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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7월호, 신작수필] 그대에게 바친다 - 한복용

신아미디어 2013. 9. 12. 11:18

"뭔지도 모르고 냉이를 닮았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캐온 황새냉이, 그 새로운 존재에 놀라고 그 맛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도감에는 그의 꽃말이 ‘그대에게 바친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호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나를 위해 그대를 바친다 하지 않는가. 나를 위해 온몸을 바친 황새냉이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서툰 솜씨로 어설프게 캐느라고 뿌리가 끊긴 이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그대에게 바친다     /  한복용수필가


   오늘 점심 밥상에 냉이를 무쳐 올렸다.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가 두어 시간 캔 냉이는 소쿠리의 바닥에 깔릴 정도였다. 모양만 잔뜩 잡고 나가 바람만 맞은 셈이다. 내가 캔 것은 잎이 냉이와 비슷할 뿐 실상 무슨 나물인지 의심이 가는 풀이었다. 한 잎 따서 향을 맡아 봤다. 별다른 향이 나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잎을 비벼서 으깨어 코밑에 갖다 댔다. 냄새가 나는 듯 마는 듯하다. 뿌리의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 맡아봐도 마찬가지다.
   돌아오는 길에 언니에게 들러 물어보았다. 언니는 모양만 보고서 대뜸 황새냉이라고 했다. 봄의 영양덩어리인데 이런 걸 어찌 알고 캐 왔냐며 어린아이에게 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니가 가끔 그런 식의 애정표현을 내게 했지만 이번은 왠지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입까지 벌쭉거리며 웃는 것이 아닌가. 내일모레면 나도 쉰 살인데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게 오늘따라 마뜩찮았다. 나는 언니의 손을 뿌리치며 장난 그만하라고 핀잔을 줬다.
   “이거 정말 냉이 맞어? 냉이가 뭐 이래. 잎은 짧고 뿌리만 굵고 길잖어.”
   언니는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얘, 황새냉이가 원래 이렇게 생겼어. 우리가 알고 있는 냉이보다 잎 길이가 짧고  색깔도 갈색에 가까워. 근데 맛은 정말 끝내 준다, 너?”
   이쯤 되면 놀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성급히 냉이를 언니 앞에 모두 쏟았다. 아까는 안 나던 향이 옅게 스쳤다.
모양을 자세히 보니 재미있었다. 잎은 5백 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펼쳐졌는데 뿌리는 무려 2, 30센티는 족히 돼 보였다. 몇몇 굵기가 굵은 것은 웬만한 도라지 2, 3년생에 가깝다.
   “한 끼 반찬은 되겠는걸? 나물 좋아하는 건 여전하네.”
   언니는 내가 봄마다 산과 들로 나물 캐러 다니는 걸 재미있어했다. 내가 따다 준 두릅으로 언니가 호사하는 날도 많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나물 캐는 걸 좋아했다. 어머니는 쑥을 뜯으면 쑥떡을 해주었고 달래를 캐면 그것으로 무침이나 양념장을 만들어 상에 올렸다. 고들빼기나 씀바귀는 김치를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어린 내가 캐는 나물이라야 데쳐놓으면 겨우 한 주먹 정도였으니 고작 한 끼 나물반찬도 될까 말까였다.
   집으로 돌아와 흐르는 물에 냉이를 씻었다. 다른 나물과 달리 냉이는 구석구석 잘 씻어내야 한다. 수돗물에 붉은 흙이 씻겨나가니 곧 뽀얀 살결이 드러난다. 보드라운 살결을 조심스레 문지르며 레인지에 올려놓은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물이 끓는다. 길쭉하게 잘 뻗은 냉이 뿌리를 한 움큼 집어 통째로 끓는 물에 넣었다. 뻣뻣한 기운이 솥 밖으로 뻗는다. 나무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여며 넣었다. 맑았던 물이 냉이가 익어감에 따라 검게 변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냉이 향이 난다. 이제야 냉이는 몸을 떨며 향기를 털어내는 것만 같았다. 한 번 뒤집어 놓고 기다렸다가 미리 받아 놓은 찬물에 데친 냉이를 꺼내 담근다.
   냉이를 꺼내 소쿠리에 받쳐 물을 빼고 양념장을 만든다. 나의 경우 나물은 주로 된장으로 무치지만 오늘은 고추장을 꺼냈다. 빨간 고추장에 냉이의 새뽀얀 살을 버무리고 싶었다. 들기름과 깨소금, 고추장이 양념의 전부다. 이것을 한데 섞어 양념장을 만든 후 물기를 짜낸 냉이를 볼에 넣고 함께 버무린다. 냉이 향이 날아갈까 들기름을 조금 넣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흰 바탕에 빨간 잔 꽃이 무리지어 핀 둥근 접시에 황새냉이무침을 담았다. 식탁에 올라온 냉이무침이 화사하다. 고추장을 넣어 붉은 기氣가 감도는 냉이무침이 있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냉이무침과 어울려 먹으려고 미리 쌀밥을 해 뒀다. 잡곡밥보다는 쌀밥이 더 봄나물과 어울릴 성싶었다. 기호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오늘의 기분에 맞춰 흰 쌀밥을 한 것이다.
   설렌다. 이 훌륭한 식사를 나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 아쉽다. 친구라도 한 명 부를 걸 그랬나. 마주앉아 봄나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다음에는 냉이가 많다는 흥덕사 부근으로 함께 캐러가자든지, 곧 두릅이 나오니까 두릅도 따서 나눠 먹자는 약속도 하고 싶은데 그럴 만한 친구가 없다. 혼자 살기에 익숙해져버린 탓인가, 외로운 것도 모르고 혼자이면서도 여럿인 듯 살아온 탓인가.
   왼손으로 밥 한 술을 떴다. 차진 밥알이 입안에서 녹는다. 나무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어 든다. 향이 코끝으로 전해진다. 밥상에 앉아 이렇게 기분 좋아보기도 처음인 듯하다. 나는 한입 가득 봄을 머금었다. 입안에 가득한 밥알과 냉이무침의 조화가 새롭게 느껴진다. 들기름 향이 냉이의 향을 돋우며 간간이 매콤한 고추장의 맛을 다독여준다. 톡톡 터지는 깨소금이야말로 봄나물을 씹는 데 심심치 않은 조연 역할을 한다.
   왜 언니가 황새냉이를 두고 봄의 영양덩어리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냉이의 효능이야 어디 갔든지 벌써부터 기운이 솟는 기분이다. 실제로 황새냉이는 인삼이나 산삼의 효능에 버금간다고 하니 오늘 나는 산삼나물 한 접시를 혼자서 먹은 셈이다.
   도감을 찾아보았다. 뿌리부터 잎, 꽃까지 부분별로 찍어 놓은 사진이 반갑다. 뭔지도 모르고 냉이를 닮았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캐온 황새냉이, 그 새로운 존재에 놀라고 그 맛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도감에는 그의 꽃말이 ‘그대에게 바친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호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나를 위해 그대를 바친다 하지 않는가. 나를 위해 온몸을 바친 황새냉이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서툰 솜씨로 어설프게 캐느라고 뿌리가 끊긴 이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