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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7월호, 신작수필] 당신은 누구십니까 - 류동림

신아미디어 2013. 9. 10. 08:11

"장기 기증도 그랬다. 결심하고 가족들에게 승낙도 받았다.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절차도 알아야 하고 그리 급할 것도 없는 일이기에 미루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기증자가 많아 젊은 사람 것으로만 선택해서 받는다고 들었다, 이런 낭패가 따로 없다. 제때 즉각 실천하지 못하고 내일로 또 나중에 다음으로 미루다 기회를 놓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 인생에 미루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한 얼마나 많은 실패와 후회가 따를지 모른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류동림

 

   겨울에 접어든 11월은 다섯 시만 넘으면 어둠발이 든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다 날씨마저 추워 무엇에 쫓기는 듯 마음이 불안해진다. 거기에다 두 손에는 무거운 짐이 들려서 앞이 캄캄할 따름이다. 퇴근 시간까지 겹쳐 전철 구로역은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내린 사람들이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진다. 마치 썰물처럼 그 붐비던 소란스러움이 잠시 빠지는 듯하더니 곧이어 다음 차가 또 온다.
   차에서 내린 젊은 청년을 붙들고 “제가 저쪽 내려가는 선으로 바꿔 타야 하는데 여기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어디 있어요.” 묻자, “여기는 그런 것 없어요.”퉁명스레 대답을 남기고 사라진다. 바퀴 달린 가방은 운반이 쉽다는 생각으로 무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욕심을 부린 것이 잘못이었다. 또한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바퀴가 장애물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반값이라는 전단지에 쓰인 광고에 혹해 천으로 된 큰 가방에 가득 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시간에 구로역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대형마트가 있는 부천역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던 홈에 전철이 들어오기에 급히 탔다. 그러나 내가 내려야 할 온수역에는 서지 않고 몇 정거장을 더 지나 구로역에 도착해서야 다시 내려서 되돌아가야 할 형편에 있다는 걸 알고 난감했다. 직행임을 모르고 탔던 것이다.
   계단에서 내려올 때는 바퀴가 빠지든 고장이 나든 끌고 내릴 시도를 해 볼 텐데 가방을 들고 한 계단씩 도저히 오를 수 없어 망연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어떤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내 사정을 아는 주님이 보내 주신 수호천사 같았다. “제가 한번 들어 볼게요.” 힘겹게 들고는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것이었다. 끝까지 다 올라왔을 때 안도와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한숨으로 토해졌다.  몸집이라도 커 듬직하게 보였다면 덜 미안하겠는데, 그녀는 대략 사십대의 나이에 가냘프고 초췌한 모습이 고생을 한 인상이었다. 오늘 일만 해도 그 여자는 사서 한 고생이 아닌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쳤는데 그녀는 왜 다를까. 종교인일까, 아니면 봉사에 익숙해져 힘든 사람을 못 본 체할 수 없는 사람인가.
   무거운 가방을 내게 주고 그는 자기가 가려는 길을 되돌아 갈 차례였다. 그는 잠시 멈칫하며 무슨 생각인가 짧게 하다가 그 무거운 가방을 다시 들고 내가 전철을 타야 할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말릴 새도 없었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숨 돌릴 겨를 없이 내가 타야 할 전철이 도착했다. 되돌아가는 그 등 뒤에 대고 어디서 사느냐고 묻고 그는 수원에서 산다는 대답으로 끝이다. 이 고마움 절절한 마음을 담아 손 한 번도 잡아주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름을 모르니 앞으로 만날 기회도 영영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쉽다.
   차를 잘못 탄 일로 고생은 했지만 길이 간직할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게 되어 가슴이 훈훈해졌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고마운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선명한 모습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그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탄들 큰일 날 일은 아니지 않는가. 몇 분만 시간을 냈다면 이름도 연락처도 알 수 있고, 그를 통해 인생의 소중한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와 소통할 수 있는 인연을 가꾸었더라면 행복해질 터인데 좋은 친구를 놓친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그녀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오는 길이었을까. 피곤해 보이는 것이 아마 생업전선에서 힘든 일을 하다 오는 듯했다. 몸은 약하고 피곤해 보여도 무거운 짐을 들어 수많은 계단을 올리고 내릴 만큼 힘든 일을 많이 해본 듯싶다. 집에 가면 식사 준비며 집안일이 기다릴 터인데 녹초가 된 몸을 부려서 몸살이나 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할 길 없는 안타까움을 이웃 동료에게 얘기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에 누군가의 짐을 들어준 대가를 지금 받았다고 생각하라고. 그 본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갚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다. 앞으로는 누가 내게 요청하기 전에 내가 먼저 힘겨워 하는 이가 없나 살펴보리라. 하지만 앞으로 나이가 더 들면 마음은 있어도 몸이 받쳐주지 못하면 어쩌나. 도움을 받기만 하고 갚지 못하는 빚쟁이가 될까 걱정이 된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마음으론 다짐했지만 미루다가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기회를 놓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십 년 전 신도림동 우성아파트에 살 때는 헌혈할 기회가 많았다. 헌혈차가 전철을 타려는 바쁜 발걸음을 가로막고 헌혈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다음에 하지요.”라며 손사래를 치고 지나쳤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쉽게 오지 않았다. 마침 내가 다니는 교회에 나와서 헌혈을 한다기에 숙제를 끝내는 홀가분함으로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어 몇 가지 문답을 하는 과정에서 혈압 약을 먹는다고 하니 안 받는다고 한다. 퇴짜를 맞았다.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약 먹기 2년째 되는 해였다. 시간도 힘도 돈도 있을 때 또한 맘먹었을 때 쓰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놓치고 만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장기 기증도 그랬다. 결심하고 가족들에게 승낙도 받았다.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절차도 알아야 하고 그리 급할 것도 없는 일이기에 미루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기증자가 많아 젊은 사람 것으로만 선택해서 받는다고 들었다, 이런 낭패가 따로 없다. 제때 즉각 실천하지 못하고 내일로 또 나중에 다음으로 미루다 기회를 놓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 인생에 미루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한 얼마나 많은 실패와 후회가 따를지 모른다.
   아무튼 2012년 11월 5일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구로 전철역에서 무거운 가방을 들어다 준 수원 사는 여인,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것이 알고 싶어 이 글을 씁니다.

 

 

류동림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