오천 원을 달라는 걸 깎아서 암수 두 마리를 팔천 원에
샀구만유. 근디 날도둑들 같으니라고, 벼룩의 간을 빼먹을 일이지 햄스
터 집이며, 사료, 이갈이, 쳇바퀴, 간식으로다 육만 칠천삼백팔십 원이
들었당게유.
만약 화자가 지식인이고 표준어로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재미
없는 작품이 되었을까. 작품성 자체가 문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다. 이 촌부의 말투를 따라 읽다 보면 햄스터의 삶을 보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을 보고 있다. “솔방울만 한 것이 밥 주는 주인이라고 알아보고
는” 온갖 귀여운 짓을 하는 데 반해 버렸다. “유식한 말”이라고 표현하면
서 그것을 “인간과 동물과의 교감”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화자가
반드시 무식한 촌부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주일 후 새끼를 네 마리나 낳고는 정성껏 새끼를 돌보는 어미의 정
성에 감동하기도 한다. “호, 송방울만 한 것도 어미는 어미대유. 사람과
똑같이 아니 어쩌면 사람보다 더 지극한 정성으로 새끼들 젖을 먹이고
품속에 안아서 키우느라고 고생을 하대유.” 작자는 동물을 보면서 미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 생각을 한다.
햄스터가 자라면서 동물 본성을 드러낸다. 서열 다툼을 하고 먹이를
위해서 아귀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돌보는 일이 너무나 성가셔서 산속
에 몰래 방생을 할까도 생각하지만 죄 짓는 것 같아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암컷들은 쉴 새 없이 새끼들을 배고 낳고, 수컷들은
피를 튀기며 서열싸움을 하고 종족을 번식시키고, 그 와중에 태어나는
놈, 먹는 놈, 자는 놈, 싸우는 놈, 병드는 놈, 죽는 놈…….
작자는 햄스터를 보면서 “존재로서의 욕망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오
늘도 저 윤회의 수레바퀴를 쉴 새 없이 돌고 또 돌고 있는 것이겠지유.”
라고 말한다. 촌부이지만(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독자는 알고
있다.)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이다.
남홍숙의 <새의 울음에 들다>는 밤에 듣는 다급한 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간 남편을 연상해서 쓴 글이다. “가끔, 내가 사
는 밤하늘에선 직벽에 부딪히는 파선 같은, 새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
다. 잔잔하던 허공은 파문을 일으키고 잠들었던 이들은 불청객을 맞이
하듯 깨어난다. 그것은 급정거로 끼익 하는 자동차 소리거나, 불이 났을
때 다급하게 쳐댔던 내 유년의 종소리를 연상케 한다.”
“새의 울음은 오래전에 내 안에 머물던 조금 먼 과거의 기억을 길어왔
다.” 남편은 “깜깜한 밤에 불현듯 천적에게 잡혀 먹힌 새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앰뷸런스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젊
은 남편은 그 소리 속으로 사라졌다.” 새의 울음소리에서 연상되어 남편
을 잃은 슬픔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자신에게 닥친 일을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한다. 화자와 작자가 분명히 구별되는 목소리다.
이처럼 대부분의 삶은 슬픔과 불안을 빛 안으로 숨기고 기쁨과 평화
로 가장하는지도 모른다. 한밤중에 들려오는 간헐적인 새 울음은, 우리
마음 안에 본질적으로 박혀있는 생의 가장 보편적인 아픈 모양새이며,
이 굴곡진 틈새를 견디는 시간 속에는 보석 같은 생이 숨어 있는 것이다.
절박한 생의 길은 나뿐 아니라 새의 울음 속에도 있고, 깜깜한 밤의
고요 속에도 피울음의 파장으로 파묻혀 있는 것을. 우리 모두의 삶 속에
험난한 세상을 견디다 터져 나온 속울음이 들어있고, 그 힘듦을 건너기
위한 내적 몸부림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서려 있는 것을.
