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면서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거실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고즈넉해진다.
창밖으로 가랑비가 안개처럼 폴폴 내려서인가, 커피 잔을 들고서 창
너머 푸르스름한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한라산을 바라본다. 쌉싸래한 커
피 맛이 혀끝을 적시며 아련한 향을 전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마셔온 커피, 아마도 여고 이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아버
지 친구분이 작고 불그스름한 병에 담긴 커피를 일본에서 가지고 와서
나에게도 선물로 주셨다. 그때 처음으로 마셔보았다. 투박하고 누르스
름한 종기에 커피 가루를 놓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거품이 일면서 마른
검불 타는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 쌉싸래하면서도 구수한 맛은 여태까
지 만나보지 못한 맛이었지만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그 이후 평생 입맛
을 사로잡아버린 끈질긴 중독처럼 평생을 따라다닌 커피는 첫 만남의
느낌이 아련히 담긴 첫사랑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거실엔 안개 낀 섬을 감도는 물새처럼 브르흐의 바이올린 1번 2악장
이 흐른다. 음악과 커피의 조화만큼 매력적인 궁합도 드물 게다. 음악을
이론으로 설명할 실력은 없지만 감상하는 것은 무척이나 좋아한다. 부
드러운 곡선으로 흐르다가 물기둥이 터지듯 솟아오르고, 끊어질 듯 다
시 이어지면서 나비가 날갯짓하듯이 여울지는 춤사위는 고요한 듯 찬란
하여 물비늘을 일으키면서 흔들린다.
커피는 향香, 산酸, 감甘, 고苦, 쾌快의 다섯 가지 품격이 있다. 커피 맛
은 원두를 볶는 과정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풀 시티 로스팅’
은 신맛은 거의 없어지고 쓴맛과 진한 맛이 커피 맛의 정점에 올라서는
단계를 말하는데, 원두의 색깔은 짙은 갈색으로 변한다. 정신이 맑아지
고 싶을 때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진한 커피, 에스프레소가 탄생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맛은 키스보다 황홀하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
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하다.’라고 커피 맛에 환장하여 위대한 작품을 남
긴 프랑스 작가 ‘타테랑’의 커피 예찬은 말 그대로 오르가슴을 넘나드는
에스프레소의 맛이며 향기이다.
어느 날인가 가까운 친구와 다투어서 몇 개월씩 연락을 끊고 살다가
우연찮게 만나게 되었는데 서먹함을 지워 준 것이 커피였다. 커피 한잔
으로 말문이 텄고 어느덧 봄눈 녹듯 냉기가 사라졌다. 누군가 처음 만나
는 자리에서도 한 잔의 커피를 나누게 되면 상대방을 향한 경계가 허물
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마음이 가는 상대에게 “커피 한잔하실래
요?”라는 말을 건네게 된다.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이어진 만남이 승화
되어 새로운 인연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으니 그 시절 아날로그식 데이
트 신청은 아직까지도 낭만으로 남아있다.
한창 귤 수확으로 바빠지는 늦가을이 오면 직접 귤 농사를 짓지 않아
도 이웃집 귤을 따러 간다. 해마다 나누어 주는 귤을 앉아서 받아먹는
게 염치가 없는 이유가 크지만 일하러 오신 어르신들의 구수한 경험담
과 제주민요를 얻어듣는 재미와 눈발 날릴 것 같은 새벽녘에 나무에 불
을 붙이고 둘러앉아 마시는 커피의 깊은 맛이 어김없이 나를 부르는 것
이다.
이처럼, 음악을 들으며 느긋한 시간을 가질 때, 나와 함께 동행하는
커피 맛은 추억으로 가는 길이며 그리움의 시간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만나서 숨김없는 내면을 펼쳐 보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 잔의 갈색 톤
의 액체인 커피지만 사람의 정을 다정하게 섞게 하고 다시 그리움으로
마주하고 싶어 서로를 불러 앉히는 것을 보면 커피는 미묘한 매력을 지
닌 마법의 액체이다. 어쩌면 먼 길을 떠난 사람들의 한숨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애타게 기다릴 것도 없는 나이’라는 시구를 보며 가슴 저리는
나이가 되었지만 커피를 마시면서, 연둣빛 오월이 지나감을 아쉬워하는
대신 꽃은 다시 핀다는 소망으로 유월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정영자 ------------------------------------------------------
제주 출생. 조엽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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