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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7월호, 신작수필] 멧비둘기와 두 어머니 - 고춘

신아미디어 2013. 9. 12. 11:25

"나는 지금도 대모산을 거닐며 멧비둘기 울음소리를 들을 적마다 고향집 앞뒤 산에서 온종일 울어대던 멧비둘기를 떠올리며, 동서 간의 투박한 정을 나누던 두 분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느새 젖어 있는 눈시울로 손수건 대신 투박한 두 주먹을 가져간다."

 

 

 

 

 

 

 멧비둘기와 두 어머니     /  고  춘수필가


   이 땅에서 듣는 텃새 울음소리 중, 나의 심금을 가장 절실하게 건드리는 소리는 종다리 소리와 멧비둘기 울음소리다. 철부지 적, 장차 내 앞에 열릴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며 마음 설레게 한 소리는 종달새의 지저귐이었다. 그와는 달리 들을 적마다 뭔지 모르게 사람의 가슴에 사무쳐오는 소리는 멧비둘기 울음소리였다.

 

   내가 태어나서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순자강子江이라 부르는 섬진강 중류지역, 드넓은 갯밭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그 갯밭은 그러니까 강과 우리 마을 사이에 아스라이 펑퍼져 있는 평원이다. 해마다 사질토의 그 갯밭에 봄기운이 무르익으면, 작년에 베어낸 호밀포기 그루터기에 어느새 네댓 개의 알을 까서 품어주고 있는 새가 있었다. 종달새였다. 알을 품고 있다가 무슨 연유인지 갑자기 ‘삐르르’ 소리를 내며 수직으로 하늘 높이 날아올라, 들판 위로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에서 알과 강나루를 번갈아 내려다보며 무어라고 재잘거리는지 영롱한 목소리로 봄 하늘을 장식하던 종달새. ‘삐이쭐, 찌이지프 찌이지프 찌이지프’하다가는 ‘찌이지크 찌이지크, 쓰이 쓰이, 류우 류우 류우 류우, 찌이지크 찌이지크, 류우 류우 류우 류우’ 한다. (※ 울음소리=『동아백과』에서 인용)
   봄 한철 들려오는 그 종다리 소리를 화려하고 현란한 귀부인의 맵시에 견준다면 사시사철 우리들 주변에서 들려오는 멧비둘기 소리는 그지없이 투박한 촌부의 매무새다. 종다리 소리에는 내 어린 시절의 찬란한 꿈이 있어 좋았고, 멧비둘기 소리에는 소박한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어 좋았다. 하지만 종다리의 울음 속에 깃들였던 나의 꿈은 어디로 갔는지 가뭇없이 사라지고 없으니 오늘은 멧비둘기 이야기만 해야겠다.

 

   인가에서 조금만 벗어났다 싶으면 들리는 멧비둘기 소리. 새 울음소리 중 가장 향토색 짙은 소리다. 조선팔도 두메산골 어느 집에서나 시도 때도 없이 들어왔던 소리기 때문이다. 그 멧비둘기 소리가 내 집에서 지척인 서울의 대모산 허리에서도 어김없이 들려온다. 내가 기력에 걸맞잖게 대모산을 즐겨 누비는 이유다. 슬픈 사연을 가득 머금은 것 같은 그 한恨의 소리, 그래서 까마득한 옛날의 어머니 음성을 듣는 것 같아 자꾸만 듣고 싶은 소리다.

 

