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다고 믿는 나, 오직 노력하는 자만이 성취하는 거라 믿는 나는 어떤 풍랑 가운데에서도 노를 멈추지 않고 바다를 헤쳐 나가려는 뱃사공처럼 삶의 노정에 무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 그래도 노력하는 자만이 성취한다고 믿습니다.
손 없는 날 / 김애양수필가
오랜만에 A여사가 왔다. 언제나처럼 딸과 동행이었다. 학생 때부터 생리통으로 드나들었던 여사의 맏딸은 어느덧 아이 엄마가 되어 있었다. 모녀의 방문으로 진료실이 환해졌다. 손가락 사이에 알사탕만 한 에메랄드가 번쩍이는 여사는 여전히 화려하고도 우아했다. 몇 년 만에 보아도 변치 않고 활기찬 여사의 젊음의 비결이 무언지 궁금했다. 특히 주름 한 줄 없이 팽팽한 얼굴이 신기했다.
전에는 병원 근처에 살아 자주 얼굴을 보아왔지만 이사 후엔 뜸했다. 건설업을 하는 남편이 손수 큰 집을 지어 출가한 두 딸까지 온 가족이 모여 산다고 했다. 장남이 유학을 다녀왔지만 취업이 안 되어 걱정이라고 말을 해도 여사에겐 그다지 문제가 아닌 성싶었다. 독립할 나이가 되어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며 사는 자식을 ‘캥거루족’이라 부른다는데 A여사 경우는 캥거루 엄마 노릇을 자청하는 듯이 보였다. 함께 사는 동안엔 손자의 유치원비까지 감당하겠노라 활짝 웃는 A여사가 이 시대의 진정 행복한 부모 같았다. 이번에 딸에게 둘째 아이가 생겨 병원을 찾아 왔단다. 멀리서 부터라니 더욱 반가웠고 또 크게 축하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쁜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월경이 멎은 지 두 달이라고 해서 건강한 임신낭을 기대했건만 초음파 소견은 그렇지가 못했다. 태아 심음이 감지되지 않는 계류유산으로 진단되었다. 이런 경우는 소파수술이 불가피했다. 아직 씨앗에 지나지 않는 단계일지라도 한 생명의 사멸을 전해야 하는 이런 때가 의사에게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리라. 새하얀 얼굴의 얌전한 산모는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모녀는 수술 준비를 하고 다시 오겠다며 어깨를 늘인 채 돌아갔다. 착한 우리 딸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냐고 따져묻던 A여사의 질문에 계류유산이란 산모 탓이 아니란 점과 원인 없이 누구에게나 흔히 찾아온단 설명이 그나마 납득이 갔던가 보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그들 모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연락을 해보려다가 딴 병원으로 갔으려니 하고 참았다. 예전에는 단골환자였어도 이젠 멀리까지 간 마당에 꼭 내게 오란 법도 없지 않은가. 세상엔 크고 시설 좋은 병원도 많으니 굳이 우리 병원에 오고 싶지 않을 것도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이나 지나 A여사를 잊을 무렵 홀연히 모녀가 나타났다. 여사의 큰딸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혈도 있고 배가 많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 다그쳐 물으니 우물쭈물 대답을 미뤘다. 아마 유산이란 내 진단이 믿기질 않아 시간을 끌었나 보다 이해하고 얼른 수술 준비를 시켰다. 그때 A여사가 내 팔을 잡아끌더니 속삭이듯 귀에 대고 말했다.
“이렇게 중대한 수술을 아무 날에나 받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손 없는 날’을 받아 온 거예요.”
이날 저날 다 고르다 음력으로 20일인 오늘에야 오게 되었다나? 물론 나도 이사할 때에 ‘손 없는 날’을 꼽아보란 소리는 들어보았다. 음력으로 끝수가 1·2일인 날에는 동쪽, 3·4일인 날에는 남쪽, 5·6일인 날에는 서쪽, 7·8일인 날에는 북쪽에서 귀신이 활동한다고 믿는다. 단지 9·10일엔 그 어떤 방향에도 악귀가 없으므로 이사를 이날에 맞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술 날짜에 이를 적용하는 A여사가 놀라웠다. 더구나 계류유산이라면 죽은 태아조직에서 나쁜 독소가 나와 패혈증과 같은 전신감염이 우려되는 응급상황인데 말이다. 환자의 심각성을 알려주지 않은 내 탓인 것만 같아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A여사는 거기서 그치질 않았다. 나를 붙들고 묻기 시작했다. 앞으로 열흘 후면 윤달이 시작되는데 그때까지 수술을 미루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윤달엔 신들이 모두 휴가를 가기 때문에 어떠한 흉한 일을 해도 화가 미치지 않는다면서.
“뭐라구요?” 버럭 고함이 나도 모르는 사이 목구멍을 뛰쳐나갔다. 딸이 유산되어 열이 나고 배가 아픈 이 마당에 귀신 타령이나 하는 A여사에게 절로 화가 솟구쳤다. 여태까지 미소만 짓던 내가 고함을 치자 A여사는 멈칫하며 순순히 나를 수술실로 보내 주었다.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다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A여사의 삶의 방식이 옳고 내가 그른 건 아닐까?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다고 믿는 나, 오직 노력하는 자만이 성취하는 거라 믿는 나는 어떤 풍랑 가운데에서도 노를 멈추지 않고 바다를 헤쳐 나가려는 뱃사공처럼 삶의 노정에 무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과학의 이름 아래 귀신이나 사주 따위는 없다며 거리낌없이 행동했기 때문에 크고 작은 화를 자초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방위도 살피고 날짜도 헤아리며 납작 엎드려 매사에 더욱 조심하며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반면에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고 풍족하게만 보이는 A여사가 하늘의 보필을 잔뜩 받는 귀부인처럼 부럽게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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