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비름
어린이 대공원에 갔다.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나들이 온 부부, 풍선
을 손에 든 아이, 머리에 커다란 방울을 단 아이, 돗자리를 깔고 담소를
나누는 가족들 모두 정겨운 모습이다. 한참을 쳐다본다. 사람들에 섞여
천천히 발길 가는 대로 걷는다. 하늘 높이 수려함을 뽐내는 키가 큰 종려
나무와 야자수들도 바라보고 선인장과 분재들도 본다. 분재는 수령 백
년 이상 된 것도 많아 그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는 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다. 억지로 자라지 못하게 한 것 같아 나무에게 아주 미안하고 마음
한 구석이 아프다.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있다. 금잔화와 베고니
아가 소담스럽다. 맨드라미 사이로 어린 시절 집 화단에 많이 심었던
색비름이 눈에 띈다. 반갑다. 몇 잎을 따서 수첩 갈피에 넣는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기 위해서다. 어머니도 분명 반가워할 것이다. 색
비름은 어린 시절 집 화단에 맨드라미와 함께 지천으로 많았는데 요즘
은 보기가 드물다. 시골에 가 보아도 봉숭아나 채송화나 백일홍은 여전
히 많은데 색비름을 심은 집이 없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오늘
이곳에서 어렸을 적 보았던 색비름을 대하니 마음은 고향집 화단으로
간다. 색비름은 막내고모를 닮았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땋아 붉은
댕기를 드리던 막내고모를 동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탐스럽다고 하였
다. 잎사귀가 색색으로 물드는 것이 특징인 색비름은 복스럽게 웃는 막
내고모의 하얀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화려하게 물드는 잎사귀에 가려
꽃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잎사귀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시골
방앗간 옆에는 빨간 맨드라미와 같이 색색으로 잎사귀가 물든 색비름이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것을 알려준다.
잎사귀가 초록, 노랑, 분홍으로 색이 들어있는 색비름은 어릴 적에 명절
이면 어머니가 정성들여 해 주었던 색동저고리를 닮았다. 어머니는 명절
에 한 살 위인 언니는 노랑저고리를 해 입히고 나는 꼭 색동저고리를 해
입혔다. 지금도 언니의 추억 속에는 노랑저고리 입은 소녀가 자라고 있고
나의 추억 속에는 색동저고리 입은 소녀가 자라고 있다. 가끔 화분에 심은
비슷한 식물을 보는데 그것은 어렸을 적 시골집 화단에 심었던 나에게
익숙한 색비름이 아니고 다른 종류의 화초다. 시골집에 많이 있던 색비름
은 색이 더 선명하고 식용이다. 어머니는 다른 화초보다도 더 정성들여
키웠었다. 줄기가 굵은 색비름이 선명하게 색색으로 물들면 추석이 가까
웠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시골집에 없는 것이 아쉽다.
해마다 추석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송편도 빚었지만 송편 외에 증편
을 하였다. 증편은 쌀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만든다. 증편에는 웃기로
색비름을 썰어 넣었다. 잎을 돌돌 말아 썰어 골고루 뿌리면 초록, 노랑,
분홍색 등의 색색의 잎들이 마치 색동옷을 입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거기에 검은깨를 뿌리고 석이버섯채를 올리면 증편은 가마솥 가득 꽃
이 되어 피어오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썰어 한 접시 담아주면
그 모양이 너무 예뻐 선뜻 먹지 못한다. 쟁반에 담아 이웃집에 갖다
드리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그 떡이 자랑스러워 쟁반을 덮은 보자기를
몇 번씩 열어본다.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까 조심조심하며 걷는다. 형
편이 어려운 집들이 많았던 때라 시골 고향에서는 집집마다 이렇게 화
려한 떡을 해 먹지 못하는 집이 많았다. 한편으론 자랑스러우면서도
제대로 떡도 못해 먹으면서 명절을 지내는 이웃집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떡을 못하는 이웃집에 심부름을 시켰고 떡을
받은 아주머니는 고마우면서도 자식들에게 떡도 실컷 못 먹여 속상해
했던 것 같다. 이렇게 맛있게 먹던 색비름을 얹은 증편을 어머니는 하
지 못한다. 어머니는 이제 떡을 만들 기력이 없다. 장독대에는 떡시루
만이 쓸쓸하게 놓여있다.
캐나다로 이민 간 동서의 친정어머니는 찹쌀고추장이 아닌 밀가루로
추장을 유난히 맛있게 담갔다. 지금도 가끔 그 맛이 생각이 나서 사돈어
른에게 만드는 법을 못 배운 것이 후회가 된다. 나야 사돈댁이니까 어려
워서 그렇다지만 동서는 그래도 친정어머니니까 잘 배웠겠지 하며 물어
보니 어머니가 해 주는 것 가져다 먹을 줄만 알았지 배우지는 못했다고
한다.
좋은 것은 배우고 익히고 대물림을 해야 되는데 우물쭈물 살다보니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추억만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아쉽다. 명문가
들의 가풍은 정신적인 대물림만이 아니라 음식 대물림도 이어져 내려온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늦었다
고 생각되는 지금부터라도 기억나는 것 하나라도 기록하고 지켜나가리
라 다짐한다.
메모지를 들고 어머니 앞에 앉는다. 막걸리 만드는 법부터 적는다.
막걸리를 만들던 젊은 어머니 모습이 생각난다. 깨끗한 약쑥을 깔고 누
룩을 띄우던 옥양목 저고리의 쪽찐 어머니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증편
만드는 법을 적는다. “요즘 신식으로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케케
묵은 구식 음식을 배우려고 하느냐.” 하면서도 어머니는 즐거운 표정이
다. 꼭 어렸을 적 옛날이야기를 해주던 모습이다.
장독대에서 작은 떡시루를 꺼낸다. 내년 추석에는 귀찮게만 생각해서
떡집에서 사다 먹었던 송편도 만든다. 그리고 색비름을 구해 잘 키워서
막걸리를 넣은 증편도 만든다. 오색찬란한 증편이 무지개꽃 되어 눈앞
에 어른거린다. 색동저고리 입은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이인환 ------------------------------------------------------
경기 양평 출생. 월간 ≪미술과 생활≫ 편집기자. ≪아침문학≫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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