   멧비둘기는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전령사다. 입춘 우수를 지나서 해가 노루 꼬리만큼 길어지고 눈석임물이 시나브로 언 땅을 녹이기 시작하면 이내 들려오는 것이 멧비둘기 울음소리다.
   ‘구그으~ 구우구우~’ ‘뽀뽀오~ 꾸우꾸우~’ ‘쿠우 쿠루 쿠우쿠우’ 듣는 사람의 청감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들리는 모양인데, 어쨌거나 봄의 전령인 이 소리에 농부들은 겨울 한철 노루잠에서 깨어나 또 한 해의 시름겨운 농사를 시작한단다.
   경상도 사람들은 비유의 능력이 탁월한가 보다. 이 소리를
   ‘서방 죽고 자석 죽고 구우 구루 구루’, ‘제집 죽고 자석 죽고 서답빨래 누가 할꼬!’ 라고 은유하여 듣는다니 놀라운 비유의 능력이다. 울음소리에 한恨이 스며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러는 것일까? 양지바른 곳에 나와 앉아 봄갈이 준비와 각종 씨앗으로 모판 만들기에 분주한 아낙네들의 입에서는 ‘저것 우는 소리는 참말이지 청승맞아 못 듣겠어! 무슨 새가 원 저렇게도!’하는 푸념이 흘러나오곤 한단다.
   아, 유년 시절에 어머니 슬하에서 듣던 그 청승맞은 소리! 듣고 또 들어도 물리지 않는 그 투박한 소리. 그것은 바로 투박하기 그지없던 나의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타고난 박색에다 중년을 넘기면서부터는 항상 몸에 병을 달고 살았다. 그래도 천생 가난한 집안의 큰며느릿감이었다. 대처에 나가 사는 막내 동서만 빼고는 같은 마을 가까운 곳에 각각 제금 나 살고 있는 두 동서들을 다달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제삿날이면, 아침나절 일찍부터 불러들여 군기 잡아 잘도 거느리곤 하였다. 손아래 두 동서는 당신에 비하여 용모나 맵시가 의젓하건만 큰동서의 지시에 군말 없이 잘도 따라주니, 평소에도 그랬었지만 제삿날에는 더더욱 서로 간에 엇나가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것은 물론 우리 숙모님들이 무던한 탓이기도 했겠지만 나의 어머니가 제향날 하루만 빼고는 모든 일에 자신의 의견을 접고 덕으로 동서들을 거느린 탓이었다.

 

   어머니는 뒷날 나의 양어머니가 되실 둘째 동서와 함께 순자강변이나 옥과천 하류로 민물새우를 건져 올리거나 다슬기를 잡으러 간 일이 종종 있었다. 당시에 네댓 살밖에 안 된 나와 나의 사촌형을 앞세우고서였다. 그때마다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얕은 개울물 저만치 어디쯤에서 멧비둘기가 극성스레 울어대곤 하였다. 얄밉도록 애틋하게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 소리를 들으며, 맑은 물속 자갈밭에서 집어 올린 다슬기나 깨끗한 물웅덩이에서 건져올린 새우는 언제고 두 분이 각각 옆구리에 끼고 있는 앙증맞은 소쿠리를 거의 반씩이나 채우고 있었다. 그 다슬기면 다슬기, 새우면 새우를 놓고 예외 없이 두 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들이 많은 형님이 많이 가져가야 한다느니, 이런 것은 딸들이 더 좋아하는 것이라 딸이 많은 자네가 많이 가져가야 한다느니……. 언제나 벌어지는 실랑이 끝에 결국 어머니가 작은어머니 소쿠리에 한 움큼씩 더 얹어주고서야 잠잠해지곤 하였다. 파젯날 새벽, 음복하고 남은 제수음식을 나눌 때에도 똑같은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었다.
   형은 아우의 논에, 아우는 형의 논에 낟가리를 더 갖다 놓으려다 달밤에 오가는 길에서 마주친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들어보았으나, 무엇이 되었든 노느매기하면서 동서들끼리 예외 없이 이런다는 이야기는 나의 유년 시절의 우리 어머니들 말고는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하였다.

 

   내가 만으로 채 열 살을 채우기도 전에 그 어머니가 세상을 하직하였다. 자신의 몸이 온전치를 못하니 시골살림을 일단 접고 대처에 나가 사는 아들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나 병든 몸은 누구에게나 짐이었다. 당시는 내가 너무 어려서 무슨 연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얼마 뒤 들판에 가을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 어머니는 둘째 동서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려 나를 앞세우고 고향 마을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도 마을 뒷산에서는 멧비둘기가 극성맞게 울어대고 있었다. 작은집 안마당에 들어서는 어머니를 보자 버선발로 뛰어내려와 병든 손윗동서를 격하게 끌어안던 작은어머니! 아, 나는 지금 그때 일을 회상하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 작은어머니는 뒷날 나의 어머니가 되시었다. 외아들인 나와 한 살 터울의 사촌형이 나이 열일곱이나 되어서 작은어머니를 버리고 저 세상으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대모산을 거닐며 멧비둘기 울음소리를 들을 적마다 고향집 앞뒤 산에서 온종일 울어대던 멧비둘기를 떠올리며, 동서 간의 투박한 정을 나누던 두 분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느새 젖어 있는 눈시울로 손수건 대신 투박한 두 주먹을 가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