작자는 밤마다 안으로 되새기는 “속울음”을 인간의 보편적 운명으로
치환시키면서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아픔을 줄이기 위하여
작자는 호주로 이주해 가 있는 듯이 보인다. “호주의 밤하늘에서 가끔
들리는 새의 울음은 과거의 내 내면의 소리면서, 나와 유사한 운명에
처한 누군가의 신음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는 화자라기보다 작자 자
신의 목소리와 거의 같다고 느껴진다.
신서영의 <까만 심지>는 작자의 내면을 정감 있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추억이 된 섣달 그믐밤의 불빛이 아득하게 보인다. 등이 조붓한 여인
이 연신 입을 달싹거리며 촛불 앞에서 손이 닳도록 비손을 올리고 있다.
부엌 뒤쪽 벽 모서리에는 촛농이 흘러내려 올망졸망한 탑을 쌓았다. 정
화수가 담긴 정갈한 사발을 촛불 앞에 놓고 절절한 치성을 드린다. 촛불
앞에 선 그녀의 등은 또 다른 한 자루의 은은한 촛불이다.
그녀가 작자일 수 있고, 그녀의 어머니일 수 있고, 아니 공원에 산책
나온 어느 노인네일 수 있다. 화자는 등이 굽은 노인네를 타자화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을 바라보고 있다. 비단 인간만이 아니다.
눈을 들면 여러 종류의 나목들이 섣달의 삭풍과 맞서고 있다. 나무에
도 등이 있다는 생각에 다시 잠긴다. 잎을 온전히 떨어뜨린 활엽수의
등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 보인다. 갯내를 몰고 오는 바닷가 공원은
유달리 바람이 세고 차다. 조심스런 나무들은 바람을 피해서 반대 방향
으로 가지를 뻗었다. 가지를 길게 뻗은 쪽으로 바람의 길을 내어주고
있다. 나무의 등에는 바람이 가지를 잃은 옹이가 아픔으로 눈에 밟힌다.
공원을 한 바퀴 돌 때는 아름답게 가지를 뻗은 앞면과 바람의 길이 있는
뒤태의 아픔을 헤아리느라 나무와 함께 한참을 걷는다.
바깥의 풍경과 내 안의 아픔이 함께하고 있다. 내면과 외면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산사의 풋풋한 바람 한 자락이 풍경을 치고 지나”가
기도 하고, “속을 텅 비운 맑은 소리에 마음과 귀를 헹구”기도 한다. “제
몸을 아프게 쳐야 울리는 풍경과 촛불의 속내는 한 또래 아니던가.” 하고
화자는 묻는다. 그것은 곧 작자의 마음이기도 하다.
신창선의 <어멍아 어멍아>는 일찍이 청상과부가 되어 한 맺힌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한 맺힌 사설이다.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면서 온갖 고난의 세월을 겪고 난 뒤에 이제는 “가난을 벗어나고
손자, 손녀가 재롱을 떨던 그런 시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만도 한데
어머니가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가슴에 막히고, 박히고, 맺히고
덩어리진 한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화산
을 지닌 여인의 내밀한 언어를 조금도 이해 못한 나의 불효가 어머니의
허망함에 또 다른 불을 질렀다.” 화자는 “어머니의 한을 깨닫는 깨달음
이 진정한 깨달음일 텐데 그렇지 못하는 나는 진정 누구인가.” 하고 부르
짖는다.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려고 ‘씻김굿’을 하고 있는 그 속에서
자신을 뒤돌아보고 있다.
어디선가 시나위가 잔잔히 울려오는 듯하다. 굿놀이패, 춤사위꾼들이
저멀리서 나에게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낸다.
“어머니, 굿마당 한 판 벌여 봅시다. 어머니에게 찐득하게 붙어 있는
모든 한을 풀풀 날려 버립시다.”
