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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비평 2012년 2월호, 촌감단상] 소나무의 미소 - 김용순

신아미디어 2012. 3. 1. 14:47

소나무의 미소

  무성했던 잎들이 다 지고 나니 소나무의 자태가 고고하게 다가온다.
반지르르 넓은 잎으로 숲을 꾸미던 여름철에는 가칠가칠 가는 잎 소나
무가 눈에 띄지도 않았다. 울긋불긋 화신이 점령한 봄 동산에서는 존재
조차도 거추장스러운 나무였지. 며느리밥풀꽃을 발견한 어느 사진작가
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주변의 소나무 가지를 마구 쳐내어 렌즈 밖으
로 몰아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한겨울 이곳 봉곡사 초입의 소나무 숲
에 드니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꽃 피우던 모든 것들은 서릿바람에 나뭇
잎마저 다 잃은 채 사색의 앙상한 가지로 떨고 있는데, 소나무는 여름의
모습, 봄의 자태 그대로 의연히 푸르다.
   여기 소나무는 여느 소나무와는 조금 다르다. 군락을 이루고 있지만,
곧게 자라지 못하고 한결같이 구부러졌으며 커다란 흉터까지 지니고 있
다. 일제강점기에 오랜 전쟁으로 군수품이 모자라던 일본이 연료를 조
달하기 위해 소나무의 아랫동아리를 브이자로 도끼질해 놓고는 상처에
서 흐르는 송진을 채취해 간 흔적이라고 한다. 너무나 아파서 몸부림쳤
는가, 몸뚱어리가 뒤틀리고 휘어졌으니……. 상처가 심해서 수술을 받
은 모양인데, 그 흔적이 웃는 입 모양으로 남아 있어 아이러니하다.
   소나무를 사람이라 친다면 나를 키운 어머니일 것이다. 어릴 적, 물오
른 송기는 나른한 이른 봄의 허기를 달래 주었고, 제삿날 입 안에서 사르
르 녹던 송화다식도 소나무의 헌신으로 얻은 희생의 결과물이었다. 어
찌어찌 맺은 솔방울은 교실 난로 속으로 들어가 우리들의 연필 쥔 언
손을 녹여주기 일쑤였다. 새로 돋은 연한 솔잎도 이런저런 먹을거리가
되고, 금빛으로 물든 잎은 그것을 익힐 때 불쏘시개요, 삭정이는 땔감으
로 쓰였다. 솔가리에서 솔 삭정이로 옮겨붙은 불꽃이 활활 타올라 이내
구들장까지 덥혀 놓은 뒤에야 소나무는 한 줌 재로 사위었다. 그래서
소나무 숲에 들면 어머니가 눈에 선하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호젓한 숲길을 걷는다. 조금 전까지 옷 속으로
파고들던 칼바람은 간데 없고 솔바람이 불어와 일상의 어수선함을 쓸어
간다.
   저만치에서 늙은 소나무가 다가온다. 도끼질의 시련을 견디어낸 소나
무의 흉터가 웃는 입으로 보인다. 벙시레 웃는다. 지난밤 꿈속에서 애면
글면 애태우던 나를 위무해 주던 어머니의 미소처럼 편안하다. 나도 슬
며시 웃어 본다.
   머지않아 송화가 피겠지. 노란 꽃가루가 흩날리는 날 나는 또 이길
을 걷게 될 것 같다.

김용순 -----------------------------------------------
1997년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