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 그것이 걱정이다. 요즘 뇌물 파동의 중심에 서서 연일 뉴스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 일가를 보면, 아이가 대통령이 될 운을 타고났다는 말이 없는 건 다행이지만, 연루자들에게 돈을 바친 죄로 잡혀간 사람이 바로 ‘큰 부자’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 안 되는 건 다행, 큰 부자 되는 건 걱정인 할아비를 손자 녀석은 어떻게 생각할지 그것도 걱정이 된다. 이런 걸 기우라고 한다던데……."
기우杞憂 / 강호형
사람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돈 자랑, 힘 자랑, 자식 자랑, 마누라 자랑, 사돈의 팔촌이 장관이 된 것도 훌륭한 자랑거리가 된다. 나는 신통한 자랑거리가 없는 터라, 주량이 한때는 소주 다섯 병이었다는 걸 자랑이랍시고 내세우면서도 남들이 무슨 자랑을 하든 크게 부럽지는 않았다.
자랑거리도 나이 따라 변하더니 친구들이 손자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한 지가 10여 년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짐짓, 할아비 된 게 무슨 자랑이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자기 자식은 별로 귀여운 줄도 모르고 키웠는데 손자손녀새끼들은 그에 비길 바가 아니라며 침을 튀기는 데는 마냥 초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손자손녀에 빠지기로는 할머니들 쪽이 한수 위인 모양이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손자 자랑 경연을 벌여 놓고는 차례로 돈을 받고 들어준다는데, 자랑 한 번에 만 원씩 내라고 하면 삼만 원을 한꺼번에 내고 세 번 하는 할미도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나는 워낙 자식 농사가 늦은데다가 늦게 둔 남매마저 아이가 늦어 고희를 넘기도록 할아비 소리를 못 들으면서도 서운한 내색만은 삼가왔는데, 나이가 한참 아래인 아내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기만 봐도 자기 아이인 양 어르면서 노골적으로 부러워했다. 그러고 보니 ‘세금’을 자진해서 올려 내가며 입가에 거품이 일도록 쏟아내는 친구들의 손자 자랑을 속절없이 듣고만 있었을 아내가 가련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남의 떡에 침을 흘리며 기다린 끝에 마침 임신 중이던 며늘아이가 아들을 낳았다. 단숨에 병원으로 달려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낯선 아이와의 상면이 이루어졌다. 세상에 나오느라 어지간히 애를 먹은 듯 검붉게 멍이 든 얼굴에 눈도 뜨지 못한 아기는 제 아비 어미 이름이 적힌 명찰만 떼면 내 손자라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간호사의 부주의로 그 명찰이 떨어져나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내와 주변 사람들은 아이가 나를 빼닮았다고 야단들이었다. 저렇게 못생긴 녀석이 나를 닮았다고? 그렇다면 증거가 분명하니 좀 못생겼으면 어떠랴.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자랑스럽다는데 아무려면 고슴도치 새끼만이야 못하랴! 어느 동갑내기 친구는 일찍부터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더니 벌써 증손자를 보았노라고 거드름을 피지만 이제는 부러울 것 조금도 없다.
아이는 젖살이 오르면서 하루가 다르게 때를 벗더니 100일이 지난 요즘은 생판 다른 아이가 되었다. 신바람이 난 아이의 할미는 세상에 우리 손자만큼 잘생긴 아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둥 허풍이 대단한데, 나까지 그 허풍이 허풍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아이가 잘생긴 것이야 백 번 경하할 일이지만 나는 요즘 서운한 감정을 감추기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못생겼을 때는 날 닮았다고 그다지도 법석들을 떨더니, 아이 얼굴이 포동포동해지자 아무도 날 닮았다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못난 할아비에 잘난 손자가 나온 것을 어찌 서운해 하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니…….
볼 때마다 재주가 하나씩 늘어가는 아이가 이렇듯 대견하고 신통하다가도 문득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렇게 천진한 것이 장차 이 모진 세파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가 걱정인 것이다. 학원을 다섯 군데씩 다니고도 족집게 과외까지 받아가며 대학을 마쳐봐야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가 하늘의 별따기요, 운 좋게 자리를 얻어도 머지않아 퇴출을 걱정해야 한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불경기로 고통, 정치가들은 진흙탕에서 개 싸우듯 싸우느라 꼴이 말이 아니고, 권력자들은 뇌물 시비에 휘말려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 어디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나.
할아비야 근심에 빠져 있거나 말거나 할미는 틈만 나면 손자 찬양에 신바람을 일으킨다. 아이가 장차 ‘큰 부자’가 될 거라는 작명가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할미인 만큼, 친구들 모임에 가서는 한 오만 원쯤 선불하고 자랑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또 그것이 걱정이다. 요즘 뇌물 파동의 중심에 서서 연일 뉴스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 일가를 보면, 아이가 대통령이 될 운을 타고났다는 말이 없는 건 다행이지만, 연루자들에게 돈을 바친 죄로 잡혀간 사람이 바로 ‘큰 부자’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 안 되는 건 다행, 큰 부자 되는 건 걱정인 할아비를 손자 녀석은 어떻게 생각할지 그것도 걱정이 된다.
이런 걸 기우라고 한다던데…….
강호형 ----------------------------------------
강호형님은1938년 경기도 광주 출생 수필가. 수필집 『돼지가 웃은 이야기』 등 3권, 수필선집 『바다의 묵시록』 등 3권, 현대수필문학상, 황의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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