“어머니, 웃으시니까 좋네요. 예, 그렇게 그렇게 펑펑 웃으십시오. 웃
음 해일, 있다마다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가 아닌 살아있는 나를 위한 씻김굿이
었다. 굿거리 마당은 어머니와 나를 오가는 징검다리 위에서 길게 출렁
거린다. 그늘지고 외돌아진 굿판의 몸부림은 새로운 밝음을 향한 몸부
림이 되고 있다.
화자는 “한도 승화하면 커다란 아름다움이 되는구나.” 하고 외친다.
“어머니의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과거가 될 수 없다.”라고 자신을 뒤돌
아보면서 생각한다. 화자는 작자가 친숙하게 쓰고 있는 제주도 방언으
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춘설 속에 매화영 벚꽃이영 열심히 꽃망울을
틔우고 있수다. 천 년의 집 그곳도 봄 아니우꽈. 잘 계십서.” 한 맺힌
삶을 살다가 간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모곡이다.
이귀복의 <전등사의 시시포스>는 작자가 경험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전등사 중건 설화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까 작자의 시선으로 본 것도
아니고, 작자가 느꼈던 감정으로 기록되지도 않았다. 철저히 화자의 눈
으로 그리고, 화자의 감정으로 쓴 것이다.
이야기는 대강 이렇다. 전등사의 중건불사를 맡은 도편수가 주막 여
인의 꼬임에 빠져 같이 살림을 차릴 것이라고 그때까지 알뜰하게 모았
던 돈을 여인에게 몽땅 맡겼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돈을 챙겨가지고
야반두주를 한 것이다. 도편수는 여인의 배반에 분노로 치를 떨었다.
매사에 의욕을 잃고 하던 일을 중단하고 여인에게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나무토막으로 짐승 형상의 괴수
를 깎아서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칠했다. 그리고는 대들보에 매달아 대
대손손 그 여인이 죗값을 치르게 했다는 설화다.
사내가 사다리에 올라 기어이 계집을 끌어올리고 있다. 죄지은 계집
은 꼼짝없이 처마 끝에 쭈그리고 앉아 지은 죗값을 치르기 시작한다.
전등사의 대들보, 그건 온전히 발가벗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대들보가 무겁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거니와 죄인인 주제에 그 대들보에
목매달아 죽을 자유는 더더욱 없다. 죽음보다 무서운 권태, 여인이 그대
로 시시포스인 것을.
이 작품은 작자의 음성과는 구별되는 화자의 음성으로 이야기되고 있
다. 마지막 대목에 와서 화자는 작자의 음성과 닮은 말을 하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여인의 탐욕도 사내의 분노도 모두 우리의
모습이다.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고 사랑은 이별로 완성되는 법, 우매한
사내가 감히 그걸 짐작이라도 했을까.”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을 통해서 함축 독자를 우리는 상상한다. 주지 스님의 말, “전등사에
나부상이 존재하는 한, 도편수는 그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작자는 바로 이 말을 전해 주기 위해서 이 설화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3
수필은 작자의 체험에 근거해서 쓴다고 말한다. 바로 그 때문에 화자
와 작자를 구별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수필은 그 형식이 자유
롭다. 그 때문에 더구나 이 양자를 구별해야만 수필 작품의 바른 이해와
감상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화자의 말을 작자의 말로 바로 받아들이면
작품 본의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의 형식을 스스
로 구속해서 옹색한 글쓰기로 갈 수 있다. 수필에 자유를 주라. 그것만이
수필문학의 기를 살려서 21세기 문학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
주는 길이다.
김상태 --------------------------------------------
전북대·한양대·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한국비교문학회·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현,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생활수필쓰기 지도.
저서-수필집 ≪참말과 거짓말 사이≫, ≪여자대학의 촌티 나는 교수≫, ≪먼 꿈 가까운
꿈≫, ≪선생님 우리 선생님≫, 콩트 ≪유리